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경력직이라면 ‘가후’처럼 – 중
(앞 편에 이어 서술합니다.)
3) 벤처기업 ‘장수’
장제의 조카 장수. 장제가 죽은 후 그의 군사력을 (미모의 과부댁인 숙모님을 관리(?)할 책임과 함께) 물려받은 남자 장수.
장수가 오너 되기 전, 장제 휘하에 ‘가후’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각곽사가 워낙 막장짓을 하니 바로 장제 밑으로 옮겼을 것 같긴 하지만, 장제 활약상은 거의 나오지 않으니 그 밑에 가후가 있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일단 장제는 ‘군량을 얻기 위해 형주 땅을 공격하다 화살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형주 땅이면 만년 우승후보 메이저 군주 [유표]의 땅인데 이걸 군량 좀 얻겠다고 들이친 패기(!)라니… 화살 안 맞았어도 오래 살긴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각-곽사의 친구였던 장제는 허무하게 죽었고, 그의 조카 장수는 유표의 지원을 받아 완 지역에 정착합니다. 유표는 (나중에 유비에게 신야성을 줬듯이) 장수를 형주 북쪽에 배치해 몸빵으로 사용하려 했을 것이고, 장수는 당장 군량 마련할 땅이 필요하니 유표 지원을 받아들였을 겁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긴 하죠? 유표 입장에서는 ‘조금 전까지 자기 땅 공격하던 도적 무리를 받아들인 형국’이고, 장제 입장에서는 ‘자기 삼촌을 죽게 만든 원수의 지원을 받은 형국’입니다. 둘 다 이해관계가 맞았다고는 하지만 그 이전의 사건이 무척 애매하긴 합니다.
이건 장제 죽음에 대한 기록이 뭔가 잘못되었거나 / 가후 급 책사가 중간에 나서서 유표와 장수를 말빨로 구워삶았을 때 가능한 상황이긴 합니다만… 이것까지 다루면 ‘소설’의 영역이 되겠죠. [이직의 기술]에서는 살짝 패스하도록 하겠습니다.
벤처기업 장수. 유표의 지원을 받아 설립한 조그만 회사. 메이저 급 우승후보지만 절대 위험한 일은 안 하려 하는 유표가 신사업(?)에 발 담궈 보려고 찔끔 지원한 신생기업.
이 벤처기업에서, 가후는 그의 ‘단기책략가 능력’을 최대한으로 펼칩니다. 이후 위나라 무제(武帝)로 추앙받는 ‘조조’를 처발라 버리죠. 그것도, 두 번씩이나.
삼국지 관련 콘텐츠에서 자주 나오는 얘기인데, 조조를 상대로 두 번 연속 승리하고 패배를 당하지 않은 세력은 ‘책사 가후가 주도하던 장수 세력’이 유일합니다. 인간성은 오락가락하지만 전투책략에 있어서는 킹왕짱이었던 조조를 상대로 2연승하고 패배가 없었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대단합니다.
게다가, 조조의 첫 패배는 상당히 치명적이었습니다. 조조의 큰아들이 죽어버렸거든요.
(물론 조조는 나중에 제사지내면서 호위대장 전위가 죽은 게 더 슬프다고 통곡했지만… 조조 스타일 아시잖아요. 큰아들 죽은 게 더 슬펐는데 겉으로 연기했다고 봐야죠.)
조조에게 항복했다가 말 뒤집고 (과부댁이랑 놀아나는 틈을 타) 야간기습하여 큰아들+조카+호위대장 끔살. 일단 도망쳤다가 다시 쳐들어 온 조조를 상대로 ‘위격전살지계를 뒤집는 허유엄살지계’를 펼쳐 역관광.
거기에 보너스로 퇴각하는 조조 뒤통수를 치는데, 처음에는 방비가 잘 되어 있을 테니 후방기습해도 실패한다고 말렸다가 / 정작 실패하니까 ‘이번에는 다시 공격하면 이깁니다’라고 하여 정말로 공격 성공시켜 버립니다. 이 정도면 [조조를 갖고 놀았다]고 할 만 하죠.
‘벤처기업 장수’에 재직하던 시절, 가후는 레전설 찍습니다. 이후에 조조가 원소를 잡고 천하의 패왕으로 등극하면서 이 시기 가후의 레전설도 함께 떡상합니다.
가후 본인도 ‘벤처기업 장수’가 마음에 들었을 겁니다.
코딱지만한 좋소기업이긴 하지만 가후가 내는 책략을 오너 장수가 200% 신뢰해 줍니다. 가후의 말이라면 다 믿어 주고 오너 본인이 직접 실행해 줍니다. 마음에 들 수 밖에 없죠.
