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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밥 Mar 18. 2021

또 좀비?조선구마사…한국판 좀비물이 불편한 이유

좀비는 흑인 노예 수탈 역사가 백인들에 선사한 원죄

한국판 좀비물 ‘조선구마사’ 22일 첫 상영

‘좀비’는 백인 농장주들에 비친 흑인 노예가 원형

가혹 수탈 자행 백인들의 잠재 공포가 ‘좀비’로 구체화

세계 최빈국 아이티가 좀비의 고향


오는 22일 또 한 편의 좀비물 ‘조선구마사’가 첫 방송된다. 소개된 ‘조선구마사’의 키워드를 꼽으면 악령·좀비·동서대결·퇴마술 정도다. 신경수 감독은 ‘우리 좀비는 다르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지만, 부산행 이후 ‘한국판 좀비물’이 이미 장르로 굳어진 마당에 ‘조선구마사는 다르다’는 주장엔 힘이 실리지 않는다. 다만 좀비와 사극이란 이종교합을 꽤 성공적으로 수행해 낸 ‘킹덤’이 있었고, 1000만 관객을 불러모았던 ‘부산행’도 있었으며, 공포 영화의 명작 반열에 오른 ‘곡성’도 좀비 요소를 가미해 꽤나 큰 성공을 했었으니 한국판 좀비물은 어찌보면 이젠 대세가 된 듯도 하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한국판 좀비물이 다소간 불편하다.

▶좀비의 기원... 아이티= 이유는 좀비의 역사가 흑인 노예의 역사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좀비가 최초로 탄생한 곳은 아이티로 알려진다. 소위 세상 모든 좀비의 고향이 이곳이다.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인 아이티에선 오늘날에도 법으로 사람의 시체를 좀비로 만드는 것을 살인죄와 동일하게 처벌하고 있다고 하니, 아이티에선 최소한 좀비는 판타지물의 대상이 아닌 현실의 문제 일 수도 있다.

근세 아이티는 비극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아이티는 쿠바 섬 동쪽 80킬로미터 히스파니올라 섬에 위치한 국가다. 히스파니올라 섬 서쪽은 아이티가, 동쪽은 도미니카 공화국이 들어서 있다. 공교롭게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처음 발을 디뎠던 그곳 아메리카가 바로 아이티가 소재한 히스파니올라 섬이다. 1492년 콜럼버스가 첫 발을 내디딘 그곳은 후에 피의 역사로 점철된다.

히스파니올라 섬에는 원주민들인 타이노 족과 아라와칸 족이 살고 있었는데 스페인의 학살과 질병으로 대부분의 인구가 사망했다. 16세기 말 아라와크 족의 규모는 콜럼버스가 히스파니올라 섬에 도착하기 전과 비교하면 10분의 1 수준으로 급감했다. 소위 종족 대학살이 유럽인들에 의해 자행된 것이다. 17세기에 설탕은 유럽에서 아주 비싼 가격에 팔리는 상품이었다. 설탕 붐이었다. 

히스파니올라 섬이라는 거대한 땅이 있는데 그곳에서 일할 노동자들이 없자 히스파니올라 섬을 지배했던 프랑스는 다수의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을 아이티로 옮겨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 동원했다. 사탕수수를 설탕으로 만드는 작업은 끔찍한 집약적 노동을 필요로 했다. 다 자란 사탕수수는 키가 4미터가 넘었는데, 4미터가 넘는 사탕수수를 수확해 그 즉시 롤러 압착을 통해 즙을 짜내야 하고 이를 고농도로 정제 키 위해선 불을 피워야 했다. 불을 피우기 위해선 땔감을 구해야 했고, 땔감은 가까운 산에서 채집해야 했다.

압착 작업의 경우 롤러에 작업자의 손가락이 낄 경우 손과 팔, 그리고 몸까지 딸려 들어가 사망에 이르게 된다. 이를 막기 위해 노예들은 팔을 자르기 위해 늘 손도끼를 들고 다녀야 했고, 농장주들은 쉼 없이 일을 시키기 위해 가혹한 매질을 노예들에게 했다. 게으른 노예들에겐 목테(차꼬)를 끼워 며칠 씩 잠을 제대로 누워서 자지 못하게 하는 형별을 내렸고, 오랜 시간 동안 서서 작업을 해야 하는 노예들은 거의 대부분 다리 병에 걸렸다. 

오늘날에도 아이티는 나무가 없는 나지가 국토 대부분을 차지한다. 과거 설탕 정제를 위해 대부분의 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했기에 벌어진 일이다. 오늘날 아이티의 국민 구성은 95%가 아프리카계 흑인들이다. 소위 노예들의 후손이 아이티 국민들이다. 백인 비율은 2%도 되지 않는다.

