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그러듯이 제목을 좀 세게 썼습니다. "끔찍한 콩글리쉬 혼종".
요즘 '구독경제'라는 말을 자주 봅니다. 처음에 어느 기자가 대충 발번역해서 쓴 말인 것 같은데 이게 마치 무슨 표준어인 것처럼 굳어져서 Dog나 Cow나 다 쓰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찾아보면...
영어로는 Subcription Economy입니다. Subcribe는 주로 신문 등 정기적으로 발행되는 간행물을 월 요금을 내고 구독하는 방식을 말하는데(예전 20세기 말 무렵에 월2만원 내고 매일 신문 받아보는 게 전형적인 Subscription입니다), 이게 확장되면서 월 요금제를 내는 서비스 일반을 지칭할 때 Subscribe를 쓰게 된 것 같습니다.
즉, 원래 영어에서 Subcription Economy의 의미는 '월정액 서비스'입니다. 매월 일정 금액을 내고 특정 서비스를 지속적으로 이용하는 방식이죠.
(상품이나 서비스에 따라서는 월정액이 아닌 주 단위 / 격월 단위 등의 형태도 있겠습니다만 일단 모든 정액제 서비스를 퉁쳐서 '월정액 서비스'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게 서비스뿐만이 아니라 '실물'에도 적용될 때가 있습니다. 정수기 렌탈 계약이 이런 형태인데요. 정수기 / 침대 / 노트북 등 실물을 빌려(Rental) 주고 매월 이용료를 받으면 Subscription Economy와 비슷한 방식이 됩니다. 이 이용료를 몇 년 계속 냈을 때 해당 실물의 소유권이 이용자에게 넘어간다면 '할부계약'이 되겠죠.
결국 Subcription Economy라는 게 뭐 대단한 건 아닙니다. 예전부터 있던 월정액 서비스, 실물 렌탈 계약, 할부계약 등등에 다 적용되는 용어예요. 특히 실물 분야에서는 한 방에 전액을 다 지불할 능력이 없는 소비자에게 '매월 조금씩 내면서 (결과적으로는 한 번에 사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지급하고) 있어빌리티 능력을 뽐내세요. 그런 걸 호갱이라고 하지만 앞에서는 그런 말 안 한답니다. 호호홋!' 뭐 이런 컨셉으로 팔아먹는 거죠.
렌탈, 할부 등의 단어에 부정적인 의미가 덧씌워지면서 뭔가 그럴듯한 새로운 용어로 대체하고 싶어하는 건 이해합니다. 그런 게 마케팅(Marketing)이죠. 호갱을 호갱이라 부르지 못하고 '님은 정말 똑똑하고 스마트하고 인텔리전트 필이 충만한 분이에요 호호홋' 이라고 돌려치기 하는 게 마케팅의 본질입니다. 자본주의의 본질이기도 하죠.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용어 돌려치기를 할 때에도 최소한 말이 되게 돌려쳐야 하지 않을까요?
앞서 말했듯이 Subscribe는 주로 '월정액 방식으로 신문, 잡지 등을 받아 구독하는 서비스'에 사용되는 용어였다가 그 용어가 확장되었다고 했습니다. 즉, 구독(購讀)이 핵심이 아니라 '월정액 서비스'가 핵심이었어요.
구독(購讀)을 한자어 그대로 해석하면 '구해서(돈 주고 사서) 읽는다'는 의미 뿐입니다. 돈 주는 방식이 월정액이냐 / 일시불이냐 하는 건 한자어 자체에 반영되어 있지 않아요. '구독'이라는 단어 자체로는 '매월 정기적인 이용료를 낸다'는 의미를 전혀 반영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즉, Subcription Economy를 '구독경제'로 번역한다는 건 넌센스(Nonsense)입니다. 작은 배를 boat로 번역하지 않고 baby ship으로 번역하는 것보다도 더 멍청한 짓이었어요.
이렇게 누군가가(아마 한자어를 잘 모르는 수준 낮은 기자가) 처음부터 한자어의 의미를 모른 채 (혹은 잘못 이해한 채) 대충 은근슬쩍 스리슬쩍 본인이 이해한 수준대로 읊어버린 게 뭐 대단한 신종 경제 용어인 것처럼 굳어져 버렸습니다. ㄴㅇㅂ 등에 구독경제 검색해 보면 이게 마치 신종 표준어인 것 같아요.
뭐, 언어는 본질적으로 자의성을 갖고 있습니다. 한자어 '구독'에 '매월 정기적인 이용료를 낸다'는 의미가 없었다 해도 헬조선 반도의 사람들이 그런 의미를 부여하고 또 전체적으로 다 받아들인다면 그냥 그렇게 되는 거예요. 한자어 자체의 의미를 유지할 이유도 없구요.
또한, 저는 기본적으로 한문(한자) 폐지를 지지하는 입장입니다. 어릴 때 한문 많이 배웠고 나름 1800자 실용한자는 대부분 아는 수준이긴 합니다만 이거 없어도 나라 잘 돌아간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한국과 같은 한자문화권인) 베트남은 한문을 폐지해 버렸지만 별 문제 없이 잘 삽니다. 초기에 일부 혼란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잘 살아요.
구독(購讀)이라는 한자어에 원래 없던 '매월 정기 이용료'라는 의미를 추가해서 헬조선 스톼일로 변형하는 게 딱히 잘못된 건 아닙니다. 그렇게 흘러가면 그 용어에 맞춰서 따라가야죠. 언어라는 게 기본적으로 집단 간 소통을 위해서 존재하는 건데 집단 전체의 해석이 변형되면 그에 맞추는 게 맞습니다.
그렇지만, 처음에 월정액 이용료를 포함한 'Subcription'을 '구독'이라는 한자어로 번역한 (누군지 알 수 없는) 기자의 무식함이 치유되는 건 아닙니다. 언어의 자의성을 떠나 최초의 무식함 자체는 영원히 남는 거예요. 역사에 길이 남을 겁니다.
게임 좋아하시는 분들은 '왈도체'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겁니다. 마이트 앤 매직 6탄에서 희대의 발번역을 해서 많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린 적이 있었는데, 그 게임의 NPC가 '왈도'라고 합니다.
왈도체로 마무리하겠습니다.
"힘세고 강한 아침! 내 이름은 구독. 인텔리전트한 호갱님들 많이많이 구독해. 11개의 사슬 편지 받아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