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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원래 백수이고 회사원이 아닌 것을

by 테서스

1. 서론 : 영화 '패왕별희'


오래된 영화 '패왕별희'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80년대 아시아 문화권에서 얼짱지존으로 군림했던 대 스타 장국영이 출연했던 영화 패왕별희. 잘 만든 영화입니다. 혼란스러웠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개인들의 고뇌와 심적 갈등을 잘 형상화하기도 했었죠.


이 영화에서 장국영이 맡은 역할은 '여자 연기를 하는 경극 배우'입니다. 전통적으로 경극 배우는 남자만 할 수 있었는데, 극 전개상 여자 역할도 있으니 남자가 여자로 분장하고 여자 연기를 하는 겁니다.


장국영은 여자로 분장해도 충분히 통할 만한 미모(!)를 갖췄는데(영화 속 등장인물이 그렇다는 설정이지만 현실의 장국영도 대단한 미남이긴 합니다), 한 가지 약점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한쪽 손 엄지가 2개였던 '육손이'였다는 약점이 있었죠.


영화의 극 초반부에 어린 소년의 6번째 손가락을 작두로 잘라 버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머니가 살벌한 표정을 지은 채 아들의 손을 작두에 올린 후 서겅 눌러 버리고... 아이는 너무 놀라 울지도 못하다가 뒤늦게 비명을 지르죠. 시작부터 강렬합니다.


이렇게 육손이에서 정상 오손이(?)가 된 주인공은 경극 극단에 팔려 갑니다. 경극 자체가 체조선수 수준의 기예를 펼치는 거라서 어릴 때부터 무시무시한 훈련을 받아야 된다고 하네요;;


주인공은 그 빡센 훈련을 견디고 경극 배우가 됩니다. 미모가 탁월하니 첫 데뷔 무대부터 주인공 급 역할을 받게 되죠. 공연 시작하기만 하면 대박날 거라고 다들 기대가 큽니다.


그런데...


주인공이 계속 대사를 틀립니다. 아무리 연습을 해도 틀리고 또 틀립니다.



주인공은 첫 경극에서 '비구니' 역할을 맡게 되는데, 극중 캐릭터는 원래 여자인데 스님 복장을 하고 남자로 행세한다는 설정입니다. 그래서 원래 바른 대사는 [나는 원래 여자인 것을 어찌하여 남자 옷을 입고 남자처럼 행동하는가]입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이 대사를 계속 틀리죠. [나는 원래 남자인 것을...] 로 수십 수백 차례 잘못 말합니다.


그러다 결국 나중에 항우 역할을 맡게 되는 연극 파트너가 주인공의 입에 구리 곰방대를 쑤셔넣으며 발광하고... 그제서야 주인공은 원래대로의 대사를 하게 됩니다. '나는 원래 여자인 것을 어찌하여 남자 옷을 입고~'라고 정확히 대사를 읊게 되죠.



(영화 보신 분은 다 아시겠지만) 이 구조가 영화 말미에 다시 재현됩니다. 일제시대와 2차 세계대전과 공산화 과정을 겪고 폭삭 늙어 버린 두 주인공이 자기들만을 위한 경극을 펼칠 때, 주인공은 비로소 첫 대사를 다시 틀리게 말합니다. 자기 내면에 묻어 버렸던 진짜 정체성을 떠올리며 서글프게 되뇌입니다.


[나는 원래 남자인 것을...]



영화의 결말이 장국영의 현실 엔딩과 비슷해서 더욱 안타깝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동성애자들을 매우 싫어하고 그들과 엮이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만, 장국영의 인생만큼은 많이 안타깝네요. 성적 취향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대단한 배우였고 한 시대를 풍미한 아이콘이었기에 그렇게 안타까운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서론은 이 정도로 하고. 제 잡설을 풀어 봐야죠.



2. 본론 : 나는 원래 백수인 것을...


장국영 같은 정체성의 고민은 없습니다만, 잠시 비슷하게 신세 한탄(?)을 한다면...


저는 원래 백수였습니다. 현실에서 백수였던 시간이 꽤 길었고 또 제 본성이 백수에 잘 맞기도 했습니다.


어디 돌아다니는 거 싫어하고, 시간이 남아돌아도 집에 콕 틀어박혀 있는 걸 선호했으며, 집에 있는 동안 책을 읽든 게임을 하든 망상을 하든 혼자 노는 걸 좋아했습니다. 어릴 때도 그랬었고 좀 크고 나서 (고시생을 가장한) 게임폐인 생활을 할 때도 그러했습니다.


