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조선은 1392년에 건국되었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갈아엎고 새로운 왕조를 세웠죠.
그리고 1592년에 거대한 국란(國亂)을 겪었습니다. 조선을 뿌리부터 뒤흔들고 중반 이후 병림픽의 원인을 제공한 임진왜란이 1592년에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서 잠시만. 역사적으로 우연의 일치인데, 이 조선건국~임진왜란 200년의 딱 중간에 매우 중요한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세계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죠.
바로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습니다.
(물론 아메리카 원주민 입장에서는 다르게 표현하겠지만 일단 기존에 익숙한 표현을 쓰겠습니다.)
서기 기준으로 딱 100년마다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1392년 조선 건국,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1592년 임진왜란.
현실적으로 판단하면 이건 그냥 우연히 숫자 뒷자리가 맞는 것 뿐이고 큰 의미가 없습니다. 100년 단위 사건이라는 것도 우리 인간이 손가락 10개에 맞춰 10진법을 사용하니 뭔가 중요해 보일 뿐, 손가락 숫자가 다른 외계인이 보면 아무 의미 없는 숫자일 겁니다.
(아바타의 나비 족, 드래곤볼 나메크성인 모두 손가락이 8개입니다. 걔네는 팔진법을 사용할 거예요. 그런 지성체가 보기에 100은 단위가 안 맞죠. 우리 인간이 104를 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일 듯 합니다.)
현실적으로는 의미없는 우연이지만... 소설에서는 이런 사소한 우연도 나름 좋은 소재가 됩니다. 소설은 필연적 인과관계를 설명할 필요 없이 암시 또는 복선만으로도 충분하거든요.
100년 단위의 사건들. 이걸 놓고 보면 한 가지 생각이 듭니다.
"조선이 콜럼버스보다 먼저 신대륙을 발견하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
본격적으로 소설 설정 짜기 전에, 우선 현실적인 것부터 따져 봅시다. 콜럼버스의 항해 당시 유럽의 선박 건조 능력과 조선 초기의 선박 건조 능력 등을 비교해 보죠.
2. 본론
(1) 콜럼버스 항해 당시 유럽 선박 : 200톤 급 카락~카라벨
아시다시피 콜럼버스는 원래 이탈리아 인입니다. 이탈리아 연안에서 해적질도 좀 하고 그러다가 갑자기 에스파니아(스페인)로 가서 지팡그(일본) 및 인도로 가는 서회항로를 발견하겠다고 나대나대 나댔죠.
당시 포르투갈이 바스코 다 가마 제독을 보내 인도 항로를 개척했고, 후추 만땅러쉬 한 방으로 투입자금의 60배를 뽑아먹는 기적(!)을 선보이고 있었습니다. 에스파니아 옆에 있는 코딱지만한 나라 포르투갈이 엄청 잘 나가고 있으니 에스파니아 입장에서는 한참 배아팠을 겁니다.
에스파니아는 콜럼버스가 던진 낚시 미끼를 덜컥 물었습니다. 국왕과 여왕 단위에서 낚인 거죠. 역시 낚시 중 제일은 사람낚시. 넌 이미 낚여 있다.
에습 왕궁은 콜럼버스에게 3척의 배를 빌려 줍니다. 작은 2척은 모르겠고 기함(旗艦)으로 쓰인 '산타 마리아 호'가 당시로서는 최신 선박이었던 카락(Carrack)이었다고 합니다. 배수량은 대략 200톤 급.
나중에 에스파니아 무적함대(아르마다)가 구성될 때쯤에는 카락의 크기가 엄청 커져서 1500톤 급 중카락도 있었다고 합니다만, 초창기 카락은 그냥 별 거 없었습니다. 카라벨에 비해 원양항해 능력이 더 좋다는 것 뿐이고 크기로 따지면 45인승 버스 1.5 ~ 2대 정도 크기였다고 하네요.
아무튼 콜럼버스는 이걸로 대서양을 건넙니다. 선원이 부족해서 죄수들을 보충했다는 얘기도 있고, 중간에 선상 반란이 일어날 뻔 했는데 3일만 기다려 달라고 해서 겨우 설득했는데 정말로 3일 만에 육지를 발견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어찌어찌 해서 콜럼버스는 서인도 제도에 도착합니다.
지팡그(일본)을 찾고 인도까지 가겠다는 야망이 지나쳐서 이름을 '서인도 제도'라고 짓긴 했지만 여긴 인도와 아무 관련 없는 땅이었습니다. 결국 (유럽인 기준에서) 신대륙인 게 밝혀졌고, 대륙의 이름도 아메리고 베스풋치가 날름 먹어버려 '아메리카'가 되었습니다.
잠시 옆길로 샜는데, 핵심은 1492년 당시 콜럼버스가 탔던 기함의 배수량이 200톤 급이었다는 겁니다. 이거 하나만 기억하시고 넘어갑시다.
