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글은 서론/본론을 나누지 않고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서술하겠습니다.
저는 TV를 잘 안 보는 편입니다. 뭐 TV가 교육적으로 해롭다구욧 빼애애액 헛소리를 믿는 건 아니고 그냥 나이들면서 잘 안 보게 되네요. 집에 TV가 있긴 하지만 자연스레 코드컷팅(Code-cutting) 대열에 합류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가끔 엄청 히트친 드라마 같은 게 있으면 TV를 볼 때가 있긴 합니다. 저희 와이프가 드라마를 좋아해서 (전원일기 급 옛날 드라마까지 섭렵해서;;) 와이프가 TV 볼 때 같이 시청하기도 하죠.
대략 10년 전에 그렇게 드라마 하나를 봤었는데... 그게 아마 '응답하라 1988'이었을 거예요. 그 앞에 1997, 1994 시리즈가 있었고 마지막 3번째 시리즈로 응팔이 나왔었습니다. 저는 1997과 1994는 거의 안 봤고 1988만 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응답하라 시리즈를 좋아하진 않았어요. [시청률을 위해 달달하게 미화된 추억]이라는 게 너무 티가 났거든요. 모든 출연진이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돈도 많이 벌고 happily ever after로 끝나면 왠지 모르게 고춧가루 뿌리고 싶은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뭐 그렇습니다;;
응팔도 이 '달달하게 미화된 추억'으로 끝나긴 합니다. 주인공 성덕선은 꿈꾸던 대로 스튜디어스가 되었고, 남편은 (중간에 바뀌어서) 비주얼 짱짱한 바둑천재 박보검으로 확정되었으며, 돈이 없어서 힘들어 하던 주인공의 부모님은 농사지으러 '판교'로 가죠. 판교 땅값이 무지막지하게 올랐다는 건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습니다.
결론은 이렇게 happily ever after로 끝납니다만, 중간에 안타까운 일들이 있긴 합니다. 주인공 아버지(성동일 배우)가 희망퇴직 당했을 때 에피소드는 지금도 기억나네요.
주인공의 아버지는 '은행 감사팀 직원'입니다. 은행의 특성상 금전사고가 많이 발생하는데, 한 번 사고가 터지면 한밤중에도 출근하는 열혈직장인(!)이죠.
하지만 IMF의 기운이 연탄까스처럼 스멀스멀 다가오면서 은행의 상황이 악화됩니다. `80년대 직장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고통 - '구조조정'이 도둑처럼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아내(주인공의 어머니. 이일화 배우)는 남편에게 신신당부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꾹 참고 버텨야 된데이. 자식들 결혼할 때까지 무조건 직장 있어야 된다. 아무리 내쫓으려고 난리쳐도 무조건 네네 하고 착 달라붙어 있어라.]
남편도 결의를 다집니다. 젖은 낙엽처럼 착 달라붙어 끝까지 버티겠다는 각오로 눈빛을 빛내며 또 하루 살아남기 위해 직장으로 향합니다.
그러나...
밤 늦은 시간. 은행으로 출근했던 남편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아내가 집 앞 골목으로 달려나가 봅니다.
골목에는 평상 하나가 놓여져 있습니다. 여름이면 동네사람들이 모여 시시콜콜한 잡담을 하던 평상에는 '단 한 명의 남자'가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 앉아 있습니다.
아내와 자식 셋을 책임지며 외벌이로 버텨 온 남자. 아침에 출근한 양복을 그대로 입고 넥타이까지 단정하게 채워 올린 채 평상에 앉아 있는 남자. 눈빛은 망연자실한 듯 멍해졌고 세상 다 산 듯 허탈해 보이지만 허리만큼은 숙이지 않겠다는 듯 꼿꼿하게 펼친 중년의 남자.
그 남자가 허리를 굽히지 않는 것은... 아마도 마지막 자존심 같은 것이겠죠. 세상이 나를 버려도 나는 끝까지 버티겠다, 내 가족들을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흔들리지 않고 어떤 험한 일이든 다 견뎌내겠다. 그런 결의 같은 것이겠죠.
남편의 모습을 본 아내는 대충 상황을 짐작한 듯 결연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런 아내가 남편에게 다가가자... 남편은 눈물까지 말라 버린 듯한 말투로 담담하게 말합니다.
