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최근에 저 자신도 잘 모르는 과학적 설정을 읊었었는데, 오늘은 좀 가볍게 가려고 합니다.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할 만한 'vs 놀이', 그 중에서 '외계인 vs 지구인' 싸움을 주제로 이런저런 얘기 해 보겠습니다.
외계인 vs 지구인.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등장하는 대립 구도입니다. 대부분 지구인이 이기죠. 영화 드라마 보고 돈 내는 소비자가 모두 지구인이니 당연한 결론이긴 합니다;;
물론 외계인을 쉽게 이길 수는 없습니다. 지구인 측이 온갖 개고생을 하면서 간신히 간신히 이겨야 하죠. 지구인 수십억 명이 몰살당하는 건 기본(?)입니다.
이렇게 개고생 한 끝에 간신히 지구인 측이 승리하는데, 대부분 '끝판왕 무기'를 동원합니다. 우리 지구인이 개발한 무기 중 가장 강력하고 다른 재래식 무기들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넘사벽 에너지량을 자랑하는 끝판왕 무기. '핵폭탄'을 사용합니다.
즉, 지금까지 나온 영화와 드라마에서 [핵폭탄 히밤쾅]은 외계인을 처단(!)하는 최후 최강의 수단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솔직히 핵폭탄으로도 안 되면 뭘로 막아야 할지 답이 없기도 하죠.
그런데 말입니다.
과연 현실에서 외계인 상대로 핵폭탄 히밤쾅 시전하면 이길 수 있을까요? 외계인 전함이 웅장하게 박살나면서 지구인 승리를 축하할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얘기하면 저는 [핵폭탄으로 외계인을 막을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저 또한 지구인이지만 외계인이 압도적으로 강할 것 같아요. 우리 지구인은 끝장났고 가망이 없습니다. Endgame 당할 겁니다.
암울한 결론이긴 하지만... 그래도 하나씩 따져 보겠습니다.
2. 본론
(1) 외계인이 지구에 왔다면 그들의 기술력은 핵융합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을 것
제가 아직 웹소설 작가로 데뷔하기 전이고 고시생으로 위장한 게임중독 백수 폐인이던 시절, 당시 친구 고시생들과 이런저런 농담따먹기를 하다가 외계인 얘기가 나왔습니다. 그 때 제 학교선배님께서 이런 얘길 하시더군요.
"외계인이 지구에 왔으면 그 자체로 끝난 거야. 우주를 넘어올 과학기술력이 있는데 어떻게 싸우냐. 여기 왔다는 것만으로도 그냥 항복해야 돼."
저 말 들은 게 대략 20년 전(...)이고 저 말 하신 선배님은 부장검사를 거쳐 변호사가 되셨으며 저도 지천명을 바라보는 회사원으로 살고 있습니다. 아마 선배님 본인은 저 말 했다는 걸 잊어버렸을 수도 있구요.
다만, 저는 저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웹소설 작가 됐겠죠;;
아무튼 저 논쟁을 할 당시에는 그저 문송한 사람들끼리 밥 먹고 할 일 없어서 농담으로 한 얘기였습니다만, 이제 웹소설 설정을 짜는 단계에서는 조금 진지하게 따져 봐야 합니다. SF로 위장하려면 문송한 수준에서도 각종 공식과 과학적 가설들을 덧붙여 줘야 하거든요^^.
자, 그럴듯하게 덧붙여 봅시다.
외계인이 지구에 왔다는 건 그들이 이미 '우주항해능력을 갖추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금성이나 화성 같은 가까운 행성에서 왔다면 좀 다르겠지만, 최근에 지구인들이 금성/화성 정도는 탐사하고 있는 수준이라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어지간해서는 태양계 내부의 외계인이 쳐들어오는 걸로 설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최소한 알파센타우리 항성계 정도에서는 와 줘야 하고, 현실성을 높이려면 몇백~몇천광년 떨어진 곳에서 와야 합니다.
이렇게 우주를 항해하려면 크게 두 가지 기술 중 하나를 확보해야 합니다. 둘 다 확보할 수도 있구요.
첫째는 워프(Warp). 풍선을 누르듯이 우주의 시공간을 접어서 단숨에 시공간을 건너뛰어야 합니다. 작품에 따라서는 점프(Jump)라고 하기도 하더군요.
둘째는 그냥 겁나 빠른 속도. 워프 없이 온다면 당연히 빛보다 빨라야 하고, 워프랑 섞어 쓰는 경우에도 아광속 급 속도를 보유한 경우가 많습니다. 통상항해 속도만으로도 빛의 50% 속도는 내어 줘야 외계인 전함이라고 할 만 합니다.
