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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by 테서스

(대충 '아래 아' 등 현대 한글에서 생략된 표현은 빼고 씁니다.)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사맛디 아니할쎄

이런 젼차로 어린 백셩이 니르고저 홀 빼 이셔도

마참내 제 뜻을 시러펴지 못할~노미 하노라.

내 이를 여엿삐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맹가노니

사람마다 수비니겨 날로쑤메 편안~킈 하고자 할 따라미니라


<현대적 표현>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맞지 아니하니

이런 이유로 어리석은 백성이 할 말이 있어도

마침내 자신의 뜻을 널리 펼치지 못하였노라

내 이를 가련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나니

사람마다 쉽게 여겨 매일 쓰는 데에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훈민정음 서문. 고2때 국어쌤께서 열변을 토하시며 강조하신 덕분(!)에 32년이 지난 지금도 얼추 다 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문을 다시 외울 때마다 쪼큼 뭉클해지곤 합니다. 많이는 아니고 쪼큼. 아주 쪼큼.


전 세계 어느 나라를 돌아봐도 왕(王)이 직접 글자를 만들어 반포한 사례는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왕의 명령으로 똑똑한 신하가 글자를 만든 사례는 있겠지만, 훈민정음(한글)의 경우 세종대왕께서 대부분 주도하셨다고 하죠. 세종대왕 본인이 당대 최고 수준의 천재였으니 가능했을 겁니다.


(중국 쪽 학자가 초안을 잡은 걸 일부 변형해서 도입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어느 영화에서는 '스님'이 만든 걸 가져왔다는 설정을 도입했다고도 하네요. 사실에 기반해서 입증을 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만 그런 입증 없이 '카더라' 내지 '내 뇌피셜이오.'라는 식이라면 뭐... 볼 이유가 없겠죠.)



[세종대왕께서 연산군 수준으로 폭정을 저질렀다고 해도 한글 창제 이거 하나면 다 커버하고 여전히 대왕 칭호를 받으실 수 있을 것이다.] 는 말이 있습니다. 50살이 되도록 한글을 쓰다 보니 저절로 동의하게 되네요. 정말 대단한 글자입니다.


물론, 세종대왕의 업적은 한글 하나가 아닙니다.

- (본인이 직접 선봉에 서서 맞짱 뜬 건 아니지만) 대마도를 제압하고 북방에 4군6진을 개척했으며,

- (전부 다 개척한 건 아니고 호구조사를 통해 세금징수 대상을 늘린 게 많긴 하지만) 전국의 농지 결 수를 늘려 농업생산량을 증대시켰고,

- (똑똑한 문관들을 계속 야근시키고 주말근무까지 부려먹어서) 고려사 편찬 및 각종 서적을 출간하도록 했습니다.

하나하나가 모두 대단한 업적이죠.


뭐, 모든 게 다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세종대왕께서도 실패한 일이 있긴 해요. 4군6진으로 새로 개척한 땅에 농민들을 이주시켰다가 흉년이 들어 수천명이 굶어죽기도 했고, 화폐제도를 도입하려다가 경제적으로 크게 말아먹고 다시 물물교환 체제로 돌아가기도 했으며, 노비종모법을 시행하여 노비의 숫자를 늘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노비종모법은 관점에 따라서는 업적(?)으로 들어가기도 하구요. 응?


비록 몇 가지 실패한 정책이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세종대왕의 업적은 한반도 통치자들 중 단연코 1등입니다. 영토확장만 보면 광개토대왕이 1등이지만 확장한 영토 내에서 농업생산량을 증대시키고 세금을 더 걷을 수 있게 제도정비를 한 것까지 종합하면 세종대왕 시절이 더 나을 거예요. 한글 창제를 빼고 봐도 1등 먹을 것 같습니다.



왜 갑자기 뜬금없이 세종대왕을 찬양하느냐 하면...


요즘 제가 '조선의 대항해시대'를 집필하고 있습니다. 전에 컨셉은 올렸었는데, 막상 쓰기 시작하니까 또 느낌이 색다르네요.


https://brunch.co.kr/@0a2c72370ba24fa/114



현재 집필중인 작품에서는 세종대왕 시절이 초반에 짧게 지나갑니다. 제 작품의 특성상 '킹왕짱 강한 먼치킨'은 피하고 '밑바닥에서 박박 기면서 고통받는 주인공'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아서, 세종대왕 시절이 지나간 후 계유정난 때 원양항해를 시작하면서 고통받는다(!)는 쪽으로 전개하게 되었습니다.


주인공이 고통받는 시나리오를 더 선호하긴 합니다만... 그래도 막상 쓰다 보니 [아 그냥 세종대왕 초창기부터 항해 시작하는 걸로 할 걸 그랬나] 라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위대한 임금의 위대한 시대에 맞춰 위대한 항해를 시작하면 훨씬 더 웅장하고 좋잖아요. 조선이 팍팍 밀어 주고 신대륙에서 쫙쫙 확장해 가는 시나리오가 더 통쾌했을 것 같습니다.


뭐 어쩌겠습니까. 제 작품 스타일이 '고구마 100개 먹은 듯한 답답함'을 추구하고 있으니 이 길로 가야죠. 현실의 세종대왕님께서 하사해 주신 '어리석은 백성을 위한 글자'를 활용해 하루하루 글을 늘려 나가야죠.


새삼 한글창제에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한글날이 아니고 그냥 연휴 중간에 회사출근한 날입니다만(;;), 아무튼 감사드립니다. 세종대왕님 킹왕짱 만세!



(* 참고로 조선시대에는 만세가 아니라 천세(千歲)였다고 합니다만... 감히 조선의 후예로서 만세(萬歲)를 외치겠습니다. 세종대왕님께는 그럴 만 하니까요.


또한, 요즘 유행하는 외계어(?)는 결코 세종대왕님의 뜻에 어긋나는 게 아닙니다. 일반 백성들이 마침내 그 뜻을 널리 펼치고 있는 시대가 열렸고, 이런 시대에 백성들 본연의 언어로 자유롭게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그 분이 가장 바라시던 일이겠죠. 세종대왕님의 정신을 이어받아 외계어 많이 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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