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그림자, 캐나다의 빛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 시리즈 9 (4)

by 이민자의 부엌
Copilot_20260114_105546.png


눈 덮인 거리를 걷다 문득, 고향의 골목이 떠올랐다. 하얀 눈이 내려앉은 캐나다의 거리 한가운데서, 나는 오래된 시간 속의 나를 불러냈다. 지금의 풍경과 겹쳐진 과거는 여전히 선명했다. 이곳의 겨울은 조용하고 단단한데, 기억 속의 고향은 늘 사람과 고향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비좁은 골목을 따라 퍼지던 저녁 냄새, 부엌에서 은근히 올라오던 된장국 끓는 소리, 겨울이면 하얗게 서리 내리던 담벼락, 그 사이를 뛰어다니던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 기억들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설명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하는 감각으로 남아 있었다. 시간이 흘러도 그 온기와 냄새는 마음 한편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길을 걷다 스치는 작은 냄새 하나에도 그리움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움은 달콤하면서도 아픈 감정이다. 떠올리는 순간, 지금의 현실이 잠시 흐릿해지고 두 세계가 겹쳐 보인다. 나는 종종 그 경계 어딘가에 멈춰 선다. 한쪽으로 완전히 돌아가지도, 다른 한쪽에 완전히 서지도 못한 채.


캐나다의 겨울은 고향과 다르다. 차갑지만 맑고, 풍경은 고요하다. 햇살은 절제되어 있고, 나무들은 말없이 계절을 건너간다. 이곳에서 나는 새로운 기억을 쌓아왔다. 그러나 그 과정은 늘 단순하지 않았다. 고향의 기억은 희미해지기보다, 오히려 현재의 나를 더 자주 따라왔다.


이민 온 지 어느덧 20년이 넘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의 낯섦은 많이 옅어졌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완전히 익숙해진 것은 아니었다. 정착이라는 단어가 어색하지 않게 느껴진 이후에도, 나는 여전히 내 안에서 질문을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걸까.” 그 질문은 시간이 지나며 “나는 누구로 살아가고 있는 걸까”라는 물음으로 바뀌었다.


어느 날은 영어로 생각하다가 문득 한국어가 먼저 떠오르는 나를 발견했고, 또 어느 날은 한국에서라면 하지 않았을 선택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하고 있는 나를 보았다. 카페에서 주문을 하며 망설이지 않는 나, 이웃에게 먼저 말을 거는 나, 낯선 겨울을 준비하는 방식마저 이곳 사람을 닮아가는 나. 그럴 때마다 나는 안도와 낯섦을 동시에 느꼈다. 이곳에 익숙해질수록, 고향의 나와 멀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도 따라왔다.


나는 그 사이에서 자주 흔들렸다. 과거의 그림자와 현재의 빛 사이에서, 그리움과 현실 사이에서. 그 흔들림은 단순한 향수가 아니었다. 고향의 언어와 정서로는 지금의 나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었고, 이곳의 삶만으로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를 지울 수 없었다. 어느 쪽에서도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움은 때때로 나를 지치게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깨닫게 되었다. 그리움은 과거에 붙잡아두는 힘이 아니라, 현재를 더 선명하게 인식하게 만드는 힘이라는 것을. 고향을 떠올릴수록, 나는 이곳에서의 순간들을 더 주의 깊게 바라보게 되었다. 지금의 삶을 대충 흘려보내지 않게 만드는 감정, 그것이 그리움이었다.


가끔은 고향의 냄새가 그립다. 봄마다 피어나던 살구꽃 향기, 비 오는 날의 흙냄새, 시장 골목을 채우던 사람들의 웅성거림. 그 모든 감각은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있다. 동시에, 캐나다의 풍경도 나를 단단하게 만든다. 얼어붙은 강 위로 번지는 햇살, 눈밭 위에 남은 아이의 발자국, 겨울 하늘 아래 묵묵히 서 있는 나무들. 이곳의 풍경은 말없이 나를 지탱해준다.


이제 나는 두 세계를 비교하지 않는다. 대신 두 세계가 내 안에서 어떤 나를 만들어냈는지를 바라본다. 고향은 내 감정의 뿌리가 되었고, 캐나다는 내 삶의 방향이 되었다. 그 둘이 만나 지금의 내가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조금은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이민자로 산다는 것은 두 세계를 동시에 품고 살아가는 일이다. 한쪽은 기억으로, 한쪽은 현실로 존재하며, 그 사이에서 나는 나만의 속도로 나아간다. 그 길은 여전히 때로 외롭고, 때로는 벅차다. 아마 앞으로도 나는 흔들릴 것이다. 완전히 정리된 답을 갖게 되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오늘도 나는 눈 덮인 거리를 걷는다. 고향의 그림자와 캐나다의 빛이 동시에 나를 비춘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나는 비로소 알게 된다. 나는 돌아갈 곳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두 세계를 함께 살아내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이 깨달음이 언제까지 나를 지켜줄지는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충분하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천천히, 나의 길을 걷는다.






#이민자의일상 #고향그리움 #캐나다생활 #자아탐색 #두세계사이 #추억과현실 #겨울풍경 #성찰에세이 #감성글 #삶의발자취 #눈덮인거리 #이민자성장 #과거와현재 #낯선곳에서나를만나다 #브런치에세이

이전 03화두 언어 사이에서 나를 지키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