(2) 조선의 선박 건조 능력 : 1400년대 초반에 이미 250톤 급 이상 건조 가능. 화포는 조선 건국 이전에 이미 장착 완료
조선이 판옥선의 포격능력으로 일본 배들을 아작낸 건 콜럼버스의 항해 이후 100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이 때 판옥선은 확실히 콜럼버스의 산타 마리아 호 수준보다 더 컸을 거예요. 노젓기 병사인 격군(格軍)을 포함해서 총 전투원이 150~200명이었다고 하니, 위 45인승 버스 기준으로 봐도 초창기 소형 카락보다는 컸을 겁니다.
그런데 조선 초반의 선박 건조 기술은... 200년 뒤의 판옥선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즉, 콜럼버스의 항해 시점보다 100년 전에 이미 산타 마리아보다 더 큰 배를 건조할 능력이 있었다는 거죠.
고려 말기에 '누선'이라는 배가 있었는데, 이 누선을 세금징수선으로 활용하면서 '맹선'이라는 배가 나왔고, 이 배 위에 전투용 누각을 올린 게 판옥선입니다. 즉, 판옥선의 선박구조 자체는 이미 고려 말 ~ 조선 초에 확정되었고 높이만 높였을 뿐이라는 얘기입니다.
현재 남아 있는 자료로 누선~맹선의 크기를 추정해 보면 최대 배수량이 280톤까지 나온다고 합니다. 조금 줄여서 봐도 대형 누선의 경우 250톤 급은 됐을 거예요. 1392년 조선 건국 시점에 이미 배수량 기준으로는 산타 마리아를 뛰어넘는 대형 선박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선박 종류가 다르다는 문제가 있습니다만 그건 항을 바꾸어 서술하겠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단순히 배를 크게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전투능력'도 출중했어요. 고려 말 ~ 조선 초 시점을 주름잡은 화력덕후 '최무선 장군님'이 계셨거든요.
최무선 장군님이 화약무기를 집중 연구한 덕분에 고려 말부터 화포가 급속도로 발달했습니다. 이후 아들 최해산이 화약 제조 비법을 물려받아 조선 태종~세종 무렵에 계속 신무기를 발명했고, 신기전 및 다양한 크기의 총통이 제작되었죠. 문종 때까지 진행된 이 신무기 사업이 이후 임진왜란 때 '성웅 이순신 장군님'을 만나 국란을 극복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결론적으로, 조선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전부터 대형선박을 건조하고 그걸 화포로 무장시킬 만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물론 콜럼버스의 산타 마리아 호는 당대 유럽 최대 선박이 아니었고 건국 초기 조선이 만들 수 있는 선박의 크기는 산타 마리아 호에 비해 약간 더 큰 수준이긴 했으니 '조선의 선박이 유럽의 선박보다 더 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지중해~북대서양을 넘나들며 이슬람 세력과 싸웠던 유럽 쪽의 선박 기술력이 조선보다 뛰어나긴 했을 거예요.
하지만, 최소한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을 발견한다'는 미션만 보면 조선의 선박 기술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습니다. 본격적인 대항해시대가 시작되기 이전의 선박 기술만 따지면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도 충분히 북태평양을 건널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거리'를 따지면 동아시아에서 북아메리카 쪽으로 가는 게 더 가깝습니다. 유럽에서 대서양을 건너 서인도 제도~남아메리카로 가는 것보다 한국~일본에서 북태평양을 가로질러 북아메리카로 가는 게 더 짧고 간단합니다.
그런데 왜 안 갔느냐? 이건 위 괄호에 쓴 대로 항을 바꾸어 서술하겠습니다.
(3) 선박 종류의 차이 : 평저선과 첨저선
브런치스토리 글에 그림 붙여넣기가 되네요. 참 편리합니다.
위 그림에서 직관적으로 보이듯이, 평저선은 바닥이 평평합니다. 조선이 주로 운용하던 누선-맹선-판옥선 시리즈는 다 평저선 타입입니다.
반면 첨저선은 바닥이 뾰족한 삼각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일본의 배 상당수는 이 첨저선 타입이고, 유럽의 카라벨-카락-갤리온 등도 첨저선 타입입니다.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평저선은 매우 안정적일 것 같습니다.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에서 양 옆으로 흔들리는 게 적어지겠죠. 회전하는 것도 쉬워지고 화포를 쐈을 때 반동도 적을 것입니다. 대신 앞으로 나아갈 때 물의 저항을 더 많이 받을 테니 직선 이동 속도는 떨어질 것 같네요.
첨저선은 바닥이 뾰족한 만큼 물살을 헤치고 가는 힘이 좋을 듯 합니다. 직선 이동 속도는 평저선보다 빠를 겁니다. 먼 거리를 가야 하는 원양항해에서는 두말할 필요 없이 직선 이동 속도가 가장 중요하겠죠.
앞에서 언급한 대로, 조선의 배는 모두 평저선 타입입니다. '연안 항해용'이라는 얘기죠.