뭐, 게임폐인 생활을 할 때에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같이 놀긴 했었네요. 원래 인생을 갉아먹으면서 놀 때에는 동지(?)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덜 불안하잖아요;;


그러다 한국나이 35살에 재취업하긴 했습니다. 어쩌다 운이 좋아 결혼도 했구요.


그러고 나서 15년이 지났네요. 어느새 반백살에 이르렀고... 인생의 반환점에 서게 되니 과거 재밌었던 일들을 자주 돌이켜보게 됩니다.



이 나이에 드는 생각이 [나는 원래 백수였다]는 겁니다. 제 타고난 본성은 백수 쪽이고 무언가를 성실하게 반복적으로 시행하는 건 맞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다만, 현실은 제 본성과 정반대였죠. 어릴 때 학교생활, 좀 크고 나서 고시생 생활, 다시 재취업하고 나서 회사원 생활 모두 제 본성을 거스르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학교 때에는 오전 자율학습 때문에 7시 반까지 등교해야 했는데 그나마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7시까지 등교. 고시생으로 살 때에는 하루 12시간 공부. 재취업한 이후에는 뒤늦은 직장생활에 성공해야 한답시고 다시 7시까지 출근.


7시에 출근해서 야근하는 생활을 꽤 오래 했습니다. 2020년 이후로는 야근 없애기 운동이 일어나면서 거의 야근 없이 살고 있긴 하지만, 그 전에는 대부분 야근이었어요. 평일에 퇴근하면 잠 자는 것도 빠듯했습니다.


뭐, 그 덕분인지 나름 회사원으로서 괜츈한 수준까지 올라오긴 했습니다. 연봉 앞자리가 바뀌었고 직급도 괜찮긴 합니다. 이대로 쭈욱 가면 임원 꼬리표는 달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네요.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건 제 본성이 아니었습니다.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맞지 않는 생각을 하며 맞지 않는 일을 해 온 게 제 인생이었던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듭니다.


패왕별희 장국영의 대사를 인용하여 신세한탄 아닌 신세한탄을 한다면...


[나는 원래 백수이고 성실한 회사원이 아닌 것을. 어찌하여 넥타이를 메고 구두를 신고 하루종일 회사 일을 하는가. 내 본성대로라면 추리닝을 입고 라면을 먹으며 집에서 게임이나 하고 가아끔 안 팔리는 소설을 쓰면서 상상 속에 살아야 하는데. 어찌하여 성실한 회사원인 척 위장하면서 살아가는가.]


정도로 썰 풀어볼 수 있겠네요.



물론 이거 다 배부른 소립니다. 당장 회사 짤리면 먹고 살 길이 막막해져서 괴로워질 거예요. 저 하나 괴로운 게 아니라 온 가족이 다 힘들어지죠. 젖은 낙엽처럼 착 달라붙어서 오래오래 회사 다녀야 합니다.


그리고, 백수본능은 저 말고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습니다. 먼 옛날 수렵 사냥으로 먹고살던 석기시대에 사슴 한 마리 잡으면 10일 이상 놀고먹던 본능은 현대인 대부분에게 그대로 남아 있어요. '놀고 먹으면서 살고 싶다!'는 소원은 우리 인간의 큰 본성 중 하나입니다.


남들도 다 백수본능을 억누르며 열심히 살고 있으니 저도 그렇게 해야겠죠. 적어도 애들이 다 크고 저와 아내의 노후를 보장할 돈이 모이기 전까지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게 당연한 겁니다.


그래도 결국은 끝나겠죠. 정년퇴직이든 조기 희망퇴직이든 간에 '회사원'으로서의 삶을 끝내고 다시 백수로 돌아갈 시간이 오겠죠.


그 시기에 '소설가'로서 먹고 살 만 하면 좋겠지만, 그러지 않더라도 '강제 백수'는 확정입니다. 모든 직장인의 끝은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고 저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회사원 코스프레(!)를 그만두고 제 본성인 백수로 돌아가는 날. 틀린 대사를 바로잡고 대본과 무관하게 제 본심을 토로하는 날.


그 날이 오겠죠. [나는 원래 백수였다. 회사 때려치우는 거 너무 좋아!] 라고 말할 날이 오겠죠.



이런 글을 회사에서 쓰는 건 쪼큼 비매너이긴 합니다. 잡썰은 이만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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