[남자는 자신을 알아 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하죠. 극단적으로 본인 생존만 추구하는 가후 스타일 상 목숨 바치는 짓은 안 했겠지만, 최소한 장수를 위해 자신의 모든 능력을 다 발휘하려는 노력은 했을 겁니다.
으음, 그런데 말입니다.
좋소기업은 결국 한계가 있습니다. ‘벤처기업 장수’가 아무리 가족 같은 분위기라고 해도 결국 좋소기업입니다. 사람이 몇십만 단위로 죽어 나가는 난세(亂世)에서 결국 휩쓸려 버리고 말 뗏목조각일 뿐입니다.
가후 정도 되는 책략가가 이 한계를 모를 리 없습니다. 벤처기업에서 세상을 뒤바꿀 아이디어로 신제품 개발하지 않는 한, 기존 대기업들의 장벽을 넘을 수 없고 결국 말라죽을 뿐이라는 걸 당연히 알았습니다.
가후는 M&A를 제안합니다. 나름 떡상한 본인을 포함하여 ‘벤처기업 장수 전체’를 좋은 값에 팔자고 제안합니다.
여기서 또 한 번, 가후의 레전설이 나오는데요. [주식회사 조조 측에 벤처기업 장수를 매각한다]는 레전설입니다.
4) ‘주식회사 조조’로 M&A
[조조의 큰아들을 죽였고, 조카를 죽였으며, 호위대장을 죽였다. 조조 본인도 화살을 맞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이어진 전투에서 또다시 조조를 역관광 보내버렸다.]
이게 가후의 실적입니다. ‘벤처기업 장수’에 근무하면서 당시 혜성처럼 떠오르던 ‘주식회사 조조’를 상대로 승리한 결과들입니다.
그리고, 당시 벤처기업 장수를 지원해 주던 유표 쪽은 조조와 적대적이었습니다. 황제를 끼고 돌며 [너 역적!]을 남발하던 조조는 원소-손책-유표 라인에 포위되어 있었고, 원소와 싸우다가는 언제 손책/유표에게 뒷치기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에 하나 더. ‘조조’라는 개인은 그 능력과 무관하게 가끔 정신줄 놓을 때가 있습니다. 서주대학살을 2번이나 저질렀고 반란 꾀하는 자들은 9족을 멸해 버리는 걸로 볼 때, 자기 큰아들 죽은 걸 문제삼아 나중에 복수할 가능성이 매우매우 높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벤처기업 장수를 조조에게 팔아먹는다? 유표도 아니고 원소도 아니고 손책도 아닌 조조에게 항복해 그 세력으로 편입된다?
이건 발상의 전환 수준을 넘어서는 행동입니다. 자칫하면 몇 년 뒤에 조조에게 뽷 찍혀서 모가지 썰릴 수도 있을 만큼 위험한 짓입니다.
그런데… 가후가 장수에게 이 M&A를 제안합니다. “지금 우리 좋소기업 수준으로는 독립경영 어려우니 대기업에 편입되어야 하는데, 원소 말고 조조 쪽으로 갑시다.” 라고.
가후 말이라면 다 들어 주는 장수조차도 처음에는 망설입니다. 너무 파격적인 제안이라 감히 실행할 엄두를 못 냅니다.
하지만, 결국 가후의 말이 맞았습니다. 조조가 원소를 처바르고 천하의 패왕으로 등극했으니까요.
당시 가후가 장수를 설득할 때 조조-원소를 비교하며 각자 장단점 따지는 게 있는데, 이건 생략하겠습니다. 나관중 작가님의 저작권(?)은 소멸했지만, ‘이직의 기술’ 쓰면서 괜히 다른 글 과다인용할 필요는 없겠죠.
‘미래의 승리자’를 예측하고 그 승리자가 될 세력에 M&A제안을 하는 것. 가후의 혜안(慧眼)은 거의 예언 수준이었습니다. 조조 측 책사 ‘곽가’가 “손책 저 어린노무 쉥키는 저러다 곧 죽을 겁니다.”라고 얘기하는 것과 맞먹을 정도로 탁월했습니다.
물론… 조조 아들 ‘조비’가 장수를 겁나 갈궈서 죽게 만들었다는 것까지 예측하지는 못했습니다. 거기까지 예측하는 건 노스트라다무스도 불가능합니다. 당장 조조 세력에게 짓밟히지 않고 그 세력에 편입되어 평안한 나날 보냈다는 걸로 만족해야죠.