조선은 나름 대형선박을 건조할 능력이 있었고 그 선박을 화약무기로 무장시킬 정도로 화력덕후 기질도 있었지만, 연안 항해 수준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갯벌이 많고 수심이 얕은 남해안 일대에서 해안가를 지키고 세금으로 걷은 쌀을 운송하는 수준에서만 선박을 운용했을 뿐, 먼 바다로 나가려는 시도 같은 걸 안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이 첨저선 건조 능력을 갖추지 못했느냐? 그건 아닙니다. 조선 또한 첨저선의 특징을 잘 알고 있었고, 인터넷에 검색해 보면 세종(대왕) 시절에 '신숙주를 시켜 첨저선을 연구하게 했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만들려는 시도도 있었고 기존 평저선에 비해 장점이 뭐고 단점이 뭔지 확인했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조선은 결국 첨저선을 운용하지 않았습니다. 위대한 왕 세종이 승하하신 이후 문종은 일찍 죽어버렸고 10대 초반 소년 단종이 삼촌 수양대군(세조)에게 쫓겨나면서 신숙주가 '변절자'로 승승장구(!)하는 등등의 역사적 이벤트 영향도 있었겠지만, 그게 아니라도 그냥 연안항해 수준에서 만족했던 것 같습니다.
즉, 조선은 먼 바다로 나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연안을 잘 지키고 유사시 연안에서 직접 보급받을 수 있는 평저선 타입 전투함만 보유했고 먼 바다로 항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교역이든 전쟁이든 나라 밖으로 크게 뻗어가려는 계획 자체가 없었습니다.
반면 포르투갈~에스파니아 같은 남부 유럽 국가들은 어느 정도 원양항해를 하면서 계속 그에 적합한 선박 타입을 개발했습니다. 첨저선은 기본이었죠. 느린 평저선으로 가면서 계속 식량 소비하고 그 식량을 싣기 위해 적재공간이 줄어들고 적재공간이 줄어들면서 막상 중요한 교역품이나 무기는 얼마 못 싣는 악순환을 방지하려면 조금이라도 빠른 첨저선을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이 차이는 아주 사소했습니다. 선박을 연안항해용으로 쓰면서 만족하느냐 / 조금 먼 바다로 나가 지중해~대서양을 넘나들어 보느냐 하는 정도의 차이였고 시작 단계에서는 거의 비슷했습니다.
그 차이가 신대륙 발견 후 특이점을 지나면서 어느 순간부터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이 되어버렸죠. 유럽 쪽 선박이 점점 더 커지고 화약기술과 제련기술이 발전했으며 강철이 개발되고 1만 톤 넘는 전열함이 나오고 결국 금속 선박이 나왔으며 화약기술의 극한으로 기관총이 개발되는 동안, 조선은 19세기 중반까지 화승총 레벨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현실은 그러했습니다. 지금 와서 그 과거를 바꿀 수는 없죠.
(4) If...
현실에서는 과거를 바꿀 수 없지만 소설적 상상력으로는 뭐든 가능합니다. 조선의 과거를 바꾸는 것도 가능하죠.
만약 조선이
1) 먼 바다를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2) 원양항해에 적합한 첨저선 타입 대형선을 만들었으며
3) 북쪽 훗카이도-사할린 지역을 지나 중간중간의 섬에서 보급하면서 동쪽으로 나아가 결국 알래스카를 통해 북아메리카로 상륙한다면
조선은 신대륙을 선점했을 겁니다. 코쟁이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대륙 동쪽 해안에 상륙하기 전에 이미 서쪽 해안 지역에 도시를 만들고 쌀농사를 지으며 아메리카들소를 사냥하고 길들일 수 있었을 겁니다.
(물론 아메리카 원주민들 입장에서는 기분 좋을 리 없겠지만... 기왕이면 같은 황인종이 먼저 오는 게 좋잖아요? 아님 말고;;)
누군가 조선시대 초반으로 가서 살짝 밀어 준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인프라는 이미 갖춰져 있었어요. 대형선박 건조 능력, 화포 기술, 조직화된 군대 모두 다 있었습니다.
[조선의 대항해시대]는 결코 허황된 얘기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렇게 조선이 먼저 대항해시대를 시작한다면, 결국 에스파니아-영국 등 유럽 열강들과 부딪히게 될 겁니다. 유럽은 아메리카 동쪽에서 서쪽으로 확장해 오고 / 조선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확장하다가 결국 육지와 바다 양 쪽에서 부딪히게 되겠죠.
유럽 전체와 싸우는 조선 해군(수군). 당연히 승리해야겠죠. 우리 한반도 사람들은 화력덕후(!)니까요. 또한, 세계 해전사에서 유일무이하게 '해상 학익진'을 펼쳐 화력섬멸전을 선보이신 성웅을 탄생시킨 나라니까요.
* 사실, 저는 이 시나리오로 약 15편 가량의 이야기를 썼었습니다. 대략 4년 전 일이네요.
그런데 쓰다가 중단했었습니다. 당시에는 일단 조회수를 늘리고 싶었고, 그래서 19금 쪽으로 확장할 만한 소재로 갈아탔었거든요.
지금 다시 정리하다 보니 쓰고 싶긴 하네요. 언젠가는 쓸 겁니다. 다른 모든 작품이 그렇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