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과 진짜 얼굴

by 만보

가면과 진짜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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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매각시와 오래전 기억들


얼마 전, 강릉에서 열린 관노가면극을 구경하였다. 마당 무대 위에서 소매각시가 등장하고 구박받는 장면을 보는데, 마음 한쪽이 묘하게 뒤틀렸다. 소매각시의 노란색 저고리와 붉은색 치마는 아름다우면서도 왠지 슬펐다. 그녀는 웃음을 머금고 등장했지만, 그 웃음 뒤에는 늘 억압과 희생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남성의 욕망 속에서 이용되고, 결국 그 욕망의 희생양이 되는 인물. 관객은 웃지만, 그 웃음은 어딘가 불편했다.


관노가면극 장면을 보면서, 오래전 김씨와 여직원 K에 대한 흐릿한 기억들이 겹쳐 지면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동료 직원인 김씨는 술을 좋아했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즐겼다.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회식 자리 어디서나 늘 분위기를 주도했다 어느 날, 우연히 그가 아내와 통화하는 장면을 옆자리에서 듣게 되었다.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말은 놀랍도록 거칠었고, 차마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욕설이었다. 직장에서는 유쾌하고 사교적인 사람이었지만, 그때 전화하는 순간의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난 뒤, 나는 머리가 멍해졌다.

‘사람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아무리 화가 난다 해도,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전화로 아내에게 욕을 퍼붓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나를 포함한 몇 사람들도 표정이 좋지 않아 씁쓸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한쪽 자리에 있던 여직원 K가 뜬금없이,

“그럴 수도 있죠. 남자들 스트레스 많이 받잖아요. 이해해야죠.”

그녀의 말은 나에게 또 다른 충격을 주었다.


김씨의 행동도 그렇지만, 욕설을 이해할 수 있다는 여직원 K의 말이 더 낯설고 이상할 정도였다. 김씨 폭언 속에는 힘으로 상대를 지배하려는 욕망과 K의 옹호성 발언은 폭력에 대한 익숙함이 묻어 있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의 사이에 있었던 우리는 그저 불편하게 바라보는 관찰자였다. 마치 가면극 무대 아래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내 모습처럼.


가면과 진짜 얼굴


직장에서의 김씨는 언제나 웃고 유쾌한 가면을 썼다. 술잔을 돌리고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띄우는 사람. 심지어 직장 행사장에서 마이크를 서슴없이 잡던 분위기 메이커였다. K 또한 모든 일에 적극적인 여성이었다. 그러나 그날의 욕설과 옹호적 발언은 가면 뒤에 숨겨진 그들의 진짜 얼굴을 드러냈다.


인간은 누구나 사회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가면을 쓴다. 하지만 그 가면이 너무 오래 쓰다 보면 자신조차 진짜 얼굴을 잊게 된다. 관노가면극은 바로 그 가면의 세계를 풍자하는 연극이다. 하층민이 주체가 되어 지배권력을 흉내 내고, 웃음으로 세상의 위계를 비튼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에는 씁쓸한 진실이 숨어 있다. 웃음이 끝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현실. 그게 사회이며, 관계이고, 운명이다.


김씨가 막말과 폭언에 대해 K의 옹호적인 말, '그럴 수도 있죠', '이해해야죠' 는 지금도 마음 한구석에 찌꺼기처럼 남아 있다.

‘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는 폭력이 용납되는가?’

‘왜 사람들은 폭력을 이해하려 하는가?’

‘왜 우리는 누군가의 상처 앞에서 그럴 수도 있다며 폭력을 감싸려 하는가?‘


어쩌면 우리 사회는 폭력이나 욕설조차 일상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진 사회인지도 모른다.

“남자니까”,

“부부싸움이니까”,

“술 먹고 실수했으니까.”

이런 말들로 타인의 잔혹함을 합리화하고, 그 폭력의 공범이 된다. 그날의 김씨와 K는 그런 사회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카메라 시선으로 본 인간의 진실


관노가면극의 소매각시를 보며 셔터를 누르면서 눈앞의 장면보다 더 선명하게 떠오른 것은 과거의 기억 속 김씨와 K, 그리고 그 사이에서 불편하게 침묵하던 나 자신이었다. 사진은 순간을 기록하지만, 그 순간에는 늘 시간의 층위가 겹친다. 지금의 장면 속에는 과거의 기억이, 그 기억 속에는 여전히 현재의 내가 서 있듯이, 나는 그날의 소매각시를 촬영하면서 결국 내 안의 인간을 찍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관노가면극에 등장하는 양반과 소매각시, 시시딱딱이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인간이란 결국 가면을 쓰고 사는 존재구나.”

하지만, 그 가면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사람만이 조금 더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그날 김씨의 폭언과 욕설은 인간의 추한 이중적인 얼굴을 보여주었고, K의 반응은 그 추함이 얼마나 깊이 사회에 뿌리내렸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소매각시는 그 모든 것을 무대 위에서 다시 연기하며, 우리 모두의 모습을 비춰주었다.

망원렌즈 너머로 그 얼굴을 찍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가면을 쓴 인간들이여! 그대의 웃음 뒤에 숨은 폭력도 함께 찍히고 있다오.”


- 강릉 관노가면극 사진을 정리하면서, 이 글을 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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