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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 May 19. 2022

마지막 아카시아 꽃향기

마음 한 조각1.




오월은 하루하루가 영롱한 보석 같다. 날마다 더 짙은 초록 옷을 입는 나무들이 감격스럽고, 백만 가지 꽃들이 피고 지는 것이 황홀하다. 온몸을 휘감는 아카시아꽃 향기로 인해 마음 한켠이 뭉클하다. 아카시아 향기가 옅어질수록 오월을 붙잡지 못해 아쉽지만 옅어지는 향기에 더욱 짙어지는 추억도 있다. 아카시아 꽃향기에 묻어 있는 마음 한 조각이 있다.      




어린 시절 동리의 길가에 심겨 있는 아카시아 나무는 너무나 높았다. 키 큰 아카시아 나뭇가지에서 풍겨 오는 꽃향기에 반한 나는 늘 발걸음을 멈추곤 했다. 고개를 들고 꽃내음 맘껏 들이키고, 알알이 맺혀 있는 하얀 꽃송이를 바라보는 것은 오월의 일과 중 하나였다. 발걸음을 멈춘 나의 곁으로 지나는 어른에게 허리 숙여 인사를 하면 기특하다며 아카시아꽃 한 송이 따서 건네주셨다. 그럴 때면 달콤한 향기 터지는 아카시아꽃 한 송이 맛있게 먹어 볼 수 있었다. 어머니가 따 온 아카시아 꽃을 듬뿍 담고, 양념장 만들어 쓱쓱 비벼 먹으면 그야말로 오월을 다 가진 듯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읍내 학교로 통학할 때 차창으로 불어오던 아카시아 꽃향기는 그야말로 심신 안정제였다. 두메산골 벽지라 차편도 많지 않았고, 40분이 넘는 시간을 달려가야 읍내에 도착했기 때문에 새벽 버스를 타야 했다. 덜컹덜컹 비포장도로 위로 만원 버스를 타고 가는 그 시간이 감수성 예민한 여학생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그런 나에게 오월은 고통이 아니라 그리움이 되었다. 꼬불꼬불 산길의 등성이는 초록을 삼킬 것 같은 하얀색 아카시아꽃이 지천이라 황홀하고, 새벽 공기에 꾹꾹 눌린 진하디 진한 향기가 열린 차창으로 몰려와 내 콧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퉁퉁 부어 있는 마음을 녹여 주었다. 아카시아꽃 만발한 오월의 새벽 등굣길과 늦은 오후의 하굣길은 그리운 향기가 되고, 만원 버스의 고통을 향기로 감쌌다.     







언니가 천국으로 떠난 그해의 아카시아 향기는 더욱 진했다. 40대 초반이던 언니가 말기 암 진단을 받고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두어 시간 자가용을 타고 가야 하는 거리였지만 매주 한 날을 정해 언니를 만나러 병원으로 갔었다. 방사선 치료를 하느라 기운이 빠져 있는 언니의 목욕을 시켜주는 일이 내가 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었다. 많던 머리숱은 대머리로 변하고, 가느다랗던 팔다리가 퉁퉁 부어 있던 언니는 그래도 삶의 희망으로 불타 있었다.




그런 언니를 마주하면서 하루하루가 눈물이었던 어느 날, 아카시아 꽃향기가 나에게 파도처럼 밀려왔다. 집 뒤 공원에 심겨 있던 몇 그루의 아카시아 나무에 꽃이 만발한 것이었다. 그동안은 몰랐던 놀라운 발견이었다. 번화한 도심 속에 아름드리 아카시아 나무 몇 그루가 지척에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축복이었다. 산에 올랐다. 키가 몇 척이나 될 듯한 높은 나무에서 한들한들한 새하얀 꽃송이들이 반겼다. 바닥에 흩어져 있던 기다란 나뭇가지를 주어다가 가장 아래로 쳐져 있는 가지에 걸고 당겨서 아카시아꽃을 꺾었다. 걸어 둘 수 있도록 가지를 몇 개 꺾었다. 수북이 모아진 꽃송이를 투명한 반찬통에 가득 담아서 빠른 배송으로 언니의 병실로 보냈다. 며칠 후면 병원으로 갈 것이지만 하루라도 빨리 언니에게 아카시아 향기를 선물하고 싶었다. 배송되는 동안에 향기가 시들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언니가 감격의 전화를 해 주었다. 병실이 아카시아 꽃향기로 가득하게 되었다고, 오월을 느끼게 해 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언제나처럼 나의 모든 것을 응원해 주는 따뜻하고 정감 어린 목소리였다. 한동안 언니의 병실에는 아카시아 가지가 걸려 있었다. 온 천지가 아카시아 향기에 취해버릴 것 같은 날에도 병실에서는 향기가 힘을 잃었다. 가까이 코를 대고 꽃내음 맡아보려 해도 그 달콤한 향은 어디로 도망가 버린 듯했다. 내가 선물하고 싶었던 풍성한 향기는 아니었지만 한 가닥처럼 옅은 향기. 그 옅은 향기는 언니의 눈에 눈물이 고이게 하고, 마음 한 언저리에 웃음꽃 피게 만들어준 언니의 마지막 아카시아 꽃향기였다. 언니는 그해 겨울, 천국으로 갔다.      




오월이 하루하루 지날수록 짙었던 아카시아 꽃향기가 힘을 잃어 가고 있다. 언니의 마지막 아카시아 꽃향기처럼 향기가 옅어질수록 추억은 더욱 짙어진다. 언니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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