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스페인어 공부

by 마라곤

스페인어를 배우려고 마음먹은 것은 영어 공부에 대한 식상함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새로운 언어에 대한 호기심과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나라들에 대한 여행 계획도 염두에 둔 때문이겠다.


처음에는 영국의 역사로 시작하였다. 헨리 8세,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전후사를 보면서 헨리 8세의 튜터 왕조의 계보와 이전의 왕실 계보를 따라가니 프랑스 왕조가 따라오고, 헨리 8세와 6명의 부인의 계보를 따라가니 스코틀랜드가 나오고, 스페인이 나오는 게 아닌가?


순간, 잘못 건드렸다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하나하나 흐름이라도 알아야 되겠다 싶어 동시대의 스코틀랜드, 프랑스 계보를 대충 보고 나니,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스페인에 꼭 가야 되겠다는 결심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스페인을 가기 전에는 스페인어를 해야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영국의 메리 여왕과 펠리페 2세와의 인연 등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그들만의 이야기와 비화가 너무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왜 이렇게 역사가 재미있는지, 내가 영어 선생이 아니라 역사 선생을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하여 시나브로 세월 타령하면서 스페인어를 배우겠다는 다짐이 새해 결심이 되고서도 1년이 훌쩍 넘어 버렸다. 사실 지인들 앞에서 스페인어 공부 이야기를 일부러 꺼내기도 하였는데 이렇게 공언하고 나면 그 말을 지키기 위해 더 열심히 하게 될 것 같았고, 또 모처럼 만나는 지인이 혹시라도 물어보기라도 하면 크게 자극을 받아서 공부의 끈을 놓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나의 스페인어 공부에 관심을 가지지도,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공부 열정은 점점 시들어 갔고 역사 공부로 인해 야기된 스페인어 공부가 이제 각각 따로 노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주 3회 이상 매 10분 정도의 공부로 나타난 나의 스페인어 실력은 거북이가 산을 넘듯이, 아니 달팽이가 기어가듯이 그렇게 늘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몇 달째, 아니 1년을 훌쩍 넘기고도 멀리서 보면 제자리에 머문 듯하였다.


스페인어에 대한 공부 욕구는 5년 전에 온통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중남미(포르투갈어를 쓰는 브라질은 제외하지만, 알고 보면 포르투갈어나 스페인어나 큰 차이가 없다.) 여행을 했을 때도 막연하게 꿈틀거렸고, 돌아와서도 한동안 후회스러웠던 기억이 생생한데, 일상으로 돌아온 당시로는 그저 미지의 세상에 대한 그리움으로 흘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흘러 몇 개월 전부터 계획한 스페인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지금, 다시 돌이켜 보며 현지에서의 스페인어 사용을 반추해 보았다. 기본적인 인사말이야 그렇지만 그 이후 대화는 전혀 시도하지도 못했고, 길을 물어보려고 해도 스페인어로 물어보았을 때 순간적으로 현지인들의 이목을 끌 수는 있겠지만 그들이 답하는 스페인어는 내가 순순히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 이후의 불안감으로 나도 모르게 계속 영어로 대화를 하려고 하는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사실 어디 가나 영어가 편했고 그들도 내가 외국인이니 당연하게 영어로 응답하게 되는데 굳이 말도 안 되는 스페인어를 억지로 쓰려고 하는 것도 오지랖이라는 생각마저 들게 하였다. 하루 일과가 끝나고 곰곰 생각하면 나의 스페인어가 제자리에 머무르고 있거나 아니면 오히려 뒷걸음친 것 같았고 그나마 알던 단어가 순간 생각이 나지 않는 상황도 여러 번 반복되면서 만감이 교차하였다.


이제 현지에서의 허탈감을 떨치고 다시 새로 조금씩 배워나가기로 마음을 먹어야겠다. 그동안의 공부를 통하여, 기본적인 몇 가지 표현이라도 말할 수 있었고 그것으로 그간의 공부가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언어 학습은 평생 지속되어야 하는 과정이라고 마음을 고쳐먹고 스스로를 자책하지 않기로 했다.


다행한 것은 나이가 들수록 우리 뇌를 꾸준하게 사용하는 것이 장수에도 도움이 되며, 노인성 치매에 걸리지 않을 확률이 매우 높다고 하니 그걸로라도 위안을 삼아야겠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