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가해자’였던 베트남戰
베트남 정부, 한국 사과에 ‘무대응’
베트남 언론, 문재인 사과 한줄도 보도 안해
승전국 자부심·피해자와 정부 분리 등 원인
국정원 자료 공개 시 파장 전망… 왜 파병했나 논란 여전
“적인지 민간인인지 구분이 안됩니다. 전선이 구분되지 않아요. 맹호작전의 경우에는 사살율이 1:200이나 됐습니다. 그 때의 전과는 사실 그대로였습니다”
베트남 전쟁의 영웅으로 평가받는 고(故) 채명신 중장은 베트남 전쟁이 끝난 이후인 1969년 8월 국방부 2군사령관실에서 열린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월남전과 같이 전선이 구분되지 않는 형태의 전쟁에서는 주민들의 신망, 즉 주민들이 우리를 신뢰하고 호흡을 같이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가장 큰 전과입니다. 전선이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은 전장에서 적을 많이 죽였다는 것은 '양민을 많이 죽였다’는 결론 밖에 안됩니다”고도 말했다.
채 중장이 밝힌 ‘맹호작전’은 1965년부터 1973년 사이 베트남 중부(푸캇, 퀴논, 송카우, 닌호아)를 장악했던 국군 맹호부대가 행한 작전을 가리킨다. 문제는 맹호작전 당시 베트남 양민들에 대한 학살이 자행됐다는 점이다. 여전히 베트남의 중부 그곳에선 한국군 증오비가 마을마다 서 있다.
▶베트남 정부, 왜 문재인의 사과를 거부했나= 지난 2018년 3월 우연치 않은 기회를 얻어 베트남을 방문했다. 당시 베트남 방문의 핵심은 동남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한국과의 교역량 최대치를 기록하고 있는 베트남을 필두로 ‘신남방정책’을 확고히 하는 것이었다. 외교 문제의 핵심은 과거 1960년대 있었던 베트남전 양민학살에 대해 한국 정부가 베트남에 사과를 하느냐 여부였다. 당시로선 신남방정책이야 박항서 감독의 활약과 K팝 인기, 그리고 이미 상당히 활성화된 한국-베트남 교역 덕분에 거칠 것은 없었다. 내가 가졌던 관심은 ‘문재인의 사과’였다.
사실 문제는 베트남 출발 전부터 있었다. 당시 한국에선 ‘베트남에 사과를 하자’는 여론이 크게 일고 있었다. 문재인 정부 역시 ‘사과 의사’를 베트남에 타진했다. 그러나 정작 사과를 받아들이는 당사자 측인 베트남 정부가 한국 정부의 ‘사과 의지’를 부담스러워했다. 당시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사과를 하겠다는 한국 정부의 의사에 베트남 정부가 ‘사과는 필요없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안받겠다는 사과를 억지로 하는 것도 외교의 결례”라고 말했다.
사실 한국 내에선 과거 베트남전 참전 당시 베트남 민간인들을 학살한 한국 군인들의 학살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꾸준히 제기돼 왔다. 매반 침략만 받았던 한국의 역사에 ‘가해의 역사’가 있어서는 안된다고 믿는 우익세력들을 제외하면 대체로 ‘사죄가 필요하다’는 데에 동의한다. 동의치 않는다면 이는 관련 사안에 대해 몰랐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 한국에서 ‘베트남에 사과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것은, 한반도를 식민지화 했던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 덕분이다. 한국부터 베트남에 사과를 해야, 일본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목소리에도 힘이 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역대 민주 정부 하에선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베트남에 과거의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해 ‘사과’를 했다. 1998년 김대중 전 대통령은 호치민 묘소를 방문한 자리에서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인들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고,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도 호치민 묘소에서 “우리 국민들은 마음의 빚이 있다. 베트남의 성공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말했으며, 문재인 대통령 역시 2018년 베트남 국빈 방문 중 “우리 마음에 남아 있는 양국 간의 불행한 역사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의 사과는 한국에서만 보도가 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베트남 양민 학살 사건에 대해 사과했다는 베트남 현지의 언론 보도는 단 한줄도 없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사과 뿐만 아니라 과거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과에 대해서도 베트남 현지 언론은 전혀 보도를 하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의 ‘불행한 역사’라는 중립적 표현 역시 베트남 정부와의 조율 하에 만들어졌다.
