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그렸던 2박 3일간의 사파리 여행을 뒤로하고 케냐의 2대 도시이자 관광 명소로 꼽히는 몸바사로 이동했다. 나이로비에서 몸바사 까지는 버스로 8시간 걸렸다. 대개의 배낭여행객들이 그렇듯 장시간 이동은 밤버스가 최고다. 촉박한 일정과 숙소 비용을 아끼는 방편으로는 밤버스 만한 것이 없다. 나이로비 민박집에서 근무하는 직원 2명이 함께 나와 버스 티켓을 사줬다. “잠보. 라파엘과 도미니크”
▶사고가 났나?… 범인은 기린= 장시간을 타야하는 밤버스는 비교적 신식이었다. 좌석엔 테이블이 준비돼 있었고 에어컨도 나왔다. 깔끔한 버스에 오른 시각은 밤10시께였다. 낮 시간 동안 사파리 투어의 추억과 내일 아침 도착할 몸바사에 대해 공부를 하다 잠이들었다. 출발한지 30분쯤 되자 버스 차량은 시내를 벗어났는지 속도를 높였다. 가로등 하나 없는 밖은 칠흑처럼 어두웠고 간혹 지나가는 차량의 ‘쌩~’ 소리에 그곳이 고속도로인 듯 했다.
한참을 잠을 자고 있는데 버스가 급제동했다. 순간적으로 ‘사고가 났구나’는 생각에 눈이 번쩍 뜨였고 나는 앞 좌석을 움켜쥐고 충격에 대비했다. 다행히 내가 탄 버스가 무엇인가를 들이받지는 않았다. 쌔까맣게 잠을 자던 버스 내 승객들이 웅성웅성하면서 무슨일인지를 확인을 했다. 나도 그들에게 물어봤다. “무슨일인가요? 사고가 났나요?”라고 묻자 버스 승객들은 내게 ‘기린 떼가 고속도로를 지나가는 중’이라고 답해줬다. 나는 “기린이 고속도로에 자주 출몰하나요?”라고 주변 승객에게 물었다. 그는 “이런 일은 거의 없다. 나도 오늘 처음본다”고 답했다.
심야에 고속도로에서 갑자기 멈춘 버스는 대략 10분 정도 서있다가 다시 출발했다. 기린 떼는 대략 7~8마리 정도 돼 보였는데 기린 떼 중엔 아직 어려 보이는 기린도 포함돼 있었다. 느릿느릿 지나가는 기린 떼는 한국에선 보기 힘든 풍경이다. “여기는 아프리카였지? (TIA·This is Africa)”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아프리카엔 동물이 많더냐?’고 물으면 “고속도로에 기린떼가 지나가는 정도 외엔 그렇게 많지 않아요”라고 답을 해줘야 겠다고 마음 먹었었다.
기린의 크기는 가까이에서 보지 않으면 그 크기를 상상키 어렵다. 다 큰 기린의 크기는 5미터에 이르는데 그 크기는 2톤이나 된다. 다 큰 성인 기린은 사자떼가 달려들어도 공격 부위(대부분은 엉덩이)가 워낙 높아 쉽게 사냥에 성공키 어렵다. 기린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을 때는 숫사자가 사냥에 가담하더라도 사냥이 불가능한 종이다. 기린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혀로 높은 나무의 잎과 열매를 따먹는데, 그 혀의 길이는 어른 팔뚝보다도 길다. 기린은 천적이 없는 것으로도 알려지는데 가장 큰 위협은 아마 인간의 공격 아닐까 생각한다.
고속으로 달리던 대형 버스와 기린이 충돌했다면 아마 기린은 죽었을 가능성이 크고, 그 못지 않은 충격이 버스에도 가해져 아마 차량이 뒤집히는 등의 큰 사고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행히 버스 운전사가 급제동을 한 것이 다행이었다. ‘여행자 보험에 가입을 못했지?’라는 생각도 따라 들었다.
기린은 중국을 비롯한 동양에 저 멀리 서쪽에 아프리카라는 대륙이 있음을 처음 알린 상징적 동물이기도 했다. 명나라 때 정화는 당시 세계 최대의 선단을 이끌고 세계 탐험에 나섰다. 정화의 함대는 대형선박 63척·소형선박 255척 선원 2만7800명으로 구성됐는데, 모두 7차례의 원정 가운데 4번째 원정을 마친 정화는 1415년 10월 기린을 황제에게 바쳤다.
