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현모 Oct 27. 2024

완벽주의자는 완전무결함을 지향하는가

완전무결함을 추구하는 성향은 어떻게 데리고 살아야 하는 걸까. 심지어 나 자신조차도 모든 면에서 완전하고 무결하다 할 순 없는데, 좋아하는 대상(사람이 되었든 사물이 되었든)이 완전무결하지 않다 느끼면 마음이 급격하게 식는다. 때로는 그런 심경의 변화를 막기 위해서라도 차라리 '덜 아는 편'을 선호하게 된다.


우연히 어떤 팝송을 듣는다. 꽤 마음에 든다. 이따금 듣는 팝송 플레이리스트에 그 곡을 추가한다. 종종 듣는다. 그러다 그 노래를 부른 아티스트에 대해 알게 된다. 어느 순간, 마냥 마음 편히 그 사람을 좋아할 수만은 없는 이유를 접한다. 그 이후로는 그 노래를 마음 편히 들을 수 없게 된다. 대충 이런 식이다. 차라리 가수에 관한 정보가 없었더라면 적당히 들으며 살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렇게까지 깐깐하게 따지는 내가 나 자신도 피로하다.


좋아하던 노래를 '잃는' 게 싫어서 애초에 새로운 노래를 잘 디깅하지 않는 편이기도 하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가수를 발견하며 그 사람의 여러 노래를 찾아 들어보기도 하지만, 한 아티스트의 다양한 노래가 모두 내 취향인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렇게 따지다 보면 남는 노래가 얼마 없지 않느냐는 의문이 들 수도 있을 텐데, 실제로 그렇다. 내가 음악을 많이 듣지 않고, 듣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거라고도 할 수 있겠다.


모르는 게 약이기보다는 아는 게 힘이라고 늘 생각해 왔지만, 때로는 모르는 채로 살 수밖에 없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이를테면 내가 좋아하는 온갖 창작물들. 모든 창작자의 완전무결함을 알아낼 수도, 따져볼 수도(어쩌면 그건 '감히'의 영역인지도 모른다) 없기 때문에 그저 창작물 자체만을 보며 좋아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 면에서 어찌 보면 자기 자신을 필명 뒤로 철저히 숨기는 창작자에겐 오히려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마음 편히 좋아할 수 있게 해주는 셈이니까.


쓰다 보니 이 '완전무결함에 대한 추구'는 사실상 완벽주의의 일환인 것 같기도 하다. 완벽하지 않은 나 자신을 수용할 수 있다면, 완벽하지 않은 타인 또한 받아들일 수 있겠지. 올해 완벽주의를 다루기 위해 프로그램에 참여해보기도 했고, 프로그램 종료 이후에도 스스로 자그마한 노력을 거듭하는 중인데, 그러다 보면 완벽주의를 대하는 나의 태도가 조금은 달라질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를 하는 중이다. 그렇다면 완전무결함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조금은 변할지도. 그랬으면 좋겠다.

이전 09화 삶에 인지적 부담을 활용하는 요령, 자이가르닉 효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