▶백인 공포가 만든 좀비= 아이티의 압도적 흑인 구성비는 왜 아이티가 좀비의 고향이 됐는지를 설명하는 주요 요인 중 하나다.

아프리카에서 수출된 노예들이 내렸던 곳. 정 중앙에 있는 섬은 쿠바섬이고 우측이 히스파니올라 섬이다. 히스파니올라 섬의 서쪽이 좀비의 고향 아이티다.

과거 플랜테이션 농장엔 백인 1명의 농장주가 사용한 흑인 노예들은 농장마다 적게는 200여명에서 많게는 500여명에 이르렀다. 거느린 노예의 수는 수확량 그리고 부와 직결됐다. 노예는 당시에도 비교적 비싼 자산으로 분류가 됐는데 그럼에도 사탕수수를 재배해 거둬들이는 막대한 농장주들의 부는 해가 갈수록 늘어만 갔다.

백인 농장주들의 가장 큰 공포는 압도적 수의 우위를 가진 흑인들의 반란이었다. 실제로 아이티에선 적지 않은 수의 흑인 노예 반란이 있었는데, 농장주를 살해하고 도망간 흑인 노예들이 모여사는 마을이 아이티 섬 내에 있을 정도였다. 백인 농장주들은 이를 막기 위해 더더욱 강한 노예 통제에 나섰다. 

그 가운데 가장 무서웠던 것이 바로 부두교 의식이었다. 아이티로 끌려온 흑인 노예들은 서아프리카 토착 종교인 부두교 신자들이 많았는데, 밤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의식을 치르는 부두교 행사는 백인 농장주들에겐 공포였다. ‘반란 기획’이란 인식이었다. 그 때문에 부두교 의식은 백인 농장주들에겐 괴이한 것, 공포스러운 것으로 인식됐다.

우리가 원용하는 오늘날 좀비의 특성은 백인 농장주들의 눈에 비친 흑인 노예들의 모습에 매우 가깝다. 그들은 생각 없이 몰려다니고, 주술사의 조종을 받고 있으며,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지르고(영국인들은 흑인들에게 언어가 없다고 믿었다), 뇌는 이미 없어졌으며, 손과 발은 병에 걸려있고, 그 흉측한 존재에 생명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키 힘들며, 살짝 스치기만해도 괴질환에 걸릴 것만 같고, 주변 환경 변화와 과거의 일을 인식·기억하지 못하는 흉측한 존재다. 생명이 있을 것이라곤 상상키 힘든 이것은, 그래서 죽어도 죽지 않는 유럽계 괴물 ‘언데드’계의 신종 상품 ‘좀비’로 명명된 것이다.

말하자면 좀비물은 백인 농장주들이 흑인 노예들에 대해 가졌던 근원적 공포감이 만든 창작물이다. 뱀파이어가 시체 공포에서 비롯됐고, 늑대인간이 숲에 대한 공포가 만든 창작물이었다면, 좀비물은 백인들이 오랜 기간 흑인들을 노예로 가져다 부렸던 백인들에 의한 수탈의 역사가 공포 창작물로 재탄생 한 것이다. 좀비 소설 가운데엔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는 시체들(1929년)’이란 제목의 소설도 있다.

좀비의 기원이 아이티였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아이티는 섬이다. 백인 농장주 1명이 거느렸던 압도적 흑인 노예들의 수를 고려하면 흑인 반란은 곧 백인 농장주들에겐 죽음을 의미했다. 섬에서 탈출로를 찾지 못한 채 고립돼 죽어갔던 백인 농장주들의 이야기가 1900년대 초반 유럽 소설가들에 의해 각색·윤색돼 좀비의 원형으로 자리잡게 됐다.

‘조선구마사’ 류의 ‘한국판 좀비물’이 불편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한국인들은 백인들이 행했던 가혹한 노예 경영의 역사가 없다. 흑인 노예들로부터 테러를 당할 만큼 나쁜 짓을 한 적도 없다. 여기에다 킹덤이나 조선구마사는 사극 요소를 가미했다. 사극은 과거의 일을 다루는 역사 창작물일진데, 조선엔 좀비도 없었고 인종차별적·비인간적 노동도 존재치 않았다.