▶상아가 팔려나간다= 관광지이자 과거 상아와 노예를 수출하던 무역기지였던 몸바사 입구에는 거대한 상아 모양의 입구 게이트가 만들어져 있다. 이 곳이 상아를 주로 팔아댔던 곳이란 것을 상징하듯 오늘도 그곳에는 거대한 상아 모양의 장식이 몸바사로 들어가는 관광객들을 반긴다. 안타까운 것은 코끼리의 부산물이었던 상아 외에도 ‘검은 것’이라고 불렸던 노예들도 함께 수출됐다는 점이다.
지금은 육지화 된 몸바사 항 최초에는 산호들로 이뤄진 섬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몸바사는 1300년 이전까지 대부분 무슬림이었던 아랍 상인들에 의해 점차 무역 항구로 활성화되기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확대된 것은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스코 다가마에 의해 주요 항구로 낙점 된 이후다. 몸바사의 주요 관광 명소중 하나인 ‘포트 지저스(Fort Jesus)’를 만든 것 역시 포르투갈에 의해서다. 포트 지저스는 지어진지 400년이 지났으나 여전히 큰 훼손없이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포트 지저스를 하늘 위에서 바라보면 십자가 모양으로 건축됐다.
17세기에 몸바사는 오만제국의 점령 하에 들어갔고, 19세기 들어선 영국이 다시 지배했다. 오늘날 케냐의 수도가 나이로비로 이전하게 된 것 역시 영국에 의해서다. 영국은 동아프리카 철도를 부설키 위해 중간 기착지로 기후가 온화하고 토양이 비옥한 땅 나이로비를 중간 거점으로 삼아 1000km가 넘는 동아프리카 철도를 부설했는데, 당시 만든 철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기차가 다니고 있다.
몸바사 항구에 설치된 포트 지저스. 하늘에서 본 포트 지저스는 십자가 모양이다. 포르투갈에 의해 건설됐다. 건설된지 400년이 지났으나 여전히 별다른 훼손 없이 굳건하다.
‘포트 지저스’ 지하에는 노예들이 잠시 머물렀던 지하 감옥도 있다. 어두 침침한 이곳 바닥엔 과거 노예들을 묶어둘 때 사용하던 쇠사슬을 매 둘 수 있는 고리들이 있는데, 최초엔 병사들의 숙식처로 사용되다가 이후 노예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그 용도가 노예 보관을 위한 것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이곳에 모인 노예들은 하루나 이틀 정도 모인 다음 오늘날 탄자니아가 된 잔지바르 섬으로 이동이 됐는데, 잔지바르를 거쳐 수출된 노예들은 아랍과 인도, 중국 등으로 팔려나간 것으로 알려진다.
가격을 높게 받을 수 있는 노예는 거세된 흑인 젊은이로 알려진다. 남자 노예가 거세가 된 경우 힘을 노동에만 쏟을 수 있고, 인종이 섞일 우려가 적어지며, 젊을 수록 잔여 기대 수명이 더 길 것이란 전망 때문이다. 가격이 낮은 노예는 대체로 여성 노예였으며, 특히 아이를 안고 있는 여성이나 병에 걸린 노예는 제 값에 팔리지 못했다.
오늘날 국제 시장에서 상아 무역은 거의 금지된 것으로 알려진다. 가장 최근에 상아 밀수 일당이 붙잡힌 것은 2015년으로 이들은 법원에서 20년형을 선고 받은 바 있다. 그럼에도 일각에선 한해에 10톤 이상의 상아가 몸바사 항구를 통해 해외로 수출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상아는 대부분 컨테이너에 밀봉돼 차(tea)나 다른 물품으로 위장된 채 수출된다. 상아는 케냐 뿐만 아니라 인근 국가인 우간다, DR콩고, 르완다, 탄자니아에서 밀렵된 코끼리들로부터 나온다.