아무튼, 이리하여 가후는 ‘주식회사 조조’에 편입됩니다. 그 이후로도 ‘책략성공률 100%’를 자랑하며 사기/협잡/기만전략의 달인이라는 점을 계속 증명해 주죠.
5) 승계 분쟁의 승리자
조조 밑으로 들어간 가후. 그는 마초-한수 이간질 등등에서 소소하게 활약하다가, 조조 아들 간 ‘승계 분쟁’이 일어날 때 다시 한 번 주목받습니다. (원래 둘째였는데 첫째가 가후 때문에 죽으면서 ‘남은 자식 중 첫째’가 된) ‘조비’를 도와 주면서 주목받게 되죠.
조조는 네 아들(조비, 조창, 조식, 조웅) 중 ‘조식’을 가장 아꼈다고 합니다. 조식은 한ᆞ당 7대 문인에 들어가는 문학가로 엄청 똑똑했다고 하구요. ‘양수’를 비롯한 많은 책사들이 조식 편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후는 ‘조비’를 돕습니다. 조비가 먼저 가후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고, 가후 본인도 이 승계 분쟁에서 항렬이 더 높은 조비를 밀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듯 합니다.
가후가 조비 도왔다고는 하는데, 그리 복잡한 책략을 쓴 건 아닙니다. 딱 두 가지를 했을 뿐.
첫 번째. 가후는 조비에게 ‘기본에 충실하라.’는 취지의 조언을 합니다. “어차피 조식만큼 똑똑해질 수는 없으니 괜히 시 짓는 걸로 따라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조조 걱정이나 많이 해 주고 무난하게 행동하면 자동빵으로 니가 후계자 될 거다”라는 말을 직설적으로 하지 않고 적절히 잘 포장해서 해 주죠.
두 번째. 이게 또 레전설인데요.
조조가 가후에게 후계자 관련 의견을 묻자, 가후는 잠시 대답을 안 하고 딴 생각 하는 척 합니다. (가후에게 2연패 당했던) 조조가 재차 물었을 때, 가후는 “잠시 유표와 원소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돌려 말합니다. 즉, [첫째 말고 그 아래 항렬 아들을 지목했다가 폭망한 2명]을 간접적으로 언급한 거죠.
원래 싸이코패스였는데 가후의 잔꾀에 큰아들을 잃었던 조조. 역시 가후의 잔꾀에 큰형님을 잃고 그것 때문에 열폭하여 당시 가후 오너였던 ‘장수’를 조낸 갈궈 자살하게 만든 또 한 명의 싸이코패스 조비.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가후의 말에 감탄합니다. 결국 조조는 킹왕짱 자리를 조비에게 물려 주고, 조비는 가후에게 삼공(三公) 중 하나인 ‘태위’ 벼슬을 내리는 것으로 감사 인사를 대신합니다.
(가후는 이 태위 벼슬을 오래 안 하고 금방 물러난 뒤 조용히 살다 갑니다만, 이건 다음 챕터에서 얘기하겠습니다.)
제가 ‘프로이직러의 정신적 교범’으로 꼽은 남자 가후. 그의 인생을 짧게나마 요약해 봤습니다.
삼국지에서는 조연 중 1명이지만 ‘위 무제 조조를 2연타로 역관광 보내는 책사’로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조연이었고, 군주 6명을 모시면서도 항상 일정한 지위를 유지하다가 천수를 누리고 자연사한 책략가. 그러면서도 본인의 큰 뜻을 펼치는 일은 절대 없었고 꼼수와 사기 협잡 책략만 꺼내 놨던 지략가.
가후에 대해 나쁘게 평가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모 게임사에서는 가후의 매력을 매우 낮게 매기죠. 제갈량 주유 사마의 순욱 등이 ‘인성과 지략을 겸비한 군사’로 묘사되는 반면, 가후는 ‘머리만 좋고 인성에 문제 있는 남자’로 나옵니다.
그렇긴 한데… 회사 6번 옮긴 프로이직러 입장에서 본다면…
가후는 진정 ‘최고의 프로이직러’입니다. 소속 회사가 바뀌는 수준에서 이직하는 게 아니라 까딱 잘못하면 목이 달아나는 난세(亂世), 그 혼란스러운 시대에 자기 목숨을 걸고 이직에 성공했으며 이직한 회사에서도 처신 잘 했던 경력직 회사원입니다.
제가 볼 때, 가후는 경력직 이직러의 한계를 명확히 알고 그 한계 내에서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사람이 몇백만명씩 죽어 나가는 난세에서 ‘끝까지 생존한다!’는 최고의 가치를 온 몸으로 실현한 사람이었습니다.
가후의 장점. 챕터를 바꿔서 하나씩 짚어 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