이 중 워프 기술로 시공간을 왜곡했다면... 그 주위 시공간도 심하게 찌그러질 겁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지구 근처에 웜홀-화이트홀이 생기면 지구는 사뿐히 찢겨질 것 같네요. 금성 수성 다 소멸되고 태양까지 위험해질 겁니다.
통상항해 속도가 빛의 50% 수준에 이른다면... 운동에너지가 어마어마하게 증가합니다. 운동에너지 계산법이 1/2*mv제곱(제곱지수 표시가 안 되네요. 그냥 v의 2제곱입니다)인데, 속도가 초속 15만km까지 올라간다는 얘기니까요.
인류가 만들어 낸 추진기관 중 가장 강력하다는 새턴V 로켓이 대략 초속 12km 조금 넘길 겁니다. 지구 중력을 탈출하는 속도가 초속 11.7km인가 그러니까 그것보다는 조금 빠르겠죠. 최대 속도를 초속 15km라 가정할 경우... 광속의 50%로 항해하는 우주선은 새턴V로켓보다 1억배(1만*1만) 더 강한 운동에너지를 갖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방대한 운동에너지로 움직이다 보면 '티끌만큼 작은 물체'에도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됩니다. 물리학의 기본이 작용-반작용 법칙인데, 무시무시하게 빠른 속도로 날아가던 우주선이 티끌만한 물체와 부딪히면 그 부딪힌 부위에는 새턴V로켓의 추진력보다 1억배 강한 반작용이 온다는 얘기죠.
결국 지구 근처에 도착한 우주선은
- 워프 기술로 시공간을 왜곡하는데 그 웜홀-화이트홀 주위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고
- 통상항해 속도가 대략 광속의 50%는 되고 새턴V로켓에 비해 동일 면적 대비 1억배 이상의 운동에너지를 갖고 있으며
- 그 엄청난 운동에너지로 다른 물체와 부딪혀도 멀쩡히 버텨내는 우주선 외벽 또는 방어막을 보유한
상태입니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전투함'이겠죠. 군인과 전투무기와 물자를 가득 실었으니 크기도 엄청 클 겁니다. 새턴V로켓을 사용했던 아폴로 프로젝트 때보다 몇백 배 더 큰 덩치의 전투함이 올 겁니다.
이게 지구에 왔다면 이미 게임 끝입니다. 모든 지구인들이 온 우주의 기를 끌어모아 간절히 기도해도 물리칠 수 없습니다. 핵폭탄 따위는 아주 간지럽게 튕겨내 버릴 겁니다.
또한, 이 정도의 에너지를 활용할 수 있다면 지구인들을 전멸시키는 것도 아주 쉽습니다. 소행성대에 있는 수십 킬로미터짜리 암석덩어리를 지구 쪽으로 날려 버리면 끝입니다. 직경 10km 수준의 소행성 하나만 떨어져도 공룡 최후의 날 수준으로 암울해질 것이고, 3~4개 맞으면 지구인의 95%는 한 달 내에 다 죽습니다. 쓰나미에 죽든 굶어죽든 병 걸려 죽든 아무튼 거의 다 죽습니다.
현실적으로는 그러합니다.
(2) 그렇지만 우리는 외계인을 물리쳐야 해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외계인 전투함이 지구 궤도까지 왔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endgame입니다만... 그래도 창작물에서는 외계인을 물리쳐야 합니다. 창작물을 읽고 듣고 보는 소비자가 지구인인데 당연히 지구인이 이겨야죠. 안 그러면 안 팔립니다.
외계인을 이길 방법. 하나씩 생각해 봅시다.
1) 방어막 제거 + 핵폭탄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건 [방어막 제거]입니다. 외계인의 우주전함이 킹왕짱 강하고 아광속 비행을 할 때 우주의 부스러기에 부딪혀도 잘 버텨내는 건 결국 모든 공격을 다 무력화시키는 방어막 때문일 것이니, 방어막만 없애면 그 다음에는 인간의 핵무기로도 제거할 수 있다는 설정입니다.
이 방어막 제거 설정으로 가는 게 '인디펜던스 데이'입니다. 방어막 제거 전에 우선 외계인의 우주선에 컴퓨터 바이러스를 심어 주고, 그 바이러스 투척용으로 외계인 전투기를 오래 전에 얻어 뒀다는 뽀록(럭키) 설정도 추가하고, 외계인 전투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천재 지구인 조종사(윌 스미스)도 투입합니다. 운이 겹치고 겹쳐서 외계인 우주선의 방어막을 날려버리죠. 핵폭탄 히밤쾅은 거들 뿐.
