이국의 부엌에서 다시 피어난 나

<이국땅에서 피어난 밥상의 기억> 시리즈 3 (10)

by 이민자의 부엌

이민을 와 처음 부엌에 섰던 날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낯선 전기레인지 앞에서 밥을 짓는데, 불 조절이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쌀은 한국에서보다 단단했고, 물맛은 어딘가 모르게 낯설었다.
그 작은 차이들이 마음을 뒤흔들어, 나는 한참이나 멍하니 서 있었다.


내가 정말 멀리 왔구나.”
밥이 다 되기도 전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밥 냄새와 함께 밀려온 건 향수가 아니라, 돌아갈 수 없는 거리에 대한 실감이었다.
그날 이후 부엌은, 내가 이국의 현실을 가장 먼저 마주하는 공간이 되었다.


한동안 언니들이 한국에서 김장김치며 장아찌, 마른반찬을 부지런히 보내주었다.
택배 상자를 열면 김치 냄새가 새어나오고, 그 냄새 하나로 온 집안이 순식간에 고향이 되었다.
그때는 그 고마움을 온전히 다 알지 못했다.
누군가 나를 위해 챙겨줄 것이라 믿었던 시절, 나는 아직 어렸다.


세월이 흘러 부모님은 떠나시고,
언니들도 이제는 각자의 삶을 챙기기 바쁜 나이가 되었다.
이제는 누군가의 손맛을 기다리기보다,
내 손으로 내 밥상을 꾸려야 할 차례가 되었다.


캐나다 슈퍼에서 산 양파로 끓인 된장국,
현지 마트의 무로 담근 김치,
참치캔 하나로 맛을 낸 김치찌개까지—
모양은 조금 달라졌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내 손의 기억이 스며 있다.


처음엔 이국의 부엌이 낯설고 차가웠다.
하지만 어느 날,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냄비 앞에 서서 문득 깨달았다.
“이곳이 바로 내 자리구나.”
낯선 공간이라도 내가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누군가를 위해 상을 차린다면
그곳은 이미 ‘집’이 된다.


이민자의 부엌은 늘 조금 불편하고, 늘 조금 부족하다.
한국처럼 금방 장을 보러 갈 수도 없고,
가끔은 고춧가루 한 숟가락에도 마음이 쿵 내려앉는다.
그러나 그 부족함이 오히려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손에 익은 조리법 대신, 마음에 익은 인내로 음식을 완성했다.


이제 밥상을 차리는 일은 남편을 위한 작은 사랑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나 자신을 위한 의식이 되었다.
하루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밥 냄새에 마음을 달래는 그 순간—
그 향기가 집 안을 가득 채우면, 나는 다시 ‘나’로 돌아온다.


낯선 나라의 식탁 위에 국 한 그릇이 놓이고,
수저 소리가 조용히 울릴 때면,
그 소리는 내 안의 불안을 잠재우는 자장가 같다.
이국의 부엌이 어느새 나의 안식처가 된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비로소 배웠다.
‘이민자’라는 이름을 달고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온전한 한 사람으로 설 수 있다는 것을.
언어가 달라도, 재료가 달라도,
밥을 짓는 마음만큼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금도 가끔 한국의 겨울 아침이 그립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된장국을 끓이던 소리,
창문을 타고 들어오던 밥 냄새,
그 모든 것들이 내 안의 고향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그리움이란, 돌아갈 수 없기에 더 따뜻한 것임을.
그래서 오늘도 캐나다의 부엌에서 냄비 뚜껑을 연다.
그리고 김이 피어오르는 순간, 조용히 중얼거린다.


“그래, 이곳이 내 자리구나.”


밥 한 공기, 국 한 숟가락 속에
나는 지난 세월과 고향의 시간, 그리고 오늘의 나를 함께 담는다.
이민의 세월이 길어질수록, 밥 냄새는 깊어졌다.
그 향기 속에는 삶의 온기와, 내가 걸어온 길의 의미가 함께 끓고 있었다.


이국의 부엌에서, 나는 나를 다시 세운다.
된장의 냄새 속에서 고향을 느끼고,
따뜻한 밥 한 그릇에서 오늘의 나를 만난다.


이제 나는 묻지 않는다.
‘나는 어디에 속해 있을까?’
대신 이렇게 말한다.


“이곳이, 나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밥을 짓는다.


여러분은 밥을 짓거나 음식을 준비하며
문득 ‘나’를 다시 돌아본 적이 있으신가요?
그 순간의 마음이 오늘의 하루에 어떤 따뜻함을 남겼는지,
잠시 떠올려 보시면 좋겠습니다.



시리즈 3를 마치며 ― 이국땅에서 피어난 밥상의 기억


이민자의 식탁 위에는 단순한 음식 이상의 것이 담겨 있습니다.
그건 고향의 향기이자, 가족을 향한 사랑,
그리고 낯선 땅에서 나를 지켜낸 삶의 흔적들이었습니다.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김치를 담그는 모든 시간이
결국 나를 다시 나답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이국의 부엌에서 피어난 작은 밥상의 기적,
그 이야기를 함께 걸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브런치북 안내

시리즈 3, 이국땅에서 피어난 밥상의 기억이 이제 완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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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음 시리즈에서는 <이민자의 배움 서사> 로 찾아뵙겠습니다.
49세에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시작된 이야기,
캐나다의 칼리지 2년과 대학 4년을 지나며
나는 다시 나를 발견했습니다.


다음 시리즈에서도 따뜻한 마음으로 인사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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