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주입식 교육에는 미래가 없다
아침에 인터넷 기사를 보다가 (제 기준에서) 황당한 제목을 봤습니다.
대치동에서 4~7세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레테'가 유행하고 있다고 해서 뭔가 싶어서 봤는데... 거기서는 레벨테스트 시험을 '레테'라고 부르나 봅니다. 기자 개인이 이런 줄임말을 좋아하는 건지 / 정말로 대치동에서 '레테'라는 말을 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기사에 그렇게 나긴 했습니다.
저 기사 제목만 봤을 때 제 생각은 대략 이러했습니다.
[아 대치동에서 새로운 교육방법이 도입됐나 보다. '레테'라고 하는 거 보니까 대략 불필요한 기억을 빨리 잊어버리는 방식인가 보네. 암기력과 응용력을 높이려면 불필요한 기억을 지우는 것도 중요하지. 아파트 아파트 같은 후크송을 머리에서 지워 버리고 집중력을 높이는 뭐 그런 거 아닐까?]
라는 생각으로 기사를 열어 봤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제목에 쓴 대로 '레벨테스트'.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인 아동들을 대상으로 학대나 다름없는 암기교육을 시키는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닙니다. 그 무식한 암기교육을 통과해서 나름 S대 가는 애들이 5~10% 수준이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애들은 대충 풀어놔도 K, Y대 정도는 충분히 갈 수 있는데 괜히 부모의 헛바람으로 의미없는 암기교육을 한다는 것 또한 어제오늘 일이 아니긴 합니다.
즉, 저 기사 자체는 그리 대단한 게 아닙니다. 주입식 교육에서 살아남은 부모들 또는 주입식 교육에 대한 로망(?)을 품고 있는 부모들이 강남이나 목동으로 꾸역꾸역 들어가서 애들을 쥐 잡듯이 잡고 있다는 기사는 몇십년째 헬조선의 단골 테마입니다.
다만 오늘 제가 충격 받은 건... 대치동 사람들이 레벨테스트를 '레테'로 줄여 쓰면서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망각의 강 '레테'와 혼동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예전에 한 때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했고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했던 이문열 작가님의 소설 중에 [레테의 연가]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제가 중학생 때 처음 읽었던 걸로 기억나네요.
대충 내용은 (순수문학을 신봉하는 편 입장에서 볼 때) 통속적입니다. 유부남과 썸 타는 젊은 여자가 선을 넘을까말까 고민하고 그 유부남 또한 젊은 여주인공과 확 갈때까지 가버릴까 고민하다가 결국은 서로 선을 지키기로 하고 젊은 여주인공은 다른 남자 만나서 정상적인 결혼을 한다, 뭐 그런 내용입니다.
'간통죄가 사롸있네! 잘못 놀아나면 감옥 가네!' 시절에 나온 러브스토리(?)죠. 이문열 작가님의 물 흐르듯 흘러가는 필력으로 커버하긴 합니다만 내용은 간단합니다. 요즘 나오면 19금 축에도 못 들죠.
(요즘 나온다면 이런저런 고민 할 필요 없이 곧바로 선 넘어야 됩니다. 쌍팔년도 마인드로 넘을까말까 고민하면 곧바로 고구마 인증이에요;;)
제가 '망각의 강 레테'에 대해 알게 된 건 이 소설을 통해서였습니다. 불핀치 버전 그리스신화를 본 건 고등학생 때였고 거기서는 망각의 강 레테가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가는 배경1 수준이었는데, 이문열 작가님이 망각(忘却)을 강조하면서 잘 알게 되었었습니다.
당시 이문열 작가님의 소설이 대유행이었으니, 저랑 비슷한 나이대의 4050 세대 중에서 '레테의 연가'를 읽은 분이 꽤 됐을 겁니다. 그 분들은 대부분 레테라는 단어를 들으면 '망각의 강'을 떠올리겠죠. 그리스신화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진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런데 2024년의 대한민국에서는... 레테가 '레벨테스트'입니다. 망각을 상징하는 단어를 레벨테스트의 줄임말로 쓰고 있어요. 어린이 아동들에게 주입식 암기교육을 하면서 그 암기 레벨을 따지는 시험이 '망각의 강'과 같은 이름입니다.
헬조선 스톼일 주입식 암기교육의 폐해를 비꼬는 현상은 1980년대부터 있었습니다. 그 이전의 상황은 모르지만 아마 70년대에도 비판했을 것 같아요.
아무튼 그 비판현상 중 이런 예시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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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선생님이 암기력 좋은 중학생에게 "김동인"에 대해 물어봤습니다. 해당 학생은 벌떡 일어나 김동인에 대해 읊기 시작합니다.
"김동인은 일제시대에 태어난 작가이며 대한민국 단편 소설계에서 가장 뛰어난 역량을 보유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감자, 배따라기, 붉은 산, 광염 소나타, 발가락이 닮았다 등의 작품이 유명합니다. 친일 행적과 괴팍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김동인의 작품과 그 압축적인 표현 기법만큼은 높게 평가받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묻습니다.
"그 작품 중에 읽어본 게 있니?"
학생이 대답합니다.
"교과서에 나오는 '붉은 산' 외에는 읽어본 게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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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서에 나오는 작가에 대한 평가와 소설 제목은 줄줄 외우지만 막상 해당 소설은 읽어본 적 없는 암기형 인재. 이게 헬조선 스톼일 인재였습니다. 과거에도 그랬었고 극히 최근까지도 그러했습니다.
이 현상을 바꾸려고 수능을 도입했고 어느새 수능 도입 30년이 되어 갑니다. 그런데... 암기형 인재의 시작점은 만4세~7세까지 내려와 버렸네요;; 도대체 수능으로 뭘 하고 있는 걸까요?
만4세~7세 시절부터 주입식 암기교육을 받고 자라난 아이가 나중에 글로벌 활동을 하면서 '우리나라에서는 레테가 레벨테스트야.' 라고 얘기한다면... 그리스신화와 성경을 문화 속 깊이 내재화하고 있는 서구권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주입식으로 외운 지식은 금방 다 날아갑니다. 제가 중딩 때 '폭력은 인간을 고치는 가장 좋은 약이다!'라는 신념(!)을 가지신 미술선생님이 학생들을 구타하면서 해당 학교 전체를 도 단위 학력평가에서 미술과목 1등으로 만들어 놨었는데, 그 때 뭘 외웠는지 전혀 기억 못합니다.
레벨테스트 레테는 몇십 년 안에 '망각의 강 레테'로 변할 겁니다. 지금 대치동에서 레벨테스트 받고 있는 아동들의 90%는 실패할 거예요. 일부 살아남아 성공하는 아동들도 글로벌 활동에서는 상식이 부족한 찐따 너드 취급당할 겁니다.
망각의 강 이름을 아동학대 레벨테스트의 줄임말로 사용하는 나라. 이 모순(Irony) 또한 인간의 본질...일까요?
참 묘하죠. 이 모순된 학구열에 치여 아동학대받은 아이들은 대략 15년 후에 자기들이 뭘 배웠는지 다 잊어버리게 될 겁니다. 모순이 현실로 드러나게 될 겁니다.
11월의 어느 아침. 잠시 넋두리 늘어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