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 시리즈 9 (6)
20여 년을 이곳에 살아도 캐나다의 밤은 여전히 낯설다. 도시의 불빛이 은은하게 번지고, 창가 너머로 눈처럼 고요한 어둠이 내려앉는다. 그 속에서 나는 문득, 내가 얼마나 혼자인지 실감한다. 아이들은 모두 독립해 다른 나라로 떠나고, 남편마저 출장을 떠나면 집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적막이 벽처럼 내려앉는다. 처음에는 그 고요가 무서워 밤새 집안의 불을 모두 켜놓았다. 냉장고의 소음, 시계 초침, 내 숨소리만이 공간을 채웠고, 그 속에서 ‘혼자’라는 감정은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로 다가왔다.
이민이라는 단어에는 꿈과 희망만 담겨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이면에는 이렇게 짙은 외로움이 자리한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 부모님도 형제도, 친척도 친구도 없는 이 땅에서,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언어와 문화가 다르고, 익숙한 사회적 규범이 사라진 곳에서 내 존재감은 때때로 바람처럼 흔들렸다. 익숙함이 사라진 자리, 남은 것은 고요와 낯섦뿐이었다.
처음의 외로움은 너무 낯설었다. 부모님과 함께하던 식탁, 친구와 나누던 사소한 대화, 거리에서 들려오던 익숙한 언어의 울림이 한순간 사라지고, 그 자리에 차가운 공기가 스며들었다. 외로움은 마치 이민자의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붙었다. 길을 걷다 사람들의 빠른 대화를 따라가지 못할 때, 내가 알고 있던 세계가 멀어지는 느낌이 들 때, 그 그림자는 더욱 짙어졌다. 침묵 속에서 나는 나의 약함과 마주해야 했다.
한번은 서울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려다 망설인 적이 있다. 몇 마디조차 서툴고 어색한 내 목소리가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나를 알아가는 법은 이 불편함 속에 있다는 것. 그렇게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며, 그 안에서 스스로를 마주하는 법을 배워갔다. 손끝으로 차가워진 컵을 감싸며 창밖의 눈 덮인 거리를 바라보는 그 순간마다, 나는 조금씩 단단해졌다.
처음에는 버거웠던 그 고요 속에서 나는 내면의 중심을 찾는 연습을 시작했다. 외로움은 때로 잔인했지만, 동시에 성장의 다른 이름이었다. 누구도 대신 걸어줄 수 없는 길 위에서 나는 나를 다독이고, 스스로를 세웠다. 언어와 문화, 익숙함과 낯섦 사이에서 나는 조금씩 나만의 균형을 찾아갔다.
시간이 지나며 알았다. 이 고요함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혼자 있는 시간은 나를 더 깊이 들여다보게 했다.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고 버티는 힘,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 온기—그 모든 것을 나는 이 침묵 속에서 조금씩 배워갔다. 외로움은 나를 비워내는 동시에 채워주는 감정이었다. 비워진 것은 익숙함이었고, 채워진 것은 새로운 나였다.
이민자의 삶에서, 한국적 자아와 캐나다적 자아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은 매일의 작은 실천으로 이어졌다. 단순히 집 안에 혼자인 시간을 견디는 것을 넘어, 새로운 언어와 문화 속에서 내 존재를 확인하고, 내 마음을 다스리는 연습이었다. 길을 걷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창밖의 눈 쌓인 거리를 바라보는 순간마다 나는 작은 결단과 마주했다.
혼자 있는 시간 속에서는 나 자신과 마주하는 기회가 늘어난다. 작은 습관과 루틴, 독서와 기록, 눈길 위의 발자국까지도 내 마음과 연결된다. 이 시간은 내 안의 내적 성장을 위해 존재한다. 남편이 출장을 가도 이제는 집안의 모든 불을 켜놓지 않는다. 차분히 고요를 받아들이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오늘 하루, 잘 견뎌냈니?” 이 작은 질문이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된다.
가끔 창밖으로 눈 덮인 거리를 걷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 모습 속에서 나도 함께 걷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배운다. 고요함, 혼자만의 시간, 작은 실천—그 모든 것이 나를 성장시키는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이민자의 삶은 늘 ‘함께’와 ‘홀로’ 사이를 오가지만, 이제 나는 그 안에서 나 자신과 대화하며 균형을 잡는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혼자라는 감정은 나를 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중심을 단단하게 세워주는 힘이다. 우리 아이들이 낯선 학교, 낯선 직장에서 버티고 견딘 것처럼, 결국 누구나 각자의 자리에서 이민이라는 벽을 스스로 버티고 넘어가야 한다. 외로움은 여전히 나를 찾아오지만, 그때마다 나는 속삭인다. “이 시간 또한 나를 만드는 과정이다.”
오늘 밤도 고요가 내려앉는다. 이제 그 고요는 낯설지 않다. 그 안에서 나는 나 자신과 대화하고, 어제보다 조금 더 단단해진 마음을 느낀다. 감정의 무게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무게를 견디는 힘 또한 이곳에서의 삶이 내게 선물한 성장이다. 오늘도 나는 그 무게를 품고, 조용히, 흔들림 없이 나의 길을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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