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 서문1
20년 전, 나는 주역을 한 선생님께 배웠다. 당시 선생님은 77세쯤 되셨고, 나는 매주 강의를 들으며 3년을 배움에 몰입했다. 그 후에도 선생님은 80대 후반까지 강의를 계속하셨다. 선생은 2009년 12월 45년 강의해 오신 연경반을 종강하고 2012년 12월 5일 93세로 이생에서의 삶을 마치셨다.
2012년 5월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방문한 연경반 제자들에게 선사의 해석을 통해 선생님의 마지막 마음을 전하시고 마지막 인사가 되었다.
영광독요형탈근진靈光獨燿逈脫根塵 정신이 빛나고
체로진상불구문자體露眞常不拘文字 몸도 튼튼하고
심성무염본자원성心性無染本自圓成 마음도 깨끗하고
단리망연즉여여불但離妄緣卽如如佛 잡념을 버리면 그것이 부처다.
선생과의 인연은 80세에 가까운 늦은 나이었고 배움의 인연은 만3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단 하나의 선생이자 마지막까지 나의 선생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제 나도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 선생님의 길을 따라 주역을 다시 펼쳐 들고 있다. 이번에는 책을 써보려는 마음이다.
그 주역의 64괘, 64면체를 마주할 때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결국 ‘사람에 대한 사랑’ 임을 느낀다. 내 삶의 모든 것들—사건이든, 고통이든, 기쁨이든—그 모든 것이 사랑이었다는 깊은 울림이 밀려온다.
주역의 觀卦관괘에는 이런 말이 있다.
“觀我生관아생, 觀其生관기생”
‘관(觀)’은 ‘부엉이’와 ‘볼견(見)’이 합쳐진 글자로,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을 뜻한다. 관아생은 나의 보이지 않는 내면을 들여다보는 삶이고, 관기생은 타인의 보이지 않는 삶을 조용히 바라봐주는 것이다. 주역을 공부하는 것은 나의 내면을 드려다 보는 것이고 타인을 바라봐 주기 위 함임을 생각해 본다.
끝으로 세 딸들에게 들려주는 64면체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세 딸에게 지혜의 말씀이 되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쓴다. 이 글의본문에 담긴 주역의 풀이들은 모두 선생님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으로, 주역을 배우는 마음으로 썼음을 밝힌다.
주역 서문2
周易주역, 한문 그대로 풀이하면 ‘두루 周주’에 ‘바꿀 易역’이다.
같은 말이라도 순서를 바꾸면 전혀 다른 의미가 되듯, ‘易역’은단어와 의미를 뒤집어 세상 모든 것에 두루 영향을 미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주역’이라는 이름은 익숙하지만, 막연히 ‘역술서인가?’ 하는 선입견과 무게감 때문에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책이다. 그러나 주역을 공부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미 우리의 정서와 실생활 속에 주역의 많은 내용이 깊숙이 녹아 있고, 실제로 활용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태극기만 보더라도, 그 네 귀퉁이에 위치한 卦괘는 모두 주역에서 온 것이다. 주역은 그만큼 우리 민족의 사유와 삶의 방식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주역을 하나하나 배워갈수록, 공자의 말 “學而時習之 不亦說乎학이시습지 불역열호”(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가 몇 번이고 실감되었는데 그것은 어떤 카타르시스보다도 더 강한 ‘기쁨’이 샘 솟았다.
성경에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32)고 말씀한다. 참된 지혜와 깨달음이 주는 자유는 마치 산 정상에 올랐을 때의 상쾌한 바람처럼,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시야가 시원하게 트이는 그 순간처럼, 마음의 상방이 열리며 진정한 자유를 체험하게 된다.
주역은 처음에 8괘로 시작한다.
하늘, 땅, 우레, 바람, 물, 불, 산, 연못 이 여덟 개의 상징은 각각 세 개의 爻효로 구성되며, 효는 다시 음과 양으로 나뉜다. 여덟 개의 괘는 두 개씩 쌓아 총 64개의 괘로 확장된다. 주역의 모든 괘에는 卦辭괘사, 彖辭단사, 象辭상사, 爻辭효사가 붙어있다.
