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 시리즈 9 (5)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나는 말보다 침묵에 더 익숙해져 있었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익숙하지 않은 언어와 억양이 연속처럼 이어졌고, 그 소리들은 나를 향하지 않은 채 곁을 지나갔다. 풍경은 분명 낯설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날의 장면은 또렷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 속에서 내가 조금 작아졌다는 감각만은 오래도록 몸에 남아 있었다.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고, 몸은 필요 이상으로 조심스러워졌다. 아무도 나를 알지 못했고, 나 역시 나를 어떻게 드러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존재는 분명했지만, 그 존재를 설명할 언어는 아직 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나서기보다 한 발 물러서는 쪽을 택했고, 말하기보다 관찰하는 사람이 되어갔다.
이민 초기의 나는 나 자신을 주장하기보다 먼저 주변의 흐름을 읽는 법부터 배웠다. 한국에서 자연스럽던 표정과 몸짓은 이곳에서는 잠시 멈춤이 필요했고, 익숙했던 나의 속도는 조용히 낮춰져야 했다. 그렇게 나는 늘 조금 뒤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상황을 이해한 뒤에야 움직이는 사람이 되었다.
사람들은 나를 ‘이민자’라고 불렀다. 짧고 단순한 단어였지만, 그 안에는 쉽게 설명되지 않는 무게가 담겨 있었다. 삶의 터전을 옮긴다는 것은 주소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를 다시 바라보게 되는 순간에 더 가까웠다. 이전의 나로는 설명되지 않는 상황들이 이어졌고, 나는 그때마다 나를 다시 정의해야 했다.
처음에는 버티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꽉 찼다. 영어를 꺼낼 때마다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낮아졌고, 내 이름이 낯선 억양으로 불릴 때면 존재의 가장자리가 흐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설명 없이 통하던 말들은 이곳에서 늘 한 문장 더 필요했고, 그 사이에서 나는 항상 한 박자 늦은 사람이 되었다.
시간이 흐르며 나는 조금씩 알게 되었다. 이민자의 삶은 무언가를 계속 잃어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비워진 자리에 다른 감각을 하나씩 들여놓는 과정이라는 것을. 사라진 것보다 새롭게 익혀야 할 것이 더 많았고, 그 축적이 나를 지금의 나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나는 늘 빨랐다. 계획을 세우고, 다음을 향해 나아가야 마음이 놓였다. 쉼은 잠깐 허락되는 보상이었고, 멈춤은 쉽게 선택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나는 달랐다. 특별히 의식하지 않아도 걸음은 자연스레 느려졌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간이 늘어났다. 창밖 나무에 스치는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들이 생기면서, 나는 비로소 나 자신과 같은 속도로 걷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민자로 산다는 것은 두 세계의 리듬을 동시에 듣는 일과 닮아 있다. 낯선 언어로 하루를 시작하고, 오래된 기억의 언어로 하루를 정리한다. 어느 한쪽에도 완전히 기대지 못한 채 그 사이 어딘가에 머물며, 나는 조금씩 나만의 균형을 찾아간다.
어떤 날은 새로운 문화의 속도에 숨이 차고, 어떤 날은 고향의 방식이 불쑥 떠올라 내 안의 오래된 감정을 건드린다. 그 사이를 오가며 혼란스러울 때도 있지만, 그 시간 속에서 내 마음은 서서히 하나의 결을 갖추어 간다.
나는 가끔 아주 작은 행동으로 나를 붙잡는다. 눈 덮인 길 위에 남은 발자국을 바라보고, 따뜻한 차 한 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이 사소한 순간들이 나를 지금에 머물게 하고, 그리움을 다시 살아갈 힘으로 바꾼다.
한국에서의 나는 익숙함 속에 있던 사람이었고, 이곳에서의 나는 늘 설명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 사이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무엇이 나에게 정말 중요한지, 어떤 방식으로 세상과 연결되고 싶은지.
두 개의 문화와 두 개의 언어 사이에서 나는 천천히 나만의 자리를 만들어간다.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기에, 오히려 나에게 맞는 방향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민자의 정체성은 완성형으로 도착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 나는 안다. 그 미완성의 상태로 살아가는 나를 굳이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오늘도 나는 서툴다. 여전히 낯설고, 때로는 흔들린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천천히 걸어간다. 미완성인 채로, 그러나 분명 나답게.
이 글은
낯선 땅에서 나 자신을 다시 배우던
어느 이민자의 느린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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