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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서스 Oct 28. 2024

외국 시(詩)를 한국 번역본으로 외운다면

요즘 제 큰딸이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아직 중1인데 그냥 한 번 시켜봤더니 꽤 잘 쓰더군요.


뭐 굳이 소설로 먹고사는 길을 추천하지는 않습니다. 저 자신이 5년째 웹소설 쓰고 있지만 이걸로 먹고살겠다고 했다가는 가정 파탄날 것 같더군요. 실력과 운과 타이밍이 다 받쳐 줘서 상위 0.1% 수준의 작가가 된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인생 말아먹기 딱 좋습니다.


[취미생활로 조금씩 소설 쓰고 그 취미생활 할 시간에 다른 데에 쓸 돈을 아끼는 것.] 이게 최선입니다. 글을 쓴다는 건 취미로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줄 때 가장 좋은 것 같습니다.



잠시 제목과 무관한 얘길 했는데요. 이렇게 딸애한테 소설 쓰기를 시켜보고 또 시(詩) 쓰기도 시켜볼까 고민하던 중, 과거 제가 20대 때에 생각했던 게 떠올랐습니다.


전에 짧게 언급했듯이 저는 20대 때에 나름대로 시 쓰겠다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물론 저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고 때려치웠지만 아무튼 그러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절에는 '영혼이 자유로운 백수'였죠... 법학과 다니는 대학생이긴 했지만 수업을 거의 안 들어갔습니다. 출석 전혀 안 해도 시험만 보면 학점 C는 받던 시절이었으니 그 시절의 낭만(?)을 최대한 땡겨 썼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렇게 자유로운 백수였던 시절. 2권인가 3권으로 된 만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아마 제목이 '악의 꽃'인가 그랬던 것 같아요.

(지금 찾아보니 '미악의 꽃'이라는 일본 만화가 있었네요. 이 만화랑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아무튼 한국 사람이 그린 한국 만화였습니다.)


이 만화의 주인공은 '시를 쓰는 건달 제비'입니다. 원래 건달은 아니었고 나름 청운의 꿈을 품은 학생이었는데 인생이 꼬이면서 나이트클럽 웨이터를 거쳐 건달이 되고 최종적으로 제비가 된다는 컨셉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날 이 건달 제비는 한 50대 노부인을 만납니다. 이 노부인은 대략 120kg은 나갈 것 같은 풍채의 소유자였고 젊었을 때 잠깐 결혼했다가 이혼한 '돈 많은 여인'이었는데, 이 노부인을 만족(!)시키는 게 주인공 제비에게 주어진 임무였죠.


뭐 자세한 경과는 생략하고. 이 노부인은 [과거 10대 때에 시(詩)를 사랑하는 문학소녀였으나 불행한 사건 때문에 폭식하게 되었고 결국 120kg 넘는 몸이 되어 버렸다]는 사연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몇백편의 시를 줄줄 외우죠.


젊었을 때 시인이 되려고 했던 건달제비 주인공도 시를 줄줄 외웁니다. 노부인과 둘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를 읊으며 조금씩 교감하게 됩니다.


으음. 그런데 말입니다.


이 세계의 명시... 만화의 등장인물 두 명 모두 '한국말로 번역된 버전'으로 외우고 다니네요? 버지니아 울프, 보들레르, 랭보 할 것 없이 모두 한국말 버전입니다.


이게 적절할까요?



당시 저는 자유로운 백수인 동시에 시 쓰겠다고 깝죽대던 대학생이었고, 그래서 우연히 대학 도서관에서 '랭보 시 이론'을 보고 있었습니다. 물론 끝까지 못 보고 중간에 때려쳤습니다만 아무튼 그걸 보고 나서 몇 달 만에 '한국말 번역본으로 세계의 명시를 줄줄 읊어대는 설정'을 본 거죠.


랭보 시 분석 이론에 따르면, 랭보는 [모음으로 색깔을 부여하는 작업]을 했었다고 합니다. 아(a), 에(e), 이(i), 오(o), 우(u) 이렇게 다섯 가지 기본 모음으로 색깔을 나타냈다고 하더군요. 구체적으로 다섯 모음이 무슨 색깔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아무튼 그렇게 했었대요.


예를 들어 o가 검은색을 나타낸다고 설정하고서 프랑스어 오르(Or. 황금)를 썼다면 그건 노란색이 아니라 검은색을 표현하는 겁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밤하늘'이라면 이건 하늘이 노랗게 물들었다는 얘기가 아니라 너무 어두워서 검은색 빛을 내는 듯한 반타블랙 급 밤하늘이라는 의미가 되겠죠. 랭보의 시에서는 그랬다고 해요.


그런데 이걸 한국말로 그대로 번역한다면... 의미 전달이 될까요?


당연히 안 됩니다. 랭보가 의도한 모음색깔이 다 깨져요. 프랑스의 오르(Or)와 한국말의 황금(黃金)은 단어 자체가 다른 구조이고 모음도 다릅니다. 랭보 이론을 반영하려면 완전히 새롭게 의역해서 오르(Or) 대신에 모음 'ㅗ'가 들어가는 전혀 다른 단어로 대체해야 합니다.


