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에 다음의 문제가 있다.
반짝이는 보물보다 귀하면서도
동시에 사람을, 나아가 사회도 죽일 수 있는 것의 이름은 무엇인지에 관한 문제였었다.
그 퀴즈의 답은 정답이다.
이 문제를 두고 난 고민했다.
마치 신생아가 된 것처럼
어떠한 것도 하지 못하겠다는 감정이 밀려들었다.
답을 정하고, 형태를 확정하려 애썼는데
그런 사고가 답에서 멀어지는 행위나 다름없다니
매몰이란 내 생각보다 무섭다는걸 저 문제를 접한 3년 전에는 몰랐었다.
그렇게 어물쩍 넘어가고 나서 시간이 지나고
지금에 와서는 다른 견해가 생겨났다.
전에는 답이라고 하면 무릇 정해진 형태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견고한 그 무언가에 기댈 수 있으며 그것으로 하여금 내가 살아갈 수 있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불변하는 진리라는 것을 찾고, 만들기 위해 다들 노력하고 있다.
좀 더 긍정에 가까워지기 위해, 잘못되었다고 판단되는 것을 최대한 배제하여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기 위하여.
그러나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언가가 낡아가는 과정이다.
낡은 것을 수집하는 이는 있어도 필요로 하는 이는 없다.
어떠한 점이 변하는 것만으로도 고고한 골동품으로 남겨지는 상황보다는
분명 나은 것이라는 걸 말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렇기에 형태가 없는 정답이란 것을 어떤 형태로든 확정 짓는 순간 그것에 고정되고 마는 그 점을
나는 분명히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지금에 와서는 생각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불특정 다수가 정의(justice)에 갇혀 무너지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고 거기에서 나를 겹쳐보았기 때문에 그렇다.
정답에 형태를 찾기 위해 피부를 쥐어뜯으며 머릿속이 더러워지게 놔두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음을 여러 경우에서 엿보고 난 후에는
어느 정도 본인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으며
난 조금 더 행복을 내 안에 가둬두지 않기로 하였다.
정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오히려 정하면 정할수록 무지해진다.
이러한 개념으로 인해 어제보다 더 행복해졌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한번 정한 것을 내일 다른 시선으로 보기만 해도
나는 내가 원하는 모습을 가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