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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인 Sep 30. 2024

정답은 길 밖에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영상의학과 의사의 이야기 2.

 초음파를 보기 전에 간단한 의료정보를 확인한다. 똑같은 초음파를 보더라도 보는 이유에 따라 중점적으로 확인해야 하는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보통은 성별이랑 나이만 봐도 대충 감이 오는데, 14세 여아가 복부 초음파를 보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이럴 때는 조금 더 자세히 전자차트를 뒤져서 정확한 병력을 확인해야 한다.


 Paracetamol intoxication.

 

 타이레놀의 성분인 paracetamol을 과다복용한 청소년이었다. 학교폭력은 아니었으나, 교우관계 문제로 약국을 돌아다니며 타이레놀 60정을 모아 한꺼번에 삼켰다고 했다.


 의사로서 수 없이 많은 환자분들을 만났지만 언제 어떻게 만나든 자살 시도를 하신 분들은 대하기가 조심스럽다. 그분들의 병력을 물어보는 일도 힘들다. "약은 왜 드셨어요?" "죽으려고요" 하는 등의 내용을 묻고 답을 들어 차트에 남겨야 하기 때문이다. 물어봄으로써 이 분들의 상처를 한번 더 헤집는 일이 될까 봐 걱정이지만, 그렇다고 병력 확인을 하지 않은 채로 진단이나 치료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긴장된 마음으로 초음파실에 들어갔다. 아이는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벽 쪽으로 돌리고 누워있었다. 초음파를 하기 위해서는 아랫배를 불룩 내밀라든지, 숨을 참아보라든지 하는 간단한 이야기만 나누면 되었지만 어떤 톤으로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평상시라면 적당히 밝고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겠지만, 말투에서 조금의 밝음이라도 느껴진다면 상처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목이 잠겼다. 14세... 이 아이는 60알의 타이레놀을 모으기 위해 몇 군데의 약국을 돌아다녔을까? 약국들을 돌아다니며 어떤 마음이었을까.


 흔히 말하기를 청소년기에는 친구를 제일 중요하게 여긴다고 한다. 심리학적으로도 맞는 말일 듯하다. 대부분 청소년기는 그동안 가장 중요한 집단이었던 가정을 떠나 스스로 독립하는 단계로 가는 과도기이기 때문에, 비슷한 처지에 놓인 또래 집단에서의 평가와 그들과의 유대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할 것이다.


 그렇지만 어른이 되면 알게 된다. 친구들이 소중한 건 맞지만, 그들이 결국 내 인생에 있어 영원한 가치는 아니라는 것을. 나도 14살에 만나 지금까지 만남을 이어오는 소중한 친구들이 있고 그 친구들에게 큰 위로를 얻곤 하지만, 그 친구들과의 관계가 삶의 가장 중요한 척도는 아니다. 우리는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각자 열심히 살아내면서 때로는 멀리서, 때로는 가까이서 서로를 응원할 뿐이다.


 대한민국의 아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한 가지의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 개인이 가진 고유한 특성은 묵살되고, 행복의 기준은 사회 공통적인 것이 되어 거기에서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낙오자라는 소리를 듣는다. 오늘은 4살짜리 아이가 초음파 받던 중에 울었다고 "넌 낙오자야!"라고 말하는 아빠를 만났다. 거짓말이면 좋겠지만, 놀랍게도 실화다.


 이런 환경에서 아이들은 친구 관계에 집착하고, 인간관계에 대한 집착은 필연적으로 불만족과 서운함으로 이어진다. 마음 둘 곳 없는 아이들은 어딘가에 중독되거나, 모든 것을 놔버리는 길을 택한다. 한동안 대치동에서 일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 거리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아이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정신과 의사로 일하는 친구들의 얘기를 들으면 그 충격은 더욱 심해져, 이 사회에 드리워진 병리적인 그림자가 날이 갈수록 짙어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7년 전에는 가장 좋아했던 가수를 자살로 잃었다. 그의 마음을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이해한다. 자살하는 사람들을 나약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고자 하는 그 끔찍한 삶의 고통을 평가절하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딱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자살의 문턱까지 갔던 그때의 에게 "네가 걱정하는 그 문제가 삶의 전부는 아니라는"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숨통을 끊을 듯이 옥죄어오던 그 문제 밖에는 여전히 삶의 의미있는 것들이 남아 있을수도 있었는데, 그 순간에는 그것들을 보지 못하고 오직 모든 것을 끝내는 것만이 답이라고 생각했던건 아닐까.


 삶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나도 잘은 모르겠다. 사실 내가 뭐라고, 이런 말을 하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그렇지만 적어도 내 경우에는, 삶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은 삶에 대한 스스로의 만족감에서 오는 것 같았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걱정을 의도적으로 힘써 지우고, 내가 사랑하는 크고 작은 것들을 매 순간 부지런히 사랑하며 사는 삶. 가끔은 외롭고 힘에 부칠 때가 있겠으나,  시기가 지나고 나면 날씨가 바뀌듯 마음도 바뀌고 어떻게든 이 인생이 견딜 만 해지는 날이 올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타이레놀을 과다복용한 14세 여아에게, 끝내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초음파를 마치고 나오면서 슬쩍 그 아이의 얼굴을 쳐다보았는데, 여전히 공허한 눈으로 자신이 맞고 있는 수액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아이에게 뭐라고 해줄 수 있었을까?


 비록 나는 무책임한 어른 1로 그 아이의 삶에서 퇴장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아이의 삶에 의미 있는 누군가가 반드시 말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지금 그 일은 시간이 지나면 잊힐 거라고, 너의 친구들이 너를 어떻게 생각하든 네가 가치 있고 소중한 사람인 것은 변함이 없다고. 지금 네 눈앞에 보이는 것이 한 개의 길 같아 보여도, 그 길 밖에는 무수히 넓은 공간이 있고 어디든 네가 새로운 길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고 말해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어쩌면 정답은, 우리가 서 있는 이 길의 밖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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