"임자. 나... 희망퇴직 당해버렸네."
여기서 배경음악이 깔립니다. [언젠가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피고 또 지~~는 꽃~ 잎 처럼~]
희망퇴직. 본인이 희망해서 퇴직한다는 말입니다. 말 뜻은 그러합니다.
하지만 이 헬조선에서 통용되는 상당수의 단어들이 그러하듯 희망퇴직은 절대 희망적이지 않습니다. 희망해서 희망퇴직하는 게 아니라 고통스러운 현실을 숨기기 위해 겉으로만 포장하는 잡질일 뿐이라는 것을 모두 다 알고 있습니다.
[희망퇴직 당해버렸네.]
헬조선을 상징하는 '겉포장 개드립'이 많지만. 분명 신입(新入)을 뽑고 신입의 사전적 의미가 뭔지 다들 알면서도 '경력 3년 이상의 신입'을 원하는 게 더 이상 농담이 아닌 세상이 되어 버렸지만.
본인이 원치 않는 퇴직을 강요당하고 그걸 '희망'으로 겉포장하는 개드립은 수많은 개드립 중에서도 단연코 원탑입니다. 말장난으로 은근슬쩍 스리슬쩍 넘어가려는 헬조선의 10선비 문화 중에서도 최첨단을 달리는 말장난입니다.
다른 글에서도 자주 언급했었는데, 원래 모순은 우리 인간의 본질입니다. 내로남불은 인간성 그 잡채죠. 앞뒤 안 맞는 모순은 우리 인간에게 생활필수품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희망퇴직'이라는 말장난의 모순은 그 수많은 모순 중에서도 좀 더 특별합니다. '애를 끊는다'는 말처럼 창자를 토막내는 듯 고통스럽고 처절합니다.
외벌이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중년 남자가 '희망퇴직'으로 내몰렸을 때. 회사의 압박과 업무제외와 온갖 눈치에 견디지 못하고 결국 희망퇴직 당해버렸을 때. 그래서 가족 전체가 몇 단계 아래로 굴러떨어져야 할 때.
모순은 현실의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한 가족을 처절하게 찢어발깁니다.
다행스럽게도, 필자 본인은 희망퇴직을 경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재직중인 회사가 희망퇴직 분위기로 갈 것 같은 낌새가 보이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빤쓰런'을 한 결과, 지금까지는 정리해고/구조조정/희망퇴직 기타등등 상황을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다행스럽게도, 현재 재직중인 회사에서는 향후 10년 가량 별 문제 없을 것 같습니다. 워낙 빠르게 변하는 세상이라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긴 합니다만 최소한 현재 회사의 자금여력은 앞으로 10년 이상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 인생에서는 희망퇴직 당하는 일 없이 직장생활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게 인생입니다. 회사 차원의 구조조정이나 희망퇴직이 없다 하더라도 제가 개인적으로 뭘 잘못해서 짤릴 수는 있죠. 업무상 엄청난 실수를 해서 만회 불가능한 경우가 생길 수도 있구요.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인생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지만. 50살까지 희망퇴직을 잘 피해 왔다고 해서 51살 이후에도 그런 일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야겠죠. 정년퇴직 때까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겠죠.
우리는 모두 자본주의 사회의 부품입니다. 벽 속의 벽돌입니다. just another brick in the wall일 뿐입니다.
그러나... 버텨내고 싶습니다. 벽돌 하나일 뿐이지만 이 자리를 지키고 싶습니다.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여기 박혀 있고 싶습니다.
제가 버티는 동안 누군가는 희망퇴직 당해버릴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아예 취업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할 것이며 또 누군가는 기회조차 없는 것에 절망하여 포기해 버리겠지만. 그래도 저는 버틸 것입니다. 끝까지 '벽 속의 벽돌 하나'로 남기 위해 발버둥칠 것입니다.
제가 버텨야 아내와 자식들이 살 수 있으니까요. 제가 이 벽에 벽돌로 남아 있어야 가족들이 중산층 코스프레를 할 수 있으니까요.
조금 한가한 날. 회사에서 업무와 관련없는 글을 길게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