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함 속에서 다시 태어난 나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 시리즈 9 (2)

by 이민자의 부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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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땅을 처음 밟았던 날, 나는 말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낯선 공기, 낯선 언어, 낯선 시선 속에서 나는 내 존재를 천천히 감싸 안았다. 한국에서 늘 활발하다는 말을 듣던 내가, 이곳에서는 ‘조용한 사람’으로 불린다는 사실은 처음엔 생소하고 낯설었다.


어느 날 누군가 내게 말했다. “넌 참 조용하구나.” 그 말은 내가 알고 있던 나와 달랐다. 한국에서의 나는 언제나 웃음을 먼저 건네고, 분위기를 풀어내는 데 주저함이 없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민 초기에 나는, 말하고 싶은 문장이 머릿속에서 수없이 맴돌다가도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사라지고 말았다. 단어를 고르는 사이 대화는 이미 다음 장으로 넘어갔고, 나는 늘 한 박자 늦은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미소로 답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대신했다.


시간이 쌓이면서 사람들은 나를 ‘조용한 사람’으로 기억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시선 속에서 나는 점점 낯설어졌다. 거울 속 얼굴은 분명 나인데, 세상은 자꾸 다른 이름으로 나를 불렀다. 같은 사람인데, 나라가 바뀌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언어와 문화가 달라 내 성격과 존재감까지 달라지는 듯해 서글퍼질 때도 많았다. 그럴 때면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이민 생활 초반의 조용함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에 가까웠다. 말하지 않으면 실수하지 않을 수 있었고, 조용히 있으면 틀릴 일도 줄었다. 하지만 그 조용함은 때로 나를 지켜주었고, 때로는 나를 지워버리기도 했다. 하고 싶은 말을 삼킨 채 지나간 회의, 설명하지 못해 놓쳐버린 기회들. 조용함은 언제나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조금씩 다른 것을 보기 시작했다. 캐나다에서의 삶이 10년을 넘기고, 어느덧 20년에 가까워지면서 깨달았다. 내 성격이 변한 것이 아니라, 환경 속에서 드러나는 ‘모습’이 달라졌을 뿐이라는 것을. 나는 여전히 나였고, 다만 이곳에서는 말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나를 표현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짧은 인사 속의 따뜻한 눈빛, 함께 앉아 있는 침묵 속의 편안함. 누군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태도, 서두르지 않고 반응하는 여유. 조용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나만의 리듬이 있었다. 한국에서의 활발함과는 다른 결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덜 진실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조용하다’는 말이 더 이상 아프게 들리지 않았다. 그 말 속에는 사려 깊음과 배려, 그리고 쉽게 드러나지 않는 깊이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활발한 나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조용한 얼굴을 한 채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낯선 시선 속에서 나는 하나를 배웠다. 타인의 평가가 나를 규정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보는 나와 내가 아는 나는 다를 수 있지만, 그 차이가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 틈 사이에서 나는 처음 맞닥뜨렸던 높은 낭떠지 위에서 평온하게 날고 있는 새로운 나를 발견했다.


이민 생활은 늘 ‘적응’이라는 긴 여정이다. 처음엔 외로움이 따라붙고, 때로는 ‘나는 왜 이렇게 변했을까’ 하는 자책이 고개를 든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은 결국 나를 단단하게 만든다. 나는 여전히 나로 존재하며, 그 안에서 조금씩 더 깊고 유연해진다.


예전처럼 말로 먼저 다가가는 사람이 아니라, 상대의 표정과 숨결을 먼저 읽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조용히 듣고, 천천히 반응하며, 마음속에서 한 번 더 생각한 뒤 말을 꺼낸다. 말이 줄어든 만큼, 나는 사회복지사로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게 되었다. 사람의 마음은 말보다 먼저 표정에서 드러나고, 상처는 침묵 속에서 더 크게 울린다는 것을 배웠다.


조용함은 나를 숨기기 위한 방패가 아니라, 세상을 더 섬세하게 바라보기 위한 하나의 창이 되었다. 그 창을 통해 나는 이민자로서의 나, 아내로서의 나, 엄마로서의 나, 그리고 낯선 땅에서 여전히 만들어지고 있는 나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누군가 내게 “넌 참 조용하구나” 라고 말하면, 나는 속으로 조용히 미소 짓는다. 그 말이 더 이상 나를 설명하는 전부가 아니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나만의 시간과 선택, 그리고 지나온 여정이 담겨 있다.


조용함 속에서도 나는 살아 숨 쉬고 있다. 말이 아닌 눈빛으로, 미소로, 하루의 작은 선택들로 나는 오늘도 나를 표현한다. 낯선 곳에서 나를 잃지 않는 법을 배우며 나는 조금씩 더 단단해지고 있다.


그리움과 혼란, 침묵과 웃음 속에서 나는 매일 나를 다시 만난다. 그리고 그 만남이 오늘의 나를 더 깊고 온전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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