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경력직이라면 ‘가후’처럼 – 하
(앞 편에 이어 서술합니다.)
6) 경력직이 본받을 만한 가후의 장점
이 챕터는 앞에서 설명했던 역사적 사실을 제 나름대로 재구성한 결론이 되겠네요. 우선, 전체 목차를 요약하고 각 목차 별 내용을 다시 서술하겠습니다.
① 본인 지위에 맞지 않는 전략은 언급하지 않는다
② 내부 정치질을 하지 않는다
③ 흠 잡힐 일이나 말을 삼가한다
④ 항상 자신의 전문성을 갈고 닦는다
⑤ 본인의 약점을 스스로 인식하고 자리 욕심을 버린다
⑥ 요약하면 ‘가늘고 길게’. 그러나 이게 가장 어렵다
목차 별로 하나씩 보죠.
① 본인 지위에 맞지 않는 전략은 언급하지 않는다
삼국지에서는 화공/수계/내분/허보/혼란/욕설(?) 등등 책략이 많습니다만, 소위 ‘대국적 구상’ 내지 ‘대전략’이라고 할 만한 큰 구상도 자주 나옵니다.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 주유-노숙의 천하이분지계, 순욱-곽가의 협천자(挾天子) 등등. 10년 이상을 아우르는 대국적 판단이 꽤 많습니다.
저 대전략보다는 약간 아래지만, ‘다른 세력을 활용하는 외교전략’도 상당히 방대합니다. 순욱의 구호탄랑/이호경식, 제갈량의 촉오동맹, 그 촉오동맹의 뒤통수를 치고 형주 땅을 집어삼키는 손권의 위오동맹, 원소가 추진했던 ‘반동탁연합’ 및 (실행은 안 됐지만) ‘조조 대포위 연합’ 등등. 외교전략이 어지간한 10만 대군 이상의 가치를 발휘할 때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가후는… 이런 대국적인 단위의 책략을 전혀 제안하지 않았습니다. 이각곽사 시절에 잠시 협천자 비슷한 걸 구상하는 듯 했지만 오너들이 워낙 캐막장이라 살포시 씹혔고, 그 뒤로는 (대전략보다 한 단계 아래인) 외교전략도 제대로 내지 않았습니다.
유일한 외교전략이라고 할 만 한 게, ‘주식회사 장수를 원소에게 팔까 / 조조에게 팔까’ 하는 것 중 조조 쪽 M&A를 선택한 것 뿐입니다. 그 외에는 그저 눈 앞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모략(謀略)밖에 없었습니다.
이게 잘못된 걸까요? 난세를 살아가는 책사(策士)가 대국전략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눈 앞의 일에 대한 협잡질만 고민하는 게 잘못된 걸까요?
관점에 따라서는 잘못됐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새로운 회사에 이직해 온 경력직’에게는 아닙니다. 경력직 입장에서는 저게 최선의 선택이에요. 눈 앞에 닥친 일에 대해서만 고민하고 회사의 큰 방향성 같은 건 창업공신과 오너 급이 정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 그게 경력직이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낄끼빠빠 정신]이겠네요. 낄 데 끼고 빠질 데 빠지는 것. 본인이 경력직 프로이직러라는 걸 감안하여 의견 낼 수 있는 것만 내고 빠질 상황이면 바로 빠지는 것. 그게 ‘가후의 장점’이었습니다.
너무 삼국지 얘기만 한 것 같은데, 잠시 현실 얘기를 해 보죠. 제가 다녔던 직장 중 한 곳의 대전략 관련된 겁니다.
2010년대 초반, 한 대기업집단에서 ‘10년 장기 전략’을 선포합니다. (어차피 다 지난 일이니 해당 기업 이름 밝히면) CJ그룹의 10년 장기 전략. [2020 그레이트 CJ]라는 전략이었습니다.
그레이트 다간도 아니고 그레이트 마징가도 아니고 그레이트 씨제이. 이게 뭐였냐 하면… 대략 모든 계열사가 매년 24%인가 26%인가 아무튼 그 정도 성장하면 3년에 2배 / 9년만에 8배 / 10년째에는 9배 이상 성장하게 되고, 그러면 2020년에 그룹 전체 총 매출 100조 원 규모의 어마무시 킹왕짱 대기업집단이 된다. 뭐 그런 거였습니다.
구체적인 성장계획? 아몰랑. 지난 10년 간 일부 계열사에서 3년 2배 성장을 해냈으니, 이제 전 계열사가 다 같이 해 보자.
시장규모? 아몰랑. 각 계열사에서 잘 알아봐. 시장규모가 성장속도 못 따라오면 적당히 관련산업 M&A 하면 되잖아.
당연한 얘기 하나 하면, 매출 1천억 회사가 10년 만에 매출 1조 달성했다고 해서 다음 10년 안에 매출 10조 되는 거 아닙니다. 작을 때 성장속도와 일정 수준 이상 넘어갔을 때 성장속도는 다르고, 기업 성장은 %로 비율성장하는 게 아니라 일정 규모 단위로 성장합니다. 덩치가 커질수록 %로 표시되는 비율은 줄어들어요. 그게 상식입니다.
