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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주권? '농토'를 지켜야지 '농민'은 아닙니다

by 테서스

1. 우루과이 라운드 당시의 기억


우선 제목을 강하게 뽑았네요. '농토'를 지켜야지 '농민'은 아닙니다. 즉, 농민을 보호해 줄 필요는 없습니다. 농민이 다른 직업으로 전환하도록 지원해 줄 필요는 있지만 농민이 농민으로 남도록 보호해 줄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이 생각을 한 건 무척 오래됐습니다. 무려 35년 전, 얼추 쌍팔년도를 갓 지난 1990년 경이었던 것 같네요. 당시 저는 중2였습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그 때 당시에는 민족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87년 민주항쟁을 계기로 NL 운동 세력이 더 커졌고, 학교 선생님들도 소싯적에 민주화 운동(그 중에서도 특히 애국애족 민족자주통일 운동)에 관심을 가졌던 분들이 대다수였습니다.


자연스레 수업시간에 '우루과이 라운드'에 대한 얘기가 나왔죠. 쌀 시장을 개방해서 미쿡 쌀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하면 우리 농가는 다 죽는다며 아우성을 칠 때였습니다.


당시 미술선생님이 열변을 토하셨습니다. 대략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당장 가격이 싸다고 해서 해외에서 쌀 들여오면 국내 농업이 다 망한다. 그렇게 국내 농업이 망한 상태에서 쌀 수출 국가가 수출 중단하면 쌀값이 10배 20배로 뛰게 돼. 우리 나라가 식량주권을 잃어버리는 거야. 당장 눈 앞만 보지 말고 20년 30년 뒤를 내다봐서 농업을 지켜야 해. 식량주권을 지켜야 한다!]


이 얘기를 들었을 때... (반골 기질이 강하고 나중에 스스로 소시오패스임을 깨닫게 되는) 한 중딩이 속으로 의문을 품습니다.


'어? 농민이 줄어도 농토는 그대로 남는 거 아냐? 미국식 기계화 농법 도입하면 되잖아? 미국식으로 농사 지으면 농민 10만 명만 있어도 될 텐데?'



물론 이 얘기를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습니다. 쌍팔년도가 갓 지난 시점에서 선생님 주장에 토 달면 몽둥이로 처맞거든요;; 그 때는 그랬습니다.


또한, 당시 중딩인 저로서는 제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는 인터넷이 보급되지 않았거든요. 미국식 기계화 농법을 도입하는 데에 얼마만큼의 돈이 들지 알 수 없고, 미국의 농민 숫자가 얼만지도 몰랐으며, 쌍팔년도 식 모내기+김매기+손에손에 낫 들고 벼베기 농법이 미국식 기계화 농법과 비교해 어느 정도의 효율을 내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냥 의문만 품고 넘어갔습니다. 그 때는 그랬습니다.



2. 1997년 이후 : 나름 대학 물 먹고 인터넷 찾아보기 시작함


35년 전, [식!량!주!권~~~!]을 웅장하게 부르짖어 주시는 미술쌤의 주장에 의문을 품은 한 중딩.


그 중딩은 나이를 먹었고 고딩을 거쳐 대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딩이 3학년이 되었을 때 IMF가 터졌죠.


금모으기 운동을 하더니 갑자기 민족주의 광풍이 붑니다. 신토불이 신토불이 노래를 부르면서 우리몸엔 우리농산물 이딴 소리가 떡하니 TV광고로 나오고 외국산 바나나 망고 먹으면 역적으로 내몰릴 것 같은 사회적 분위기(?)도 살짝 조성됩니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언제 봤다고 한민족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민족의식 같은 게 별로 없었어요. 한국말 쓴다고 해서 북한이랑 친하게 지낼 이유도 없어 보였고 딱히 우리농산물에 대한 애국심 같은 것도 안 생기긴 했습니다.


그러면서 인터넷이 광범위하게 도입되었죠. IMF때 희망퇴직 당해버렸던 아재들이 퇴직금 꼬라박아서 PC방을 차리면서 인터넷 보급률이 폭증합니다. (지금은 마다가스카르 수준이지만) 당시 한국은 'IT강국!'이라며 나대나대 나대고 있었어요.


이때쯤부터 중딩 시절 생각의 근거를 찾아보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과연 대한민국 식량주권은 농민에 있는가 / 농토에 있는가에 대해 다른 나라의 사례 등을 비교하며 객관적인 숫자를 갖다붙이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게 '뉴질랜드'더군요. 여기는 2000년대 초반이나 2025년이나 비슷할 것 같은데,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뉴질랜드의 농토(農土)는 대한민국의 10배 이상. 국토 면적 말고 '곡물농업 및 목축을 잘 할 수 있는 곳'을 따졌을 때 그렇다고 함


2) 뉴질랜드에서 '곡물농업'을 하는 농민은 1만 명이 안 됨. 목축업 및 후속 가공업 종사자까지 다 합치면 몇십만명 규모가 되긴 하지만 순수하게 곡물재배 농업만으로 한정하면 1만 명이 대한민국 10배의 농토에서 농사를 짓는 것.


3) 이 때 당시 대한민국의 농민은... 약 300만명. 2025년 기준으로도 100만명 넘음.


4) 이러면 대한민국 농업에 경쟁력이 있을까? 당연히 없겠지?