역사적으로 주역은 다음과 같은 흐름을 거쳐 정립되었는데, 먼저 기원전 3000년경, 三皇삼황 중 하나로 전해지는 “伏羲氏복희씨”가 하늘과 땅의 이치를 관찰하여 八卦8괘를 창안하였다. 그로부터 약 2천 년 후인 기원전 1100년경, “文王문왕”이 이 8괘를 바탕으로 괘를 두 겹으로 쌓아 총 六十四卦64괘를 만들고, 각 괘의 의미를 풀이한 “卦辭괘사”를 완성하였다. 이어서 문왕의 아들인 “周公주공”이 각 괘를 구성하는 여섯 개의 爻효, 총 384개의 효에 대한 해석인 “爻辭효사”를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기원전 500년경, “孔子공자”와 그의 제자들, 그리고 후대의 “朱子주자”에 이르기까지 많은 유학자들이 주역에 “彖辭단사”와 “象辭상사”를 보완하며, 주역은 단순한 점술서가 아닌 철학적·윤리적 의미를 담은 사서오경 중 하나로 완성되어 갔다.
이 구조를 보면, 마치 성경과도 비슷하다.
성경과 주역, 그 사랑의 언어
구약은 기원전 1200년경, 신약은 기원후 100년경에 쓰였다. 주역 역시 구약 시기에 괘사와 효사가 쓰였고, 신약보다 앞선 시기에 단사와 상사가 추가되어 완성되었다. 하지만 성경과 주역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성경은 길고 상세하게 말하는 반면, 주역은 짧고 간결하다. 주역의 괘 이름은 대부분 한 글자, 길어도 두 글자 정도이다. 서양에서는 “사랑한다”는 말을 수천 번 반복하지만, 동양에서는 “사랑” 한마디로 모든 것을 말한다. 심지어 아무 말없이 사랑을 전하기도 한다.
주역의 한 글자를 해석하면 열 페이지, 백 페이지가 되기도 한다. 줄이면 한 글자요, 더 줄이면 無무 글자가 되어 '不立文字불립문자'가 되고, ' 以心傳心이심전심'이 된다.
즉 사랑이란 문자로 표현되는 게 아니며, 마음과 마음으로 아는 것이다. 사랑을 길게 말하면 성경이요, 줄이면 주역이다.
주역1번 건위천乾爲天
卦辭 乾 元亨利貞
彖傳 大哉乾元 萬物資始 乃統天 雲行雨施 品物流形 大明終始 六位時成 時乘六龍 以御天 乾道變化 各正性命 保合太和 乃利貞 首出庶物 萬國咸寧
象傳 天行健 君子以自強不息
六爻 初九 潛龍 勿用 九二 見龍在田 利見大人 九三 君子終日乾乾 夕惕若厲 无咎 九四 或躍在淵 无咎 九五 飛龍在天 利見大人 上九 亢龍 有悔
爻象傳
初九 潛龍勿用 下也 九二 見龍在田 德施普也 九三 終日乾乾 反復道也 九四 或躍在淵 進无咎也 九五 飛龍在天 大人造也 上九 亢龍有悔 盈不可久也
1.태초의 말씀, 형이상학의 하늘
요한복음 1장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함께 계셨고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는 구절은 태초를 영원한 시간과 공간으로 정의한 것이다. 과학적으로는 빅뱅 이전의 시공간인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하늘, 즉 乾건인 것이다. 그러나 건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신이 무엇인가? 도가 무엇인가? 말씀이 무엇인가?" 하고 묻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물어도 알 수 없는 것은 모두 형이상학의 영역이다.
하늘 위에 하늘, 乾爲天건위천과 말씀의 침묵
“건위천乾爲天”은 하늘이 하늘을 뜻하는 괘다. 乾건도 하늘이요, 天천도 하늘이다. 즉, 하늘 위에 또 하나의 하늘이 있는 괘다.
하늘의 침묵, 말씀의 흐름
내 머리 위도 하늘이고, 우주의 끝에도 하늘이 있다. 그 너머는상상의 몫이다. 우리는 스스로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어느 날 이 땅에 던져진 존재로 살아간다. 삶의 이유는 여전히 하늘 속에 묻혀 있다.