그리고, 어떤 시장이든 그 ‘전체 시장 규모’가 정해져 있고 해당 산업 종사자들이 아무리 발악해도 점유율 100%면 끝입니다. 1조원 시장규모에서 이미 5천억 매출 내는 회사가 있다면, 이 회사는 2배 성장으로 끝나요. 여기서 9배 성장 할 수가 없습니다.
M&A로 해결하라고? M&A 성공률이 25% 수준인 게 왜 그럴까요? 잘 모르는 산업에 덜컥 발 담궜다가 폭망하는 사람들 보면서 뭔가 배우는 게 없나요? 게다가, ‘특정 목표’에 사로잡혀 조급하게 M&A 추진하면 상대방이 가격 올려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2020 그레이트 CJ는 폭망했습니다. 그리고, 대략 2014년부터 이미 대다수 사람들이 폭망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어요.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무조건 목표달성한다!’면서 교조화시키던 사람들조차도 안 될 거 알고 있었습니다.
이 때, CJ에 경력직으로 넘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이 ‘이 계획은 황당합니다! 말도 안 되는 전략이니 당장 폐기하고 현실적인 계획으로 바꾸세요!’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안 되죠. 낄끼빠빠 정신. 입사한 지 얼마 안 되는 경력직은 조용히 다녀야 합니다. 대전략이 잘못되어서 그룹 전체가 휘청거릴 것 같으면 빨리 딴 데 이직하면 그만이구요. 저 허황된 말잔치에 엮여들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1800년 전 경력직 가후가 이각곽사 이후 대전략을 포기한 것. 그건 ‘21세기 CJ그룹에 입사한 경력직이 당시 2020 그레이트 씨제이 대전략을 비판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현상입니다. 되든 안 되든 아몰랑. 망할 것 같으면 떠날게. 니들끼리 잘 해 봐.
현 시절 얘기했더니 살짝 우울하네요. 다시 ‘가후의 장점’으로 돌아갑니다.
② 내부 정치질을 하지 않는다
많은 분들이 “사내정치 중요하다”고 얘기하십니다. 실제로 중요하기도 하죠. 잘 나가던 임원/팀장이 한 방에 훅 가면서 그 쪽 라인이 모두 한직(閑職)으로 떨려나거나, 역으로 끈 떨어진 줄 알았던 임원이 극단적인 상황변화로 기사회생하면서 그 쪽 라인이 모두 요직으로 올라오는 경우가 자주 생깁니다.
가아끔 경력직 신규입사자 중에서도 사내정치부터 챙기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입사 한 달 만에 자기와 같은 회사 출신 찾아내서 술 먹고 다니거나, 회사 내에서 나름 유력해 보이는 중간간부들에게 일부러 친한 척 한다거나 뭐 그런 모습들이 보입니다.
글쎄요. 이런 사내정치의 결과가 그리 좋을 것 같지 않죠?
프로이직러의 모범인 ‘경력직 가후’는 어땠을까요?
가후는 사내정치와 완전 담을 쌓고 지냈습니다. 중국 최고의 대기업이 된 ‘주식회사 조조’에서 유력자들과 개인적인 만남을 갖지 않았고, 당시 기본(!)이었던 ‘자녀 혼인을 통한 인맥연결’도 안 했습니다. 철저하게 일만 했고, 일 끝나면 바로 집에 갔습니다.
조조 세력의 창업공신이고 명실상부 2인자였던 순욱은 ‘빈 도시락통’을 받은 뒤 자살했고, 또 한 명의 창업공신이자 친인척의 거두였던 조홍은 조비 시절에 큰 모욕을 당했으며, 동탁 때부터 중신이었던 양표의 아들 양수는 조식 밀다가 조조에게 찍혀 처형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가후는 끝까지 살아남아 천수를 누렸습니다.
사내정치. 경력직에게는 그것도 사치스러운 짓입니다. 어설프게 기존 세력들의 경중을 판단하고 어설프게 줄타기 하려다가는 총알받이로 떨려 나갑니다. 침묵하고 자중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③ 흠 잡힐 일이나 말을 삼가한다
위 ‘사내정치질 안 한다’와 연결되는데, 경력직은 흠 잡힐 일이나 말을 삼가해야 합니다. 돼먹지 않은 농담이랍시고 성희롱 비슷한 걸 했다가는 한 방에 골로 갑니다. 어쭙잖게 인생조언 던졌다가는 후배한테 역관광 당합니다. 딱 ‘일’에 관해서만 얘기하고 일만 하는 사람으로 자리매김 하는 게 제일 좋습니다.
가후는 사내정치질을 안 하는 동시에 ‘말을 잘 가려 하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조조가 후계자 문제에 대해 의견 물어봤을 때 직접 대답하지 않고 “유표와 원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한 건 진짜 Best of Best 현답입니다. 물론 모든 경력직이 모든 상황에서 이렇게 할 수는 없겠지만, 일단 모범사례로 기억해 둘 만 합니다.
