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언어 사이에서 나를 지키는 법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 시리즈 9 (3)

by 이민자의 부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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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마음속에 말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입을 열 수 없을 때가 있다.
전하고 싶은 감정은 분명한데, 그 마음을 옮길 단어가 보이지 않는다. 영어로는 어딘가 부족하고, 한국어로는 지나치게 무거운 말들. 그 사이에서 문장들은 흔들리다 끝내 사라진다.


이민을 와서 처음 마주한 낯설음 중 하나는 단연 ‘언어의 벽’이었다.
단어를 몰라서 멈칫했던 순간보다 더 힘들었던 건, 말을 알아도 마음이 전달되지 않던 시간들이었다.


I’m okay.
그 말 뒤에는 수많은 감정이 숨어 있었다. 사실은 전혀 괜찮지 않았던 날들이 그렇게 흘러갔다. 영어 문장은 내 상태를 설명했지만, 내 마음에는 닿지 않았다.


언어는 마음을 건너게 해주는 다리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단단한 벽이 되기도 한다. 나는 그 벽 앞에서 자주 멈췄다. 입안에서 맴돌던 말들은 결국 침묵으로 바뀌었고, 그 침묵은 내 감정을 더 깊은 곳으로 밀어 넣었다.


이민 초기, 슈퍼마켓 계산대 앞에서 직원이 “How are you?”라고 물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I’m fine, thank you.”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내가 한 말이 내 마음과 전혀 닿아 있지 않다는 것을 선명하게 느꼈다.


그 문장은 내가 선택한 말이 아니라, 이곳에서 요구되는 ‘정해진 문장’에 불과했다. 그때 깨달았다. 언어는 감정을 드러내는 도구이면서, 동시에 감정을 감싸 숨기는 껍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한국에서의 나는 말이 나보다 빨랐다. 생각하기도 전에 감정이 먼저 튀어나왔고, 그 말들은 사람들과 나를 자연스럽게 이어주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말이 늘 한 박자 늦다.
입을 열기 전, 여러 번 머릿속에서 문장을 다듬고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단어를 고르다 보면 감정의 온도는 어느새 식어버린다.


처음에는 그 느림이 답답했다. 왜 나는 이렇게 말하지 못할까, 왜 감정은 늘 마음속에만 머무를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알게 되었다. 이 느림이 단순한 부족함이 아니라, 나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만드는 시간이라는 것을.


말을 고르는 과정은 단순히 표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말이 정말 내가 전하고 싶은 감정에서 나온 것인지, 나는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그 질문을 반복하는 동안, 감정은 흘러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말은 줄어들었지만, 마음의 결은 더 선명해졌다.
침묵은 공백이 아니라, 내면을 정리하는 시간이 되었다.


이민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다른 언어를 익히는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의 나와 캐나다에서의 나는 같은 사람이지만, 서로 다른 세계를 살아가고 있었다. 두 언어 속에서 두 자아가 부딪히고, 서로를 이해하며 조금씩 새로운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나는 한국어로 생각하고 영어로 말하며,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법을 배웠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내 정체성은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자리를 잡아갔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말을 잘하려 애쓰는 대신, 감정을 먼저 이해하려고 했다. 언어를 익히는 사람이 아니라, 감정을 번역하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말이 막히는 순간은 실패가 아니라, 나 자신을 다시 만나는 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말하지 못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마음 깊은 곳으로 스며들어 단단해지고, 때로는 다른 형태로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글쓰기는 그렇게 쌓인 감정을 세상과 연결해주는 또 하나의 언어가 되었다.


20여 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도, 나는 여전히 두 언어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있다. 병원 접수대에서 증상을 설명할 때, 회의 자리에서 감정을 삼킬 때, 전화기 너머의 침묵 앞에서 나는 여전히 문장을 고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 벽 앞에서 겁내지 않는다.
말은 언제나 완벽할 수 없지만, 진심은 결국 전달된다는 것을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믿음이 내 하루를 조금 더 부드럽게 만든다.


언어가 감정을 가로막는 순간조차, 나는 내 언어로 살아간다.
그 언어는 문법보다 느리고, 단어보다 따뜻하다.
그리고 그 언어는, 낯선 곳에서도 나를 잃지 않게 해주는 가장 깊은 숨결이다.


말이 막히는 순간,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감정을 건너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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