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끝에서 피어난 기억, 가스페

<여행, 풍경, 그리고 사랑> 시리즈 8 (4)

by 이민자의 부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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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다섯 해 전, 우리는 캐나다의 동쪽 끝을 향해 차를 몰았다.
어디까지 가는지보다, 누구와 함께 가는지가 더 중요했던 여행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나란히 앉아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인생의 한 페이지를 조용히 넘기던 시간. 그 여행의 목적지는 대서양과 맞닿은 가스페(Gaspé)였다.


토론토에서 출발해 왕복 거의 삼천오백 킬로미터에 이르는 긴 거리였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가벼웠다. 길 위에 오르기 전부터 이미 이 여행이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스페로 가는 길목에서 우리는 퀘벡 시에 들러 하룻밤을 보냈다. 남편은 감기 기운에 몸이 무거웠고, 그날부터 나는 자연스럽게 운전대를 더 오래 잡게 되었다.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마음의 표현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날들이 있었다.


다음 날 우리는 리무스키라는 작은 어촌 마을에서 다시 하루를 묵었다. 그곳에서부터 세인트 로렌스 강을 따라 이어지는 길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풍경의 연속이었다. 강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넓고, 바다라고 하기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물길. 그 거대한 하류를 따라 도로는 절벽과 함께 굽이굽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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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창을 조금 열면 바람이 바다의 냄새를 실어 왔다. 짭조름한 공기와 함께 밀려오는 파도 소리가, 우리가 점점 더 먼 곳으로 가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비취빛 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서, 햇살에 반짝이던 물결은 마치 살아 있는 보석처럼 빛났다.


절벽이 끝나는 지점마다 작은 마을들이 나타났다. 하얀 벽에 빨강, 초록, 파랑 지붕을 얹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은 오래된 동화책 속 장면 같았다. 오른편에는 산맥이, 왼편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대서양이 펼쳐졌다. 그 길을 달릴 때면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아니, 어쩌면 그 순간만큼은 정말로 그랬는지도 모른다.


해안 절벽 근처의 고즈넉한 어촌 마을들은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배들, 햇살을 머금은 어망, 그리고 절벽 너머로 천천히 내려앉는 석양. 그 풍경 앞에서 우리는 자주 말을 잃었다. 자연 앞에서는 겸허해지고, 사랑 앞에서는 더 단단해지는 순간들이었다.


가스페 반도에 도착한 날, 우리는 그 바다를 한동안 바라보기만 했다. ‘아름답다’는 말로는 도저히 부족했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 위로 석양을 머금은 하늘이 더 넓어지는 듯했고, 그 풍경은 모든 설명을 거부하고 있었다.


다음 날, 남편과 함께 고등어 낚시를 하러 나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낚싯대 끝에 걸린 것은 커다란 랍스터 한 마리였다. 생전 처음 잡아본 랍스터에 우리는 아이처럼 기뻐했지만, 옆에 있던 현지 어부가 보존 규칙을 설명해 주었다. 우리는 그 말을 조용히 듣고, 망설임 없이 랍스터를 다시 바다로 돌려보냈다.


그 랍스터는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유유히 대서양으로 사라졌다. 이상하게도 아쉽기보다는 마음이 편안했다. 붙잡기보다 존중하는 선택이, 그 여행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머문 숙소는 대서양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있었다. 다음 날 아침, 햇살이 눈부신 마당의 피크닉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순간,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믿기 어려울 만큼 아름다웠다. 바다는 잔잔했고, 하늘은 투명할 정도로 파랬다. 우리는 또다시 말을 잃었다. 그 장면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하다. 마치 어제 본 풍경처럼.


지금 와서 가장 아쉬운 건, 그 아름다운 순간들을 사진으로 많이 남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길이 멀었고 여유도 부족했다. 우리는 그저 눈으로, 마음으로 담아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깨닫게 된다. 사진이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 기억을 더 따뜻하게 만든다는 것을. 사진은 시간이 지나면 색이 바래지만, 마음속에 남은 장면은 오히려 더 선명해지기도 한다. 그때의 바람과 햇살, 그리고 우리의 웃음이 지금도 내 안에서 조용히 살아 움직인다.


여행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약속했다.
10년 후, 다시 이곳에 오자.
그 약속은 지금도 내 마음속에서 숨을 쉬고 있다. 가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진다. 그 미소는 단순한 추억의 반응이 아니라, 그 시절의 우리를 다시 만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언젠가, 더 늦기 전에, 다시 한 번 그 바다 끝의 마법 같은 풍경을 만나러 가고 싶다. 그때의 우리는 지금과는 또 다른 모습일 테지만, 바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변하지 않는 풍경 앞에서, 변해온 우리를 다시 바라볼 수 있기를. 그 바람 하나만으로도, 그 여행은 지금도 내 삶의 가장 빛나는 장면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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