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리 Aug 10. 2022

재봉틀 배우기와 기억

마음 한조각 2.




재봉틀 사용법을 배우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리폼하는 것을 좋아해서 옷이나 가방을 새롭게 만들기 위해 며칠을 투자해서 손바느질을 했다. 손바느질하는 것이 시간도 많이 걸리지만 튼튼하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다보니 효율적으로 리폼을 해 볼 요량으로 혼스 미니 재봉틀을 구매했지만 사용하지 않고 모셔두고 있었다. 5만원도 안 되는 가격이라 ‘부품값도 안 된다.’면서 망설임 없이 구매했었다. 서울로 직장을 다니면서 여러모로 알아보다가 사무실에서 가까운 풀잎문화센터에서 홈패션 강좌를 수강하기로 했다. 점심시간에 짬을 내서 수업을 받을 수 있었기에 용기를 냈다. 화요일 강좌로 신청했다.    

 



강의실에서 사용하는 재봉틀은 브라더 미싱이었다. 첫날은 실끼우기와 박음질을 했다. 순서에 따라 바늘까지 실을 가져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노안이 와서 그런지 실을 바늘귀에 끼우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실 끝에 침이라도 발라 보고 싶었지만 실 끝을 쪽가위로 몇 번 잘라낸 후에야 성공할 수 있었다. 직선박기와 곡선박기를 지루할만큼 반복적으로 했다. 또 시접박기를 했다. 집에 가서 실습을 해 보았다. 집에 있는 재봉틀은 제품이 다르다 보니 실끼우는 순서는 달랐다. 그래도 작동 원리가 같으니 박음질은 순조롭게 실습할 수 있었고, 바지단을 줄여 보았다. 손바느질이라면 30분은 걸릴 작업도 10분도 안 되어서 마무리되었다.     




두 번째 수업에서는 컵 받침대 두 장을 만들었다. 사각천 두 장을 박아 창구멍을 내서 뒤집어 완성했다. 또 사각천 3장을 바둑판 모양으로 덧대어 박아서 창구멍으로 뒤집어 완성한 다음 박음질로 마무리를 했다. 밑실 감기를 배웠다. 세 번째 수업에서는 파우치를 만들었다. 지퍼를 다는 공정은 손이 많이 갔다. 실패 감기를 실습했다. 네 번째 수업에서는 쿠션을 만들었다. 쿠션은 세 번째 수업과 과정이 같고, 지퍼의 위치가 달라지고 크기가 큰 작품이다. 다섯 번째 수업에서는 앞치마를 만들었다. 목걸이 앞치마다 보니 목걸이 끈과 허리끈을 예쁘게 접어서 박는 것이 중요했다. 곡선박기가 있으니 주의를 기울여서 박음질을 해야 했다. 주머니 두 개를 앞면에 박음질했다. 앞치마는 만든 날부터 집에서 가장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는 작품이다. 여섯 번째 수업에서는 천가방을 만들었다. 천가방은 도안과 재단까지 스스로 해서 만든 작품이라 애착이 많이 가는 작품이다. 자투리 천이 최대한 적게 나오도록 도안하고 재단하는 것이 중요했다. 안감을 넣는 작품이라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마지막 작품인 만큼 더 신경을 썼다. 두 종류의 천을 잇대어 만들어서 디자인 면에서도 예쁜 작품이 완성되었다.      








홈패션 강좌를 통해 재봉틀을 배우면서 기억이 떠올랐다.     




초등 학교시절까지 친정집 대청마루에 떡하니 한 자리 차지하고 있었던 옛날 재봉틀은 무서운 괴물 같았다. 전체적으로 시커멓고 험상궂어 보였고, 주물로 만들어지다 보니 위협적인 무기 같았다. 의자만큼이나 넓은 발판은 수레처럼 힘차게 돌아가고, 시끄러운 박음질 소리는 위협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재봉틀이 고장 나서 버릴 때까지 재봉틀을 사용해 보려고 하지 않은 것 같다. 발판 밟기 놀이만 한 기억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가사 수업 시간에 학교에 한 개밖에 없었던 재봉틀을 한 사람씩 사용할 기회가 있었지만 내가 사용할 순번인 수업 시간에 학교 대표로 백일장에 참가해서 수업에 참여하지 못했다.      