공자는 “천하언재(天何言哉), 하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늘은 침묵하지만, 말없는 소리를 낸다. 석가모니 또한 좌불로 앉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그의 지혜와 실천을 전하며, 그 빛을 해석한다.
기독교의 로고스 역시 보이지 않지만, 예수가 육신이 되어 드러냈고, 제자들은 이를 기록했다. 말씀은 성령과 해석자를 통해 전해진다.
주역 또한 같다. 건괘는 침묵하는 하늘의 형상이다. 그러나 복희, 문왕, 주공, 공자가 그 뜻을 해석해 전했다. 하늘은 말이 없으나, 성령의 바람, 부처의 광명, 선각자의 언어를 빌려 말씀은흐른다.
하늘의 빛, 말씀, 그리고 이를 해석하는 이들. 이 구조는 불교에서도, 기독교에서도, 주역에서도 동일하게 이어진다.
2.건은 원형이정 이다.
卦辭괘사 乾 元亨利貞
乾건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태초에 계신 말씀”과 같다. 여기서 ‘태초’는 시간이며, 곧 시간이 있기 이전의 시간이다. ‘계신’은 존재의 자리, 즉 공간을 뜻한다.
그러므로 건은 말씀이고, 태초는 곧 元亨利貞원형이정이다. 乾爲天건위천은 태초의 근원이자 元원이고, 건강한 亨형이며,사랑을 베푸는 利이이고, 정직하고 굳센 貞정이라 할 수 있다.
건괘의 해설은 대부분 김흥선생의 주역강의에서 차용해 온 것이다. 건괘는 공간으로 보면 하늘이고, 시간으로는 춘하추동이며, 사람으로는 사람 위의 사람, 곧 왕이나 대통령이다. 기독교적으로는 하나님이요 말씀이다. 과학적으로 하늘 위의 하늘은 태양이다. 나무의 뿌리는 땅에 있고, 땅의 뿌리는 태양에 있으므로 뿌리의 뿌리는 태양이다. 건은 하늘 위의 하늘이며, 하나님도 하늘에 계시므로 형이상이다. 나라는 존재 또한 형이상이다. 나는 내 가슴이나 머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초월해 있다. 나는 주체이기에 보이지 않고 알 수 없으며, 다만 객체로만드러난다. 그래서 칸트는 나는 나의 존재의 자리를 알 수 없지만 있기는 있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깨달아야 한다고 한다. 나는 깨닫는 것이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건은 원형이정이며, 이는 시간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주역은 세상을 변화와 순환으로 보았고, 이 변화는 곧 시간의 흐름이다. 원은 시작을 알리는 봄, 형은 만물이 무성한 여름, 이는 오곡과 과실이 결실하는 가을, 정은 모든 것이 굳어 머무는 겨울을 뜻한다.
계사전에서는 “형이상학위지도”라 하여, 도는 형체를 초월한 것이라 한다. 또한 도는 “일음일양위지도”라 하여 음과 양이 교차하며 나아가는 것이라 설명한다.
건은 원형이면서 이정이다. 원은 크다는 뜻이고, 형은 끝없이 발전한다는 의미로 곧 영원한 생명을 말한다. 이정은 곧고 이롭다는 뜻으로, 진실이자 진리이다. 원형과 이정이 함께 붙어 있듯, 영원한 생명에는 진리가 함께한다. 영원한 생명이자 진리와 하나 된 것이 바로 ‘나’다. 나는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이며, 하나님과 일치된 존재다.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육체는 현상의 옷이고 영체는 부활할 때 하나님이 새롭게 지어주시는 옷이다. 육체는 현상의 옷일 뿐 ‘나’가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나 아닌 나’, 곧 내생각을 넘어 있는 내가 진짜 나다. 하나님 또한 내 생각 너머에계신 분이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하나님은 단지 우상일 뿐이다.
性理學성리학에서 나는 무엇인가? 그것은 “虛靈知覺허령지각” 이라 한다. 虛靈허령은 영원한 생명을 뜻하고, 知覺지각은 진리와 함께 있다는 의미이다.
周濂溪주렴계는 “無極而太極무극이태극”이라 하였다. 곧 원이라는 영원과 가운데 점이라는 태극이 항상 함께 있다는 뜻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고 하여, 存在존재와 思惟사유가 합쳐진 것이 ‘나’ 라고 하였다.