이게 아니라 원래 단어를 의미만 보고 그대로 '황금빛 밤하늘'로 번역해 버리면 한국말로 읽는 사람은 그냥 저녁노을 무렵의 노리끼리한 하늘 색깔로 받아들이겠죠. 이러면 원작자 랭보의 의도를 전혀 살릴 수 없습니다.



랭보는 너무 많이 나갔으니 적절히 보편적인 시(詩)로 가 보죠. 아니, 그냥 노래 가사로 가 보죠. 훌륭한 작사가는 노래 가사만으로도 시(詩)를 만들어 낼 수 있으니 노래 가사로 봐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시는 '운율'이 있습니다. 각 행의 길이를 적절히 조절하고, 단어의 길이를 맞추고, 시작 음운 / 끝 음운에 반복을 넣습니다.


그게 자연스럽죠. 시 자체가 '노래'에서 시작했으니까요. 반복 음운을 넣는 게 노래에 더 적합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사가 '팀 라이스'의 작품 하나를 보죠.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최고의 빌런 곡으로 알려진 '비 프리페어드(Be prepared)'의 끝단입니다.



메티큘러스 플래닝

테너서티 스패닝

디케이즈 오브 디나이얼

댓즈 심플리 와이 아일

비 어 킹 언디스퓨티드, 살류티드, 리스펙티드,

앤드 씬 포 더 원더 아이 엠

예스 마이 티쓰 앤드 앰비션즈 아 베어드, 비 프리페어드!


굳이 영어로 안 쓰고 한글 음차로 썼습니다. 여기서 잘 드러나듯이, 팀 라이스는 끝 음운이 "~잉(ing)", "~일(L 내지 LL), "~드(ed)"로 반복되는 단어를 쓰면서 가사 자체에 운율을 부여하고 있어요. 끝문단만 썼지만 다른 부분에서도 끝 음운이 계속 반복됩니다.



그런데 이걸 한국어로 바꾸면...


치밀한 계획

끈질긴 인내

수십년간 부정되어 온

그것이 바로 내가 (왕이) 되려는 이유

반박당하지 않고, 존중받고, 존경받는 왕

그리고 나 자신으로 경이롭게 보일 것(이다)

그래, 내 이빨과 야망을 드러내고, 준비되어라!


뭐 한국말로 바꿔도 내용 자체는 좋습니다. 쿠데타를 준비하는 스카의 야망이 잘 드러나긴 하네요.


그러나 운율은... 끝말 음운이 다 깨졌습니다. 획, 내, 온 유, 왕, 것, 고, 라. 무슨 통일성 같은 거 전혀 없습니다.



앞 예시와 반대로, 운율을 맞추려고 노력하다 보면 원래의 의미와 완전히 달라지는 문제도 생깁니다. 이건 디즈니의 또 다른 명작 '미녀와 야수(Beauty and beast)'로 보죠.


미녀와 야수 노래는


Tale as old as time

True as it can be (끝날 때에는 Song as old as Rhyme)


로 시작하고 / 끝을 냅니다. 직역하면 '시간만큼이나 오래된 이야기, 그 자체로 가능한 한 진실(끝날 때에는 '운율만큼이나 오래된 노래')' 로 번역되겠죠.


그러나 이걸 한국어로 바꿔 부를 때에는


아주 오래된

옛날 이야기~


(끝날 때에는 뜬금없이 '맑고 영롱한 / 사랑 이야기~')


로 바뀝니다. 영어 원문에 나오는 뜻을 전혀 살리지 못하죠. 운율에 맞추려고 길게 해석되는 직역의 의미를 완전히 버리는 겁니다.

(* 노래에서는 당연히 원문 직역보다는 운율에 맞춰야 합니다. 저 노래 번안을 잘못했다는 게 아니라 '뜻'을 살리지 못했다는 얘기이니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외국말을 번역한다는 건 그 자체도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시(詩)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각 국가의 언어에서 특정 음운을 따내 운율을 만들었던 게 완전히 깨져 버리고 새로운 운율에 맞추려면 의미가 달라져 버립니다.


(제가 '노래'를 예시로 들긴 했습니다만 시 또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무리 형식을 파괴한 자유시가 많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시는 노래에서 출발했죠. 운율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말로 번역한 외국 시를 좋다고 외운다?


이건 좀 아니죠. 안타깝게도 대규모로 시간을 들여 삽질하는 겁니다.


기왕 시간을 들인다면 해당 언어를 조금 공부해서 원래 언어 그대로 시를 외우는 게 최선입니다. 진짜로 특정 시인의 시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꼭 외워야겠다면 원어 그대로 외우는 게 낫습니다.


한국어로 외운 시를 무슨 대단한 것인 양 암송하고 다닌다면... 뭐 그것도 개인 취향이니 어쩔 수 없겠죠. 한국어로 외우고 싶으시면 그렇게 하세요.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 나중에 딸애한테 설명해 줄 내용을 조금 정리해 보았습니다. 늘 그렇듯이 결말이 냉소적이네요. 이 냉소적인 말투가 웹소설에서는 그리 좋지 않습니다만... 제가 하는 게 다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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