옛날 재봉틀




고학생으로 어렵게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언니가 살고 있는 부산으로 내려갔다. 부산 반여1동에 있던 대우실업에 취업을 했다. 93년 1월, 2월 두 달간이었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아르바이트라는 개념이 없던 때였다. 아르바이트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 취업을 해야 했다. 서류를 접수하고, 면접을 보고, 합격 통지를 받아 배치된 곳은 수출용 남성셔츠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몇백 평 되는 공장 내부에 재봉틀이 줄지어 있고, 한 명씩 재봉틀에 앉아서 세분화된 공정대로 작업을 했다. 그 당시는 재봉틀도 자동화 시스템이 한참 도입되던 시기라 공장의 절반의 재봉틀은 돌아가지 않고 쉬고 있을 때였다. 노련한 여성 노동자들도 있었지만, 중학교를 갓 졸업하고 야간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일하는 여학생들이 대부분인 공장이었다.     




온통 재봉틀 천지인 공장 안에서 나는 재봉틀을 사용하지 않는 공정이었다. 셔츠의 주머니를 다는 일이었는데 자동화 기계 위에 셔츠 앞면을 올려놓고, 재단된 주머니를 셔츠 왼쪽 가슴 부분에 올려놓으면 기계가 시접을 접고, 박음질을 해서 마감을 했다. 순식간에 주머니가 박음질이 되면 나는 다음 공정으로 셔츠를 넘겼다. 두 달간 그 일만 한 나의 눈에는 재봉틀 위에 앉아서 열심히 깃을 달고, 솔기 시접을 박고, 소매를 달고, 단추 구멍을 만들고 단추를 달면서 박음질을 하는 이들이 위대한 기술자로 보였다. 나보다 두세 살 어린 여학생 근로자가 대부분인 공장에서 나는 그저 그들을 부러워하며 또 늘 웃으면서 일했던 기억이 있다.      




한 번은 앞 공정에서 일하던 야간고등학교 2학년생이었던 여학생이 나에게 말했다. “언니는 뭐가 그렇게 좋아서 늘 웃어요? 이 일을 하는 것이 좋으세요? 나는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이 공장일을 그만둘 거에요. 공장 생활을 그만두는 것이 내 소원이에요.”라고 말했다. 그때 나는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부끄러웠던 기억이 있다. 겉으로 볼 때 나는 직원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두 달만 공장 생활을 하고 그만둘 것이기에 하루하루 즐기면서 일을 했다. 그곳에서 일하는 어린 여학생들의 심정은 전혀 헤아리지 않고 있었던 나 자신이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른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고향을 떠나 회사 기숙사에서 살면서 일과 학업을 병행해야만 하는 그녀의 심정을 몰랐던 것이 부끄러웠다. 하루종일 한 가지 일만 계속하는 것의 지겨움, 화장실도 눈치 보여서 자주 갈 수 없고, 조금만 일이 밀려도 다음 공정 사람들의 눈총을 받아야 하는 상황, 똑같은 옷과 똑같은 머리수건을 쓴 채로 개인의 개성을 존중받지 못하는 일상, 하루종일 공장에서 일을 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야간 고등학교에서 공부해야 하는 힘겨운 하루, 하루종일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들리는 대화나 노래소리, 점심 한 끼로 위로를 받아야 하는 서글픔에 공감하지 못한 것 같아 참 미안했다. 지금도 재봉틀을 볼 때마다 대우실업에서의 추억과 미안한 기억이 떠오른다.      




또 하나의 기억은 엄마에게 죄송한 마음이다. 엄마는 옛날 재봉틀을 버린 이후에는 재봉틀 대신 손바느질로 수선을 했다. 손재주가 많아서 우리들의 옷, 한복, 버선, 양말까지 손수 만들던 엄마는 재봉틀을 갖고 싶다고 자주 말씀을 하셨다. 집안의 경제적 형편에 비해 재봉틀의 가격이 워낙 비싸다 보니 친정엄마도 살 엄두를 못 내었고, 근근이 하루하루 살아가던 나도 선물할 엄두를 못 내었다. 빚이라도 내서 사 드릴 수도 있었을 터인데도 철이 덜 들었던 탓이었다. 재봉틀을 볼 때마다 뇌진탕으로 갑작스럽게 하늘나라로 가신 엄마에게 재봉틀을 선물하지 못했던 괴로운 마음이 떠올라 눈시울이 적셔진다.      




홈패션 수업 작품




홈패션 수업이 끝났다. 이제 재봉틀로 박음질도 제법 할 수 있게 되었다. 재봉틀을 사용할 때마다 기억들이 떠오를 것이고, 또 다른 기억들이 쌓여갈 것이다. 실용적이고도 예쁜 작품들을 만든 기억들이 많아지기를 소망해 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