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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인 Sep 25. 2024

당신이 처음 듣는 심장 소리

영상의학과 의사의 이야기 1.

 오늘 수술하기 전 심장 기능 확인을 위해 심초음파를 받으시던 할머니. 심장의 위치가 좋지 않아 초음파로 잘 보이지 않아서, 초음파 탐촉자를 이리저리 돌리며 낑낑대야만 했다. 잘 보려고 탐촉자를 누르면 아파하시니 세게 누를 수도 없고, 초음파 시간이 길어질수록 어깨가 너덜너덜해지는 것처럼 아파왔다. 어찌어찌 초음파를 진행하고 마무리 단계로 심장의 혈류 속도를 측정하려고 도플러를 켰다.


 엄마가 임신했을 때 초음파로 듣는 아기 심장 소리와 어른의 심장 소리는 거의 비슷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듣고 아기의 심장이 어른보다 조금 더 빨리 뛴다는 점뿐이다. 스스로의 어깨를 내건 사투 끝에 듣는 환자분의 심장 소리. 그 우렁찬 소리에 나는 약간 감격했다. 감격을 뒤로하고 혈류 속도 측정을 서두르려는 찰나, 초음파실을 채우는 심장 소리 틈새로 할머니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살면서 내 심장 소리는 처음 들어보네."


 드라마에서 보면 임산부가 처음으로 아기의 심장 소리를 듣고 감격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어떤 상황 때문에 아기를 포기하려다가도, 그 심장 소리를 듣고 마음을 바꾸는 것 또한 잘 알려진 클리셰이다. 아마도 심장 소리만큼, '살아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심장 소리를 들으면 부정할 수 없이 그 개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오늘 심초음파를 받으시던 할머니는 임신하셨을  아기의 심장 소리를 들어보셨을까? 농사일로 무를 뽑다가 아이를 출산하고는 새참 바구니에 아이를 담아 집으로 돌아왔다,는 말이 우스갯소리가 아니던 시절의 출산을 겪으셨을 테니, 아이의 심장 소리도 못 들어보고 낳으셨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아이도 아닌 본인의 심장 소리를 듣는 것은 정말 처음이셨을 것이다.


 나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회한 섞인 그 목소리가 쓸쓸하면서도 감동적이었다. "살면서 이런 맛있는 음식은 처음 먹어보네"라든지 "살면서 이렇게 좋은 곳은 처음 와보네"와 같은 감격 섞인 멘트는 아니었지만, 그 순간에 할머니께서 '살아있음'을 직관적으로 느끼셨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할머니께서 어떠한 삶을 살아오셨는지 알 수는 없지만, 평균적인 당대 여성의 삶을 돌아보건대 아마도 가족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고 살아오셨을 확률이 높을 것이다. 물론 많은 순간 행복하셨겠지만, 그리고 가족들을 돌보는 숭고한 일을 잘 감당해오셨겠지만, 스스로가 '살아있다'라고 느끼는 순간은 그리 많지 않으셨을지도 모른다 (물론, '뭔 소리여 아아줘' 하시는 할머니이실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언제 살아있다고 느끼는가? 나는 가끔 나의 손목에 엄지 손가락을 대보곤 한다. 엄지손가락 쪽의 손바닥과 손목이 만나는 부위에 비교적 표면적인 위치에서 요골동맥이 지나기 때문에, 동맥에서 피를 뽑을 때 그곳에서 주로 뽑는다. 인턴 때 무척 많은 손목에서 동맥혈을 뽑았는데, 그때 이후로 누군가의 손목을 잡으면 나도 모르게 요골동맥에 손을 대어 맥박수를 재보는 습관이 생겼다(나의 최애 드라마인 BBC 드라마 '셜록'의 최고 명장면도 이 요골동맥의 맥박수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종종 스스로의 손목에도 손가락을 대어 맥박수를 재보곤 한다. 그러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안정된다.


 타고난 우울 기질이 강해 늘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살지만,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할수록 살아있다는 것이 더욱 눈부신 명제로 다가온다. 살아있으니 살아야 한다. 살아있으니 해야 할 일들을 해야 한다. 살아있으니 이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삶에는 많은 일들과 만남들이 오고 가지만, '오늘을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삶의 가장 엄중한 당위성이다.


 오늘 할머니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그분의 살아있음이 어떻게 느껴지셨을까? 할머니에게 가족분들이 소중하듯, 할머니 자체도 그렇게 소중한 사람임을 잠깐이라도 생각하셨으면 좋겠다. 심장이 만들어지는 임신 7주 때부터, 우리가 숨을 거두는 날까지 심장은 멈추지 않는다. 초음파로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우리의 심장은 정말로 힘차게 뛴다. 2개의 심방과 2개의 심실, 판막들과 대혈관들로 얽힌 심장은 아름답다. 동시에 수축되는 것도 아니고, 각각 다 다른 시기에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지만 그 스텝이 엉키는 일은 없다. 그렇게 뛰고 있는 심장을 보고 있노라면, 이 복잡하고 아름다우며 지치지 않는 심장을 가진 사람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고 느낀다.


 어떤 날은 내가 자랑스럽기도 하고 어떤 날은 내가 부끄럽기도 하지만, 잠자리에 들 때만큼은 내 손목에 손가락을 대어 내 심장 박동을 느껴본다. 살아있음을 느껴본다. 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쉬지 않고 애쓰고 있는 심장에게, 폐에게, 뇌에게, 그리고 다른 기관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창조의 원리가 우주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나의 몸은, 나는 이렇게 오늘 밤도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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