5) 대한민국에서 농업 경쟁력을 높이고 식량주권까지 지켜내려면... 농민을 줄여야겠네? 농토는 유지하면서 농민 숫자를 줄이고 기계화 농법으로 전환해야겠네?



이게 제가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2000년대 초반쯤에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뉴질랜드에서 순수한 곡물농업에 종사하는 농민이 1만명도 안 된다면, 대한민국 전체 농토를 통합하고 기계화 농법을 전면 시행할 경우 필요 농민 숫자는 더 적을 겁니다. 순수하게 '식량주권'을 지키기 위해 과일농사 고추농사 녹차잎농사 인삼농사 싹 다 갈아엎고 '곡물농사'에 몰빵한다면 5천명 미만으로도 대한민국 전체 농토에 농사를 지을 수 있을 거예요. 중장비 급 기계를 도입해서 뉴질랜드~미국 수준으로 기계화하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식량주권은 '농토'가 핵심입니다. 코딱지만한 땅에 바글바글 모여서 허리 통증 견디며 모내기-김매기-벼베기 3단콤보 할 필요 없이 기계화 농법을 확대 시행하면 농민이 대폭 줄어도 최소한의 기본 곡물은 확보할 수 있어요.


즉, '농민을 보호해야 해욧 빼애애액!' 주장을 할 때 '식!량!주!권~~~!'을 웅장하게 외치는 건 헛소립니다. 식량주권을 지키려면 영세농민을 줄이고 농토를 통합해서 대형화해야 해요. 필요하면 농업법인을 크게 만들고 준공기업으로 운영할 수도 있구요.


뭐... 정치권에 이런 얘기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농민 표는 소중하거든요.



3. 그리고 20년 후 현재 대한민국의 농업 : 여전히 농민이 너무 많음


신토불이 신토불이 신토불이~야~ 우리 몸엔 우리건데 남의것을 왜찾느냐 잊지마라 잊지마 너와나는 한국인 신토불이~


뭐 이딴 잡소리는 집어치우고. 망고 오렌지 바나나가 마트에 차고넘치고 해외 밀 수입량이 늘어서 쌀 소비량을 추월했으며 국내에서 생산되는 쌀도 남아도는 시대에 무슨 신토불이 염병입니까. IMF 직후에 저 노래 부른 가수 분도 지금쯤 집에서 오렌지 까 드시고 계실 거예요.


이제 더 이상 '식량주권 소중하다구욧 빼애애액!'을 외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농민 보호해야 한다는 소리는 나오죠. 언제나 그렇듯이 농민 표는 소중하거든요.



농민을 농민으로 분리해서 보지 않고 '저소득층의 한 유형'으로 분류해 보호하는 것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어느 나라든 저소득층의 소득 증대를 위해 노력해야죠. 그건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 저소득층의 소득 증대 방안이 [그냥 하던 일 그대로 하세요 국가가 세금으로 땜빵해 드릴 테니 하던 일 하시면 됩니다.] 가 될 수 있을까요? 저소득층이 저소득인 이유가 '하던 일의 부가가치 생산성이 낮아서 발생'하는 것인데, 그 일의 생산성을 높일 생각 따윈 1도 없이 남들이 낸 세금 꼬라박으면 그만일까요?


전혀 아닙니다. '직업 전환'을 지원해야지 '하던 일 그대로 하는데 세금만 쏟아붓는 방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더 악화시킬 뿐이죠.



대한민국 농민은 2025년에도 여전히 100만 명입니다. 농토가 10배 이상 넓은 뉴질랜드가 1만 명으로 곡물농사를 다 짓는데 그 1/10 농토에 100배 많은 농민이 있습니다.


물론 대한민국 농업은 '고부가가치 중심'으로 많이 넘어갔습니다. 예전처럼 쌀농사에 몰빵하는 농민은 얼마 없고 대부분 과일/건강식품 쪽으로 전환하셨을 거예요. 30년째 부르짖던 식량주권 주장은 어느새 사라지고 기호품/사치품 중심의 농업으로 구조조정(?)이 이루어지긴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농민이 많습니다. 농토의 절대적인 크기를 놓고 볼 때 주요 식량 수출국과 경쟁하기 어렵습니다. 고부가가치 농작물 중심으로 전환한다고 하지만 그건 역으로 예전 식량주권 주장이 헛소리였다는 걸 인정하는 거죠. 멀쩡히 농사 지을 수 있는 땅에 태양광 패널을 까는 것 또한 마찬가지구요.



대한민국은 '농민 지원책'이 아니라 '농민 전환책'을 썼어야 했습니다. 농민이 다른 직업으로 넘어갈 수 있게 지원하고 적극적으로 농민 숫자를 줄였어야 했어요. 35년 전 우루과이 라운드 논의될 때부터 (촌구석의 중딩 한 명이 식량주권 주장에 의문을 가졌을 때부터) 그렇게 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안 하죠. 35년 동안 자연스럽게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100만 대군(!)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농민들과 연대하는 게 무슨 대단한 민족적 결단인 양 나대나대 나대는 얼치기 민족주의자들도 넘쳐나고 있구요.


뭐, 결국은 세금 꼬라박을 겁니다. 지금까지 늘 그랬듯이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그러면서 다른 데 쓸 돈이 없어지겠죠.


알아서들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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