▶베트남 정부는 양민학살 피해자가 아니었다= 베트남 정부가 왜 한국 정부의 사과를 거부하는 지에 대해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베트남에서 만나는 외교관들, 현지 거주 한국인들, 정부 관계자들을 모두 만나 물었다. ‘왜 한국의 사과를 베트남 정부는 받아들이지 않는건가요?’라고 물었다. 답은 비교적 대동 소이했다.
베트남 현지에서 만난 베트남 정부 관계자는 “베트남 정부는 승전국으로서의 자부심이 있다. 전쟁에서 이겼는데 왜 사과를 받아야 하느냐. 그리고 굳이 사과를 하겠다고 한다면 베트남전은 미국이 일으켰다. 사과를 하려면 미국이 해야 하는 전쟁이다. 베트남 전쟁에 용병으로 참여했던 한국이 사과를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돈이 필요해서 한국에 군인을 보냈던 과거에 대해선 우리도 이해하는 바”라고도 보탰다.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한국이 사과의 주체가 되기는 부족한 것 아니냐는 인식이 그의 말에서 읽혔기 때문이다.
또다른 베트남 정부 관계자는 “베트남 역사적으로 보면 중국과도 여러차례 전쟁을 치렀고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인접국들과도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 끝까지 살아남은 자들의 후예가 오늘날의 베트남이다”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래에 얼마나 더 잘 살 것이냐이지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선 중요치 않다”고도 했다.
그들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미래를 위해 과거 역사 문제는 문제 삼지 않는다는 것인데, 사실 정부 대 정부 차원에서의 사과는 항상 경제적 보상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것이 가끔은 차관의 형태를 띌 수도 있고, 전쟁 배상금이 될 수도 있으며, 기술이전이나 군수품 판매 할인 등이 될 수도 있다. 여러 측면에서의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 또한 정부 차원의 사과이고 보면 경제 활성화 차원에서도 한국 정부의 사과는 득이 될 수 있는 부분이 크다. 그럼에도 베트남은 이를 거부했다.
풀리지 않던 의문은 베트남 순방 이후 베트남 역사를 한참이나 더 공부한 다음에 비교적 명확해졌다. 짧게 요약하면 과거 한국군으로부터 양민학살을 당했던 그 지방(베트남 중부~중남부)의 피해 주민들은 현재의 베트남 정부 구성원들과는 다른 사람들이기에 한국 정부의 사과를 받을 이유도, 받을 필요도 없다는 것이었다.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이 전쟁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남베트남 국민들, 특히 한국군이 자행한 양민 학살 때문에 죽은 지역 사람들은 대부분 남부~남중부 사이 지역에 거주하던 사람들이었다. 안타깝게도 이들은 하노이를 중심으로 한 북베트남에도, 호치민(옛 사이공)을 중심으로 한 남베트남에도 속하지 않는 베트남 내 변방 지역의 주민들이다.
베트남은 오늘날에도 정부 요직 진출을 위해선 출신지역이 중요 요소로 꼽히는데 정치 부문의 경우 대부분이 하노이를 중심으로 한 북베트남 출신 인사들이 중용된다.
▶예고됐던 ‘양민학살’… 박정희 “전투병 파병, 반드시 달성”=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양민 학살은 불가피한 측면이 컸다. 아니 양민 학살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보다 정확히는 양민이 죽을 가능성이 큰 전쟁에 한국군이 ‘참전 하겠다’고 극구 주장해 사단이 난 것으로 보는 것이 맞다.
1960년 당시 베트남 전쟁은 그때까지 미국이 치렀던 해외전과는 양상이 많이 달랐다. 중심 전선을 두고 전진과 후퇴가 반복되는 것이 그 때까지의 전쟁의 양상이었다면 베트남전은 ‘전선(戰線)’이 존재치 않았다. 앞으로 진격하면 뒤에서 적이 나타났고, 농사를 짓다가 총을 꺼내 공격해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여기에다 한국군이 상륙한 마을의 대부분은 베트남의 미래가 공산국가가 돼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다수의 경우 공산주의자 호치민을 지지하던 상태였다.
