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을 바라보면 빗질하듯 마음이 쓸어진다.
마당에 떨어진 낙엽을 빗질하는 것처럼 무거운 마음이 가벼워지기 때문에, 내가 연꽃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그녀는 언제 보아도 단아하고 기품이 있다. 그녀는 내게 깨달음을 주는 화신이고,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고고한 자태로 나를 맞아 준다. 그녀의 향기는 언제나 나의 심혼을 충만하고 여유롭게 해준다. 맑은 날에는 은은하게 바람결에 실려와 코끝에 감돌아서 좋다. 보슬비 내리는 날에는 그 은은한 향기가 진하게 다가와서 좋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연꽃 사진에 매료되어 카메라 어깨 둘러매고, 연꽃단지들을 먼 곳까지 찾아 나섰다. 홍천 수타사 연꽃은 깊은 산속에서 피어서인지 바깥으로 드러낼 수 없는 속마음을 추스르기에 좋다. 늦여름날 강릉 경포호수 주변에 있는 가시연꽃은 잠자리 한 마리 한가롭게 졸고 있는 모습이 정겨워서 좋다. 양평 두물머리 연꽃은 여유롭게 거닐면서 마치 첫사랑 소녀를 바라보듯 풋풋한 초록의 느낌이 있어 좋다. 서울 종로 조계사 앞마당에 핀 연꽃은 무심히 발길 닿는 대로 찾아가 묵상하듯 바라보기에 더없이 좋다.
연꽃은 언제 보아도 예쁘고 사랑스럽다. 특히, 렌즈 초점이 맞춰진 연꽃 봉오리는 마치 붉게 타오르기 시작한 모닥불 같다. 활짝 핀 꽃잎이 햇빛에 투영되면 살포시 속살이 비치는 여인의 모시적삼을 보듯 황홀하다. 빗물이 초롱초롱 맺힌 연꽃을 보고 있으면, 어느새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연꽃은 마치 요한슈트라우스의 ‘봄의 소리’ 왈츠를 추는 날렵한 아가씨의 모습이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광화문 생활 수개월이 지날 무렵, 종로 한복판에 연꽃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조계사로 자주 발걸음을 했다. 비록 연못이 아닌 큰 항아리 속에서 핀 연꽃이지만, 대웅전 앞마당에 활짝 핀 연꽃을 바라볼 때마다 삼존불 앞에 선 것처럼, 나를 반성케 하는 엄숙함이 거기 있었다.
가랑비가 오는 어느 날, 한가로이 인사동 골목을 거닐다가 조계사 앞마당까지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그때, 우산을 들고 대웅전 앞마당에서 삼존불을 응시하며 서 있는 어르신을 목격하였다. 그 숙연한 모습이 마치 하얀 연꽃과도 같았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그의 뺨에 흐르던 모습이 며칠 동안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은 내 가슴속에 묻혀있는 돌멩이 하나가 꿈틀대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어느새 머리숱이 점점 빠지고 귀밑머리가 하얗게 된 즈음, 불교에서 전하는 연꽃의 열 가지 의미를 곱씹으며, 내가 지나 온 길을 소처럼 되새김질 한다.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다(이제염오 離諸染汚) 하면서 진흙탕과 깨끗함을 내 스스로 함부로 구분하지는 않았는지, 한 방울의 오물도 머무르지 않기를 바라면서(불여악구 不與惡俱) 남에게 과시할 흔적을 남기려는 아집에 갇혀 있지는 않았는지, 향기 가득하고(계향충만 戒香充滿) 원만하고 부드러움과(면상희이 面相喜怡) 청정한 마음을 갖고자(본체청정 本體淸淨) 하면서 고결한 척하며 자아도취에 빠지지는 않았는지, 꽃이 피면 열매를 맺는(개부구족 開敷具足)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만을 너무 중시하지는 않았는지 자문해 본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 흔적을 남기려는 욕심 때문에 가슴속 돌덩이만 가득 안고 살아 왔음을 내 스스로 부인하기 어렵다. 바람처럼 그대로 흘러가면 될 것을,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자만심에 후회스러움만 가득할 뿐이다. 어떤 날은 연꽃 같은 삶을 그리워하다가, 되돌아서면 또다시 욕심이란 덩어리가 꿈틀대기도 한다. 이제는 하나둘 내려놓고 비우는 삶이고자 한다. 저 연꽃처럼 따뜻한 손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쓰다듬어 주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다음에 하얀 달빛 받은 연꽃을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이고 싶다. 그러나 이 또한 나의 부질없는 작은 욕심이 아닐지 모르겠다.
- 현대계간문학 수록, 2025년 11월에 일부 퇴고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