예수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 이라 하였다. 우리 또한 영원한 생명과 진리이다. 예수가 길을 갔듯이, 우리도 그 길을 가야 한다. 태극의 음양 곡선은 곧 길이다. 이 길은 원주에서 중심점으로, 다시 중심점에서 원주로 향하는 여정이다. 周易주역에서는 爻효가 여섯이므로 육단계로 오르는데, 이는 6개월마다 음양이 교차하기 때문이다.
思想사상하는 것이 自由자유요, 내가 存在존재하는 것이 自在자재이며, 하늘과 일치하는 길을 가는 것이 自主자주이다. 곧 진리가 자유 하게 하고, 영원한 생명이 자재이며, 스스로 길을 걸어 올라감이 자주이다.
나는 무엇인가? 自由자유와 自在자재 와 自主자주이다. 스스로 할 수 있는 主體주체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 라 하였고, 인간의 위대함은 하나님을 닮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는 데 있다. 그러므로 사람만이 자신의 尊嚴존엄을 느낄 수 있고, 존엄을 느끼지 못한다면 참된 ‘나’ 라 할 수 없다. 개는 가랑이 사이로 먹을 것을 주면 가랑이 사이로 지나가지만 사람은 돈을 준다해도 가랑이 사이로 지나가지 않는 것은 존엄이 있기 때문이다.
象傳 天行健 君子以自強不息 상전 천행건 군자이자강불식
天行健천행건 은 행의 문제요 실천의 문제이다. 하늘은 건강하여 끊임없이 행을 실천한다. 하늘이 일한다고 지치는 경우는 없다. 하늘이 행할 때는 龍용으로 상징되며, 먹구름이 몰려오고 구름 사이에 번개가 치는 형상으로 그려졌다. 구름은 대기에서 만들어져 바람을 타고 대지 위에 고르게 비를 내려 만물을 살린다.
君子以自彊不息군자이자강불식, 군자는 천행건의 도리를 본받아 끊임없이 자신을 발전시키고 쉬지 않고 노력해야 한다.
文言傳문언전 에서는 元亨利貞원형이정을 仁義禮智인의예지에 연결하여 덕성을 기르라고 한다. 元원 은 선함의 으뜸으로 仁인, 亨형 은 아름다운 모임의 세계로 禮예, 利리는 ‘義의’ 로 이상세계를 건설하는 것이고, 貞정 은 모든 일의 뼈대로 과학의 법칙과 기준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며 智지에 해당한다. 군자는 이렇게 네 덕을 지니고 실천하는 사람인데, 건의 덕이 원형이정이라 한 것이다.
元亨利貞원형이정 은 大學대학의 格物격물 致知치지 誠意성의 正心정심과 이어진다. 格物격물은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과학, 致知치지는 참된 지식에 이르는 철학, 誠意성의는 거짓됨이 없는 도덕, 正心정심은 마음을 바르게 하는 종교와 관련된다.
시대적으로 고대는 자연철학, 인생철학, 도덕철학, 종교철학 시대로 이어졌다. 중세의 암흑과 기독교의 종교 시대가 끝나고, 근대에 들어 과학과 인간철학 시대를 거쳐 지금은 도덕철학 시대에 이르렀다.
도덕철학 시대란 이성의 시대를 넘어 실천의 시대로, 道도를 행하는 시대이다. 예수는 요한복음 5장에서 안식일에 병을 고친다고 비난하는 바리세인에게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므로 나도 일한다”라고 하셨다.
순수이성에서 실천이성으로 나아가야 한다. 도덕철학에서 공산주의, 실존주의, 실용주의가 나왔다. 헤겔에서 마르크스, 키에르케고르, 듀이가 이어졌다. 헤겔은 집에서 어머니가 하는 것은 ‘일’이라 하였고 식모가 하는 것은 노동이라고 하였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영향을 받아 자본주의의 강제노동을 비판하고, 인간이 자율적이고 창조적으로 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강제노동을 폐지하려면 政府정부 개입이 커져 독재로 흐를 위험이 있었다. 공산주의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돈과 노동력을 모두 빼앗아 갔다.