④ 항상 자신의 전문성을 갈고 닦는다
가후가 대전략을 내지 않았다고 하지만, ‘사람의 심리를 이용하는 기만 협잡에 능했다’는 것만 봐도 끝없이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했다는 점은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기만협잡 책략이었던 마초-한수 이간질. 이걸 진행할 때, 가후는 마초/한수 각각의 인간성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마초는 용맹하나 아직 젊어서 혈기왕성하고, 또한 과거 아버지 마등과 서로 죽이려고 싸웠던 한수에 대해 일말의 의심을 품고 있으며 / 한수는 예전에 조조와 함께 황건적 토벌을 한 적도 있고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심정으로 옛 지인들을 살갑게 대하니, 이들 사이를 이간질하는 건 쉽다고 판단했습니다. 그 판단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구요.
가후의 책략 성공률이 100%인 건 찍기를 잘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본인이 직접 하든 / 간접적으로 듣든 간에 계속 정보를 수집했고 분석했으며, 그걸 적절한 시기에 잘 풀어냈기 때문에 다 맞춘 겁니다.
경력직은 자기 일을 잘 해야 합니다. 자기 전문분야로 승부를 봐야 합니다.
한 회사를 오래 다닌 사람들은 실수를 하더라도 ‘충성심’으로 포장하고 살아날 기회가 있지만, 경력직은 그런 게 없습니다. 무능하다는 말 나오는 순간 그대로 끝입니다.
살아남기 위해 유능해져야 합니다. 그게 경력직 프로이직러의 숙명입니다.
⑤ 본인의 약점을 스스로 인식하고 자리 욕심을 버린다
[자리 욕심을 버린다]. 이게 진짜 어려운 겁니다. 피라미드 구조에서 직급에 묶여 있는 직장인에게는 더더욱 어려운 겁니다.
한나라 시대 사람들도 비슷했을 겁니다. 기왕 장군 했으면 대장군 하고 싶고, 기왕 책사 했으면 승상 되고 싶을 겁니다. ‘삼공(三公)을 배출한 명문가’라는 말이 있었던 것처럼, 높은 벼슬에 올라 명예를 떨치고 싶었을 겁니다.
가후도 ‘태위’까지 올랐습니다. 명예직이긴 하지만 일단 삼공 중 하나에 이름 올리긴 한 거죠. 말년에 명예를 얻긴 했습니다.
하지만, 가후는 태위 자리에 그리 오래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저 남쪽 손권이 가후에 대해 ‘그딴 잡놈에게 태위 자리를 주다니 조비도 별 거 없구나!’라고 비아냥대자, 조비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듯 곧 물러났다고 합니다.
손권이 가후를 두고 잡놈 취급한 것은, 결국 동탁-이각곽사 쪽 재직경력 때문이겠죠. ‘역적에게 봉사했고 심지어 그 역적 시즌2를 지키려고 백성들에게 헛소문 퍼뜨렸다!’는 게 발목을 잡았습니다.
가후는 ‘신속한 사퇴’로 마무리했죠. 모두가 알고 있었던 흑역사지만 그 흑역사가 다시 한 번 주목받자, 명예직이었던 태위 자리를 내놓고 조용히 물러납니다.
실권 없는 자리라고는 하지만 분명 명예는 있었을 텐데, 가후는 거기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가후 본인을 공격할 수 없게 아예 사전차단해 버렸습니다.
⑥ 요약하면 ‘가늘고 길게’. 그러나 이게 가장 어렵다
결국 ‘경력직 가후의 장점’은 [낄끼빠빠]를 핵심으로 한 ‘가늘고 길게 살기’ 전략입니다. 겸손하게 일만 하고 전문성은 최고 수준으로 유지하면서 나대지 않는 것. 그게 프로이직러 가후의 특징이었습니다.
물론, 이게 참 어렵죠. 누구나 다 알지만 실천하는 건 참 어렵습니다. 누구나 다 욕심이 있고 야망이 있으며 자기 똑똑한 걸 드러내고 싶어하는데, 이걸 억누르고 가늘고 길게 사는 건 절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어려운 걸 끝까지 해낸 가후가 대단한 거겠죠. 주연은 아니었고 악평도 많이 받지만 ‘천수를 누렸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주목받는 거겠죠.
저도 가후처럼 살아야 할 텐데요. 죽을 때까지 월급 받는 건 무리겠지만 최소한 정년퇴직 때까지는 가늘고 길게 살아남아야 할 텐데요.
새삼 쉽지 않아 보입니다. 뭐, 잘 해야죠. 잘 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아이젠하워’와 ‘가후’를 비교해 보고 [프로이직러의 마인드 셋팅]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일단 저는 벤치마킹 대상으로 ‘가후’를 찍었고, 직장생활에서 가끔 제 의견을 내야 할 때 ‘가후 스타일’을 고려하여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물론, 마인드 셋팅 얘기만 하고 끝낼 수는 없겠죠. 다음 챕터에서는 좀 더 구체적인 얘기를 해 보겠습니다.
프로이직러의 첫 출발점. [이력서 꾸미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