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전 초가을 밤, 200mm 망원렌즈를 통해 포착한 이 사진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풀벌레 실루엣이다. 그 뒤로 강렬하게 빛나지만, 초점이 흐트러진 둥근 달빛. 풀벌레의 고독과 달빛의 포근함이 나를 감응시켰었다.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달을 품은 풀벌레는 고독과 포근함이라는 감정적 대비를 넘어선다. 실존의 근본적인 딜레마를 담고 있는 삶의 초상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풀벌레와 달빛의 압도적인 대비, 작은 생명체와 거대한 우주의 대면은 실존주의 철학이 탐구하는 ‘피투된 존재’의 취약성을 시각화한다. 인간은 의미 없는 어둠 속에 던져져 있으며, 풀벌레의 실루엣은 광활한 無의 공간 앞에서 떨고 있는 모든 인간의 모습을 대변한다.
여치인지 메뚜기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흐릿한 그 풀벌레의 실루엣은 가을을 맞이하는 고독을 느끼게 했다. 가을은 생명이 절정에 달했다가 소멸로 향하는 길목, 유한성과 죽음을 인식하는 계절이다. 풀벌레는 유한한 시간 속에서 홀로 어둠과 빛의 경계에 서 있다. 이 고독은 사회적 관계로부터의 단절보다 존재론적 고독이다. 죽음과 책임은 혼자 감당해야 하는 인간의 운명처럼, 풀벌레는 그 운명을 외면하지 않고, 가느다란 나뭇가지 위라는 불안정한 위치에서 당당하게 빛과 어둠을 가로지르며 서 있다.
이는 니체가 말한 '운명애(Amor Fati)'의 작은 실천처럼 느껴진다. 자신의 고독하고 취약한 운명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나는 이것을 원했다.’라고 긍정하며 자신의 존재를 확립하는 대자 존재(Être-pour-soi)의 결단이다. 그 풀벌레의 실루엣은 ‘나는 여기 존재한다.’라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실존의 선언이었다.
풀벌레에 초점을 맞추어 달을 뭉개지게 할 수밖에 없었던 선택은 촬영 기법을 넘어, 실존적 포커싱의 윤리를 담고 있다. 달은 거대하다. 사회가 부여하는 이상적인 가치, 절대적인 진리, 성공의 거대한 규범처럼 보인다. 그것은 아름답고 강력하지만, 너무 광대하여 개인의 삶과는 무관하게 존재한다. 실존주의의 관점에서 달빛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거대한 즉자 존재(Être-en-soi)'의 영역으로 해석될 수 있다.
풀벌레에 초점을 맞추겠다고 결정하면서, 거대한 것의 명료함을 포기하고 개인의 작은 실존을 우선하겠다는 윤리적 선택을 한 것이다. 포커스가 뭉개진 달빛은 사회의 규범, 거창한 이데올로기, 내 삶의 진정한 의미를 흐트러뜨리는 모호한 보편성을 기꺼이 흐릿하게 두겠다는 결단이다. 명확한 풀벌레는 나 자신의 실존, 나의 고독한 선택, 나의 주체적 행위에만 명료한 초점을 맞추겠다는 선언이다. 망원렌즈는 '주체적인 개인이 가장 중요하며, 보편적 진리는 개인의 삶 앞에서 잠시 멈춰야 한다.'라는 실존주의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무의식적으로 구현하려 했다.
풀벌레의 고독한 결단이 치열한 실존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뒤편의 뭉개진 달빛은 내가 느꼈던 포근함의 원천이 된다. 달빛은 풀벌레를 덮치는 차가운 이성보다, 어둠 속에서 존재를 가능하게 해주는 따뜻한 감성처럼 느껴진다.
알베르 카뮈가 말한 '연대'나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정신과 통한다. 우리는 고독하게 선택하지만, 그 고독한 실존을 감싸안는 인간적인 따뜻함, 혹은 존재 자체를 긍정하는 우주의 무언의 수용이 있다. 풀벌레가 홀로 선다는 것은 고독하지만, 그 홀로 섬을 가능하게 하는 달빛의 포용력이 있기에, 그 고독은 절망이 아닌 희망의 기반이 된다.
11년 전의 이 사진은 내 앨범 안에서, 혹은 혼란스러운 일상에서 나를 끊임없이 재정비하게 만드는 이정표가 되었다. 매일의 삶 속에서 '나의 달'이 무엇인지, 그리고 '나의 풀벌레'는 무엇인지 묻는다.
거대하고 웅장하지만, 초점이 흐트러진 달처럼, 남들의 시선이나 사회적 기대에 흔들리며 내 삶의 포커스를 잃고 있지는 않은가?
가느다란 나뭇가지 위에 홀로 서서도 자신의 실루엣을 명확히 하는 풀벌레처럼, 나의 일상적인 고독과 불안 속에서도 나의 주체적 결단에 명료한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
이 초가을 밤은 나에게 자유는 고독한 것이지만, 그 고독 속에서 진정한 나의 본질을 만들어가야 할 책임이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삶이라는 어둠 속에서,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망원렌즈를 들고 가장 중요한 실존의 순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사진작가가 아닐는지.
- 지난 앨범을 보면서, 이 글을 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