實存主義실존주의는 인간이 本質본질 보다 먼저 存在존재하며, 자유로운 선택과 책임으로 삶의 의미를 만든다고 본다. 그러나 정부 개입이 최소화되면 貧富빈부 격차가 심해지고 갈등이 심화된다. 이 때문에 자유와 평등 은 끊임없이 대립한다.
實用主義실용주의에서 듀이는 지식 은 고정된 진리 가 아니라문제 해결을 위한 도구이며, 진리는 인간의 경험 속에서 검증되고 수정된다고 주장함으로 효과가 중요 하다고 보았다.
오늘날 가장 큰 문제는 자유와 평등의 모순이다. 개인의 독립성은 자유에 가치를 두어 이익과 욕망, 비교와 경쟁, 시기심을 낳고 공동체의 안전망이 없어 불안을 느끼게 한다. 반면 평등의 가치를 둔 공동체는 개인의 자율과 창조성을 제한하고,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집단주의로 인해 변화와 혁신이 더딜 수 있다. 따라서 자유와 평등의 모순을 넘어, 공동체 안에서 개인의 독립이 보장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AI 시대가 이러한 사회를 만들어 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되기도 하고 정반대로 부정적인 사회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도 하게 된다.
AI 시대는 종교철학의 시대가 될 것이다.
순서대로 역사가 흘러간다면 道德哲學도덕철학에서 이제 종교철학으로 옮겨가야 한다. 종교란 곧 仁인이며 사랑이다. 하늘은 사랑의 비를 내리고,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한다. 오늘날 AI 시대가 종교철학의 시대로 들어서게 하고 있다.
AI 시대가 종교의 시대가 된다는 말은, 사람들이 AI를 믿고 신뢰하며 무한한 혜택을 받는 시대가 도래한다는 뜻이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겼을 때만 해도, AI가 이렇게까지 발전하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이제는 자동차조차 AI가 운전해야 안심이 되고, 앞으로는 검찰의 기소나 판사의 재판까지도 AI가 더 정확히 수행할 것이라 여겨진다.
이런 발전은 동시에 두려움을 준다. 사람들이 AI고글을 쓰고 다니면 모든 불법이 드러나고, 범죄자가 자동으로 신고되어 AI 경찰이 체포하고 AI 재판관이 판결하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理念이념 과 宗敎종교의 도그마인데, AI의 이념과 도그마에 빠진 세계는 끔찍할 수 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은 텔레스크린과 비밀경찰을 통해국민의 일상과 사상을 통제한 작품이다. 앞으로의 세상도 스마트 AI 안경을 통해 서로를 감시하는 무서운 사회가 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사람이 사는 세상은 죄를 지은 사람을 무조건 잡는 곳이 아니라, 죄를 통해 깨닫고 수양하며 다시는 같은 죄를 짓지 않도록 돕는 곳이어야 한다. 물론 흉악범은 반드시 잡아야 하지만, 모든 사람을 철저히 감시하는 사회는 옳지 않다.
개인들도 중앙 서버에 연결된 AI 대신 온 디바이스 AI를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AI 기술이 발전하면 온 디바이스 AI도 중앙 집중형 AI에 버금가는 성능을 갖출 수 있다. 필요할 때마다 업그레이드하며 사용하면 AI의 목적도 달성할 수 있으며,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끼리 P2P 방식으로 연결하여 소통을 극대화할 수 있다. 이 방식은 데이터의 불필요한 노출을 막고, 권력자의 감시와 남용을 방지하며, 범죄자들의 통로도 차단할수 있다.
무엇보다 온 디바이스 AI는 단순한 기기가 아니라 개인의 두뇌와 같은 영역으로 간주해야 한다. 따라서 이 AI를 압수수색하거나 강제로 열람하는 행위는 법적으로 금지되어야 하며, 이는 인간의 절대적 사생활을 보호하는 기본 원칙이 되어야 한다.