'어벤저스'에서는 방어막 없이 그냥 핵폭탄이 통하는 설정으로 나오는데, 대신 웜홀을 열 때 시공간 왜곡이 전혀 없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웜홀 기술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시공간을 건너뛰기만 하고 건너온 이후 맞짱뜨는 건 지구인과 크게 다를 바 없죠. 윈터솔저 급 총질러가 나오면 기관총으로도 때려잡습니다.
(이후 '닥터 스트레인지'가 나오면서 마법을 써서 시공간 이동 문을 만드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어벤저스 1편의 외계인들도 마법과학 같은 걸 쓴다는 설정으로 이해해 주면 될 것 같습니다.)
제 예전 소설에서도 방어막 제거 방식을 쓰긴 합니다. 아무래도 이게 제일 쉽긴 하더군요. 외계인들의 전투함에 바이러스를 잠입시키는 방법은 조금씩 다르지만 아무튼 컴퓨터 교란시켜서 방어막을 끄거나 / 동력을 멈춰 버리면 외계인도 별 거 없습니다.
다만, 이렇게 가려면 일단 외계인의 전투함에 잠입해야 합니다. 킹왕짱 강한 외계인들이 의외로 보안의식은 허술해서 지구버러지들이 마음대로 돌아다니도록 방치했다거나 하는 설정구멍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전투함 잠입 + 방어막 제거 외에 좀 더 나은 방법이 없을까요?
2) 거대로봇
방어막 제거보다 더 재밌는 방식이 뭘까?
이 고민의 결과물이 '거대로봇'일 겁니다. 뭔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킹왕짱 강한 초합금 기술이 개발되고, 그 초합금으로 만들어진 거대로봇은 핵폭탄 정도는 가뿐하게 씹어먹고 우주를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외계인의 초합금 전투함과 로봇들을 아작내 버립니다. 단 한 대의 거대로봇이 외계인 군단을 소멸시켜 버리죠.
거대로봇 중에서는 '그랜다이저'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외계인 왕자 듀크프리드가 뜬금없이 지구인(버러지)들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우는 이야기. 한국에서는 턱 긴 아줌마의 발작으로 상영중단되었다는 카더라 소문이 있지만 아무튼 재밌었습니다.
그런데 창작자 입장에서 볼 때 거대로봇은 한 가지 약점이 있습니다. '글자로만 서술하는 웹소설 작가들은 제대로 묘사하기 어렵다'는 약점이죠.
기본적으로 메카닉 계통은 만화/애니메이션 등으로 시각화 해 줘야 합니다. 소설만 쓰는 작가들에게 메카닉물은 다루기 어려운 영역입니다. 최소한 기본 컨셉 정도는 삽화로 추가할 능력이 없다면 메카닉물은 자제하는 게 좋습니다.
결국 남는 것은 '마법 판타지'입니다. 과학에 마법을 접목시킨 마법과학을 등장시키고, 그 마법과학으로 외계인의 전쟁과학을 뛰어넘는 거죠.
3) SF에 신화와 판타지를 섞어 주는 방식
외국에서는 SF와 판타지를 구별하지 않는다고 하는데요. 저도 이것저것 글 쓰다 보니 SF에 판타지를 접목시키는 게 자연스럽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현재 지구의 순수 과학기술만으로 외계인을 물리치려고 하면 결국 외계인이 허술해져야 합니다. 인간을 아득히 뛰어넘은 첨단기술을 갖고 있으면서도 의외로 보안이 허술해서 지구인에게 공략당해야 합니다.
이것보다는 '인간이 과학기술은 후달리지만 정신력이 극도로 좋아서 결국 다른 차원의 힘을 끌어쓰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하는 게 더 낫겠죠. 최소한 설정에 동의하기만 하면 작품 내에서의 핍진성과 개연성을 확보하는 것은 더 나아집니다.
물론 설정이 좀 복잡해지는 건 감수해야 합니다. 특히 '순수 판타지'와 비교하면 많이 복잡해집니다. 순수 판타지에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파이어볼 펑펑 날릴 수 있고 엘프 오크 출현시켜서 붕가붕가 코와붕가도 할 수 있지만(응?), SF와 결합된 현대판타지에서는 이것저것 복잡한 설명을 추가할 수 밖에 없습니다.
복잡한 설명 때문에 상업적으로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지긴 합니다만... 저는 이 방식을 선호합니다. 꾸준히 쓰다 보면 조금씩 봐 주시는 독자님들이 늘어날 겁니다. 그런 기대를 갖고 살아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