다들 알 듯이 한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여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요청 때문이었다. 케네디 정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1961년 미국측(러스크 장관)에 “우리 정부는 귀측에 대해 특별 경제안정 기금으로 1억 달러의 차관과 7000만 달러의 경제개발 차관 및 800만 달러의 기술원조를 요청합니다. 액수가 많다고 생각하기젰지만, 강력한 반공 국가(한국)와 60만 대군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돈”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박정희 대통령이 현재로 치면 조단위 자금을 요청하면서 미국 정부에 반대 급부로 제시할만한 카드가 마땅치 않았다는 점이다. 그 카드가 바로 미국이 고전을 벌이고 있는 베트남전에 한국군을 파병해 미국을 지원하겠다는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파병 요청’은 케네디가 사망(1963년)하고 존슨이 대통령이 된 뒤에야 받아들여졌다. ‘월남 파병 특수’가 한국에 불어닥친 것 역시 한국군이 파병을 한 직후, 대규모 미국의 원조가 한국에 실시되면서다.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가 TV며 라디오 등 신기한 물건을 가지고 돌아왔던 것은 1970년대 초다.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 당시 상황을 보면, 최초 파병은 1966년이었고 철수는 1973년이다. 파병 한국군의 총 규모는 모두 32만5517명이고 이 가운데 사망한 숫자는 5066명이다.
안타까운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 사건이 집중적으로 벌어진 것은 1968년 이후다. 베트콩이 월남을 향해 ‘구정 대공세’를 전국 14개 성의 주요 도시에서 벌였고, 이 때 미군과 한국군의 피해가 막심했다. 구정 대공세 이후로 미국 내에선 반전 여론이 커지는 등 위기에 봉착했다. 구정대공세르 피해를 입은 한국군들의 보복 양상이 본격화 된 것도 이 때다.
얼마나 많은 베트남 사람을 죽였느냐를 나타내는 ‘사살률’ 부대 평가도 한국군인들의 보복 심리에 불을 지폈다. 채명신 중장 표현대로 ‘1:200’이란 숫자는 정규군 간 벌였던 전쟁에서는 숫자로 표기 되기 어려울 만큼 높은 사살률이다. 한국군 1명이 사망할 때 적을 200명을 죽였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수의 민간인들이 적으로 간주됐음을 반증하는 지표로도 해석된다.
▶베트남 양민 학살… 국정원 “자료 공개”= 한국의 온라인 상에선 여전히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양민 학살 사건에 대한 진위 논쟁이 진행중이다. 월남참전군인회 등이 주축이 돼 한국군의 베트남 양민 학살은 불가피했다는 주장, 학살 양태에 대한 오류, 월남전 참전의 당위성과 한국군인들의 활약상 등이 주요 초점이다. 주목 되는 것은 국가정보원이 조만간 베트남에서 벌어진 과거 자료에 대해 공개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대법원은 지난 3월 25일 베트남 전쟁 당시 있었던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 사건과 관련한 국정원의 자료를 공개하라고 선고했다. 국정원은 “해당 자료가 공개되면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현저히 해칠 우려가 있다. 조사 당사자의 사생활이 침해될 수 있다”며 정보 공개가 불가하다고 주장했으나, 대법원이 이를 뒤집은 것이다.
이번 대법원 선고로 공개될 정보는 1968년 2월 베트남 중부 ‘퐁니·퐁넛 마을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해 국정원이 축적한 문서 목록이다. 실제로 문서 내용을 확인키 위해서는 보다 시간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문서 목록이 공개된 다음 또한번 정보공개 청구를 위한 후속 소송이 뒤따라야 실제 내용 확인이 가능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기존에는 단 한번도 공개되지 않았던 한국 정보기관의 정보이기에 그동안 있었던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한 논란도 일정 부분 정리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