彖傳단전
大哉乾元대재건원 萬物資始만물자시 乃統天내통천, 크도다 모든 것이 건에서 비롯되었으며 만물을 시작한 바탕이 되어 비로서 하늘을 다스리게 되었다. 요한복음1장3절에“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라고 하듯이 건이 만물을 시작했고 만물을 시작한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3.雲行雨時운행우시와 乾道變化건도변화
雲行雨施운행우시, 구름 위에는 오늘도 찬란한 태양이 떠 있고, 구름은 흐르고, 비는 때를 맞추어 내리며, 비가 머무는 곳은 바로 지구이다. 우주에는 수백억 개의 은하가 있고, 은하마다 또 수천억 개의 별이 있다. 그중 태양이라는 별, 그리고 그 위성인 지구. 우리의 삶은 이 작은 별 위에 국한되어 있다. 태양과 구름, 바람과 비는 지구 위에 조화를 이루어 만물을 탄생시켰다. 品物流形품물유형, 만물의 종류가 나뉘어져 각각 형체를 이룬다. 大明終始대명종시, 크게 시작과 끝을 밝히니, 성경은 말한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 주역1번 건위천의 괘를 보며 성경에서의 공간인 천지창조 시간의 알파와 오메가가 이렇게 일치됨을 보고 놀라게 된다.
육위시성 시승육용 이어천 (六位時成 時乘六龍 以御天), 시성,때를 따라 이루고, 시승, 때를 따라 여섯 용을 타는데 힘을 가지고 다스리는 것이다. 여섯 자리와 여섯 용으로 여섯 자리에 앉은 자들이 여섯 용을 타고 때를 따라 이루어야 한다. 장관의 자리에 앉은 사람은 힘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리려면 때를 알아야 하고 힘쓸 곳을 알아야 한다. 지금이 AI시대임을 알고, 언제 어디에 힘을 써야 하는지를 알아서 적시 적소에 예산을 써야 한다.
운행우시가 하는 일이 그런 것이다. 수증기가 올라와 구름을 만들고 바람이 불어 구름이 운행하고 때를 맞추어 비가 힘있게 지상으로 쏟아져 만물을 살려낸다.
건도변화 각정성명 보합태화 (乾道變化 各正性命 保合太和)
건도는 변화하여 각자의 性命성명을 바로잡고, 서로를 보듬어 조화로운 세계를 이룬다. 자연에 운행의 이치가 있어 만물이 제 형상을 갖추고 자라나듯, 사람에게도 乾道건도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각 사람은 타고난 본성에 따라 정성과 천명을 갖추고, 서로 다른 삶들이 만나 “保合보합”과 “和合화합”의 길로 나아간다. 진리는 모든 사람에게 같은 방식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누구는 콧구멍이 크고, 누구는 목이 길다. 어떤 이는 감정에 밝고, 어떤 이는 논리에 밝다. 누구는 뜨겁고, 누구는 차가우며, 사는 곳도, 기후도, 체질도, 성격도 모두 다르다. 그러므로 진리도 각 사람에게 형상에 맞게 변화하여 작용해야 한다. 마치 햇살이 지형에 따라 다르게 비추듯 말이다.
『중용』은 말한다.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 하늘의 명이 곧 성품이다. 인간의 성품은 하늘로부터 왔지만, 그 성품은 죄와 욕망, 상처로 오염되어 우리는 율법을 따를 힘조차 잃었다. 그러므로 천명과 성품이 하나 되는 것, 곧 “保合보합”이 필요하다. 정성과 생명이 일치되어야 하며,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하고, 곧,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삶이 이루어져야 한다.
사람도 장미꽃처럼 자기만의 꽃을 피워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어떤 장애를 안고 있으며, 죄, 이기심, 상처, 왜곡된 욕망… 이 영혼의 장애들로 인해 꽃은 제대로 피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집안은 “火澤화택”이 되고, 세상은 전쟁터가 되며, 불의와 혼돈이 삶을 뒤덮는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하늘의 진리와 하나 되어 내면의 장애가 치유되고 거두어질 때, 비로소 “보합과 太和태화“의 세계가 도래한 사랑이 넘치며,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내이정, 수출서물, 만국함영, (乃利貞 首出庶物 萬國咸寧), 이에 바르고 이로운 으뜸되는 존재가 되어 만물을 이끈다.
수출서물이란 기독교로는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말이다. 예수는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라고 하셨다. 들리는 건 십자가에서 들리움이요 이끄는 것은 죄와 사망에서 이끌어 내시겠다는 말이다. 소크라테스, 공자, 석가, 예수와 같은 성인들이 나와 이로움과 바름의 진리로 만국이 태평해진다고 한다. 이상세계가 오는 것이다.