좀비물이 대세란 점에 동의한다. 꽤 잘 만든 킹덤을 보고 두번째 시리즈를 손꼽아 기다렸고, 이어 곧 나올 조선구마사 역시 흥행 요소를 두루 갖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한국판 좀비물이 불편하다. 혹시 우리 사회가 지향했던 바가 곧 서구화였고, 이 때문에 그들(백인)의 공포를 우리(한국인)의 공포로 받아들이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좀비는 그냥 괴물이 아니라 탄압받고, 착취당했던 오늘 흑인들의 선조들인 탓이다.

▶좀비 초기 창작물들= 좀비 영화의 효시로 알려진 ‘화이트 좀비’는 배경이 아이티다. 결혼식을 위해 아이티로 들어온 백인 여성이 부두교의 흑마술에 걸려 좀비가 된다는 내용이 줄거리다. 

백인들의 흑인들에 대한 공포는 상상 이상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영화 ‘화이트 좀비’의 첫 장면은 밤에 신부가 마차를 타고 가다가 흑인무리 대여섯명이 땅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무엇 때문에 길을 막고 있느냐’는 백인의 일갈에 흑인 노예들은 주섬주섬 물러서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또다른 1900년 초 좀비 소설인 ‘검은 카난’에서는 좀비는 흑마술을 부리는 매혹적인 여자 사제에 의해 호출되는 정체모를 남성으로 묘사되고, 한이 맺혀 죽지 못한 존재(소설 할로 맨)거나, 또는 생체 실험의 대상으로도 묘사된다.

좀비를 다룬 초기 문학들은 대부분 흑인들에 의한 반란을 주요 소재로 사용된다. 이 때 등장하는 것이 멀리서 들리는 북소리, 수십명씩 횃불을 켜고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우고 있는 흑인들로 묘사된다. 원주민 폭동이 벌어지고 백인 주인을 위해 싸우는 물라토(백인+흑인 혼혈)도 소설에 등장한다. 사실 문학 소재는 대부분 현실 세계에 있었던 일을 차용하는 일이 많은데, 1712년 뉴욕 노예 반란이나 1800년대 체로키 노예 반란은 실제 있었던 노예들의 반란이었다.

좀비의 원형이 아이티에서 나타난 것 역시 역사적 연원이 있다. 아이티는 아메리카 최초로 흑인 노예들에 의한 혁명이 성공한 국가다. 1791년 흑인노예들을 주축으로 한 아이티 혁명 세력은 투생 루베르튀르를 중심으로 뭉쳤고, 영국이 1798년 군대를 파견했음에도 흑인 노예들은 영국을 격파해 노예들은 모두 해방됐다. 나폴레옹은 이후 투생에게 ‘항복하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했고 나폴레옹의 말을 믿었던 투생은 프랑스로 넘어갔다가 감옥에 갇혀 죽게됐다. 프랑스는 자국 최고의 설탕 플랜테이션 지역이었던 아이티에 노예제를 다시 시행하려고 했으나 이 마저 실패하면서 1804년 아이티는 아메리카 최초의 공화국이 들어선다. 흑인 노예 반란이 결국 혁명으로 이어진 실제 사례가 아이티다. 따라서 아이티는 백인들에겐 돼먹지 못한 니그로들에 의해 점령된 ‘공포의 땅’ 정도로 기억됐고, 그것이 영국 등 유럽 소설가들이 그 끔찍한 곳 아이티를 끔찍한 괴물들이 사는 ‘좀비’의 고향으로 창작해냈음 직 하다.

▶영국인들이 가졌던 흑인들에 대한 생각 (제국. Niall ferguson. p135)

▷노예 상인 존 뉴턴 “아프리카인들은 자유에 대한 관념이 전혀 없다. 자신들조차 자유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인데, 어느 누가 아프리카인들로부터 자유를 빼앗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백인 농장주 에드워드 롱 “아프리카인들은 재주가 없고 교양이나 과학에서 진보를 이룰 능력이 거의 없다. 그들은 계획이나 도덕 체계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도덕의식도 없다”

▷노예제 찬성자 제임스 보즈웰 “아프리카의 자손들은 항상 노예들이었기 때문에 니그로들이 억압받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기독교 선교사 존 톨벗(1736년) “일반적인 계산에 의하면, 새로 수입된 니그로들의 40퍼센트가 길들이는 과정에서 죽는다”

▷농장주 에드워드 리 “100명의 노예를 가진 농장주가 노예의 수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1년에 8명에서 10명을 추가로 사 올 필요가 있다”


♧참고 문헌

좀비 연대기 (책세상. 정진영 옮김)

제국 (민음사. 닐 퍼거슨)

빈곤의 연대기 (갈라파고스. 박선미 김희순)


♧노예무역 데이터베이스

https://slavevoyage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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