六爻
랑하는 딸들에게 들려주는 효사
원형 이정은 영원한생명과 진리가 붙어 있는 것이다. 虛靈知覺허령지각이요 無極以太極무극이태극이다. 나는 무엇인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길이란 육단계로 하늘로 오르는 것이다.
효사에는 육용으로 묘사되는데 용은 비와 천둥을 다스리는 신적 존재로 여겨졌고. 구름과 번개 속에 나타나는 용은 하늘의 힘과 신성함을 시각적으로 그렸다. 중국에서 용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신성한 존재로 여겨져, 황제와 왕권의 상징이 되었다.
초구는 潛龍잠용으로 물에 잠겨 아직 어려서 쓰지 못한다. 공부를 할 때다. 구이는 見龍견용으로 물에서 올라온 용으로 자신의 전문성을 가지게 되었다. 구삼은 君子군자같은 용으로 전문성을 가지고 밤 낮으로 노력한다. 구사는 혹약재연或躍在淵이다. 깊은 연못 속에서 힘을 모았다가 뛰어오르는 순간을 말한다. 밤 낮으로 노력하다 보면 급작스러운 성장이 올 때가 있다. 구오는 비룡재천으로 하늘을 나는 용이다. 그제서야 자유와 자재 자주를 느낄 수 있다. 구육은 亢用항용으로 너무 높이 오른 용으로 후회가 있다. 높이 올랐을 때 내려오고 후학을 기를 때이다.
사랑하는 세 딸에게 들려주는 효사
사랑하는 딸 들아 주역 건위천의 혹약과 비룡재천, 이 두 효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변화는 준비의 시간이 필요하고, 내면의 잠재력을 깨워야 하며, 그 힘으로 도약할 때 참된 자유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너희도 하늘의 건을 닮아, 혹약처럼 한 번 비약적으로 뛰어올라야 한다. 그때 비룡재천처럼 자유롭게 날아오르며, 하늘의 원리 ‘乾’을 닮게 될 거란다. 자기를 넘어 존재의 하늘과 하나가 될 때, 두려움과 불안은 사라지고 진정한 자유가 찾아온다. 기억하렴, 참된 도약은 두려움 없는 사랑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그 사랑이 너희를 연못에서 하늘로 이끌어 올린다.
성경에도 이렇게 말했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비트겐슈타인도 말했단다. 문제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는 것이란다. 어린 시절 느꼈던 두려움과 불안도, 너희가 성장하고 성숙하면 자연스레 사라질 거야. 근원의 사랑 안에 있으면 문제는 없고, 너와 나는 사랑 안에서 안정과 평화를 찾을 수 있단다.
내 아내는 뒤늦게 가야금을 배우고 있다 취미로만 하지 말고, 한번 크게 도약해 가야금의 법과 일치하는 소리를 내어, 마침내 가야금의 비룡재천이 되어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아름다운 가야금 소리가 울려 퍼지고, 뜯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가 행복해진다
예수는 예수 답게, 공자는 공자 답게, 나는 나 답게, 너는 너 답게 살 때, 불안은 사라지고 조화롭고 사랑이 넘치는 세상이 된다. 장미꽃 한 송이가 피어난 것도 그 하늘 위의 하늘, 곧 “乾道(건도)”가 있어 서다. 장미 입장에서 보면, 자기 자신이 제일 크고, 그 다음이 지구의 흙이며, 그 위로 하늘이 있는 셈이다. 이것이 곧, 진리의 상대성과 존재의 중심성이다.
붉은 장미 한송이
- 하 성일
외딴 길 오솔길 숲속 가려진 곳
어여쁜 한 송이 장미 피어 있다
안면에 미소 가득
너는 나를 위해
공간과 시간을 맞추어 피어 있다
외딴 길 오솔길
아무도 오지 않는 길에
한 소년이 내게 걸어온다.
안면에 미소 가득 너는 나를 위해
공간과 시간을 맞추어 발걸음 멈추었다
장미 한 송이...
너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아닌,
장미가 붉게 피어난 것은
그저 피어나 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