상아를 노린 코끼리 밀렵의 성행 때문에 코끼리 임에도 아예 상아가 없는 코끼리들이 늘어난다는 보도도 있었다. 상아가 있는 코끼리의 경우 밀렵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고, 이 때문에 상아 없는 암컷 코끼리의 생존 가능성이 커지면서 상아 없는 코끼리의 개체 수가 늘어나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총과 노예의 물물교환… 대륙의 DNA를 바꿨다= 오늘날 번성하고 있는 아프리카 해안 항구 도시는 대부분 몸바사처럼 노예들을 주 상품으로 팔았던 아픈 역사들을 가지고 있다. 아예 이름마저 노골적인 ‘노예 해변(slave coast)’과 ‘상아 해변(ivory coast)’은 아프리카 대륙의 주된 수출품이 노예와 상아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황금과 후추,수백년간의 노예 무역은 노예제도가 폐지된지 100년이 넘게 지났음에도, 그의 후손들에 의해 기억되고 전수되고 있다. 풀려난 노예가 원주민 노예를 박해 탄압했던 역사를 가진 라이베리아나, 소수 백인들이 흑인들을 지배하는 체제가 여전한 남아프리카공화국, 이미 독립국 선포를 한지 30년이 넘었으나 여전히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민주 국가 소말린랜드 역시 국가 불인정의 원인은 백인 위주의 국제 사회가 만든 국제 규격이 주 원인이다.
오늘날 노예제에 대해 ‘찬성’ 입장을 밝히는 이는 없다. 노예제는 인류 역사 고래로 과거부터 전수돼 내려오던 제도고, 이는 어느 문화·문명 내에서도 형태와 구체적인 방법은 다르지만 있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다만 아프리카 대륙의 경우 그 침탈 속도와 폭이 과도했고, 이는 유럽인들이 그들에게 전해준 총기류가 주 원인이 됐다. 노예의 상업화가 아프리카 대륙의 DNA를 바꿨다. 노예가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이 되자, 인신매매가 극성을 부리게 된 것이다.
동아프리카 최대 노예 무역항이었던 잔지바르에서 노예 거래가 이뤄지고 있는 모습. 몸바사에서 선적된 노예들은 잔지바르로 이동됐고, 이후 아랍과 인도 등지로 팔려나갔다.
유럽인 가운데 처음으로 아프리카인을 노예로 만든 장본인은 1441년 포르투갈의 엔리케 왕이다. ‘항해왕’이라는 그의 별칭은 사실은 유럽에 처음으로 노예를 수입한 왕으로 수정돼야 할 듯 하다. 엔리케의 명을 받은 곤사베우스는 사하라 사막 이남인 보자도르 지역에 당도해 아프리카인 10명을 죽이고 4명을 포로로 잡아왔는데, 그 포로들 중 일부가 고위급 인사였는지 ‘자신을 풀어주면 노예 6명과 바꿀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곤사베우스는 실제로 그를 풀어준 대신 노예 10명 외에도 사금까지 받아서 엔리케 왕에게 헌납했다.
‘사하라 남쪽 지역’은 사람이 살 수가 없는 곳이라고 여겼던 유럽인들의 인식이 처음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첫 항해에서 성과를 거두자 엔리케 왕은 ‘더 많은 부’를 탐하기로 했다. 최초 곤사베우스의 항해가 고작 배 1척으로 시작했다면, 이듬해엔 아예 카라벨 선박 6척을 무장시켜 서아프리카로 원정을 보냈고, 이번엔 처음보다 월등히 많은 230명의 노예를 잡아왔다.
변방 포르투갈의 왕 엔리케가 서아프리카 무역(정확히는 노예무역)으로 큰 돈을 번 것으로 알려지자 당시 교황이었던 니콜라우스 5세는 1455년 교황교서를 내려 엔리케가 획득한 지역과 향후 발견할 지역에 교회나 수도원을 지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교황은 무역독점권도 포르투갈에 부여했다.
아프리카인 다수가 짧은 기간 내에 막대한 규모로 노예화돼 수출됐던 것은 아프리카 부족 추장들과 지배계급 엘리트들이 노예 수출로 개인적 부를 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500년 초 최초 성인 남성 1명 노예의 가격은 금 1온스였는데, 1800년에는 금 14 온스로 치솟았다. 여자 흑인 노예는 2온스 수준이었다. 동아프리카 최대 흑인 노예 수출항이었던 잔지바르의 노예상(像)
▶흑인 노예를 팔았던 흑인들= 중세 유럽 세계가 흑인들을 노예로 사들이는 무역에
대해 별다른 거부감을 갖지 않았던 이유는 기독교는 노예제도에 대해 근본적으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강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많은 사상가에게 영향을 준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노예는 도구 중의 도구다. 모든 도구가 타인의 의지를 따르거나 미리 예측하고서 제 기능을 수행한다면 노예를 둘 일도 없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그같은 주장은 그가 속했던 귀족 계급 사회를 옹호하는 철학적 배경으로도 작용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도 역시 노예제는 오래도록 있어왔던 그래서 연원을 추산키 어려울 정도로 오래된 사회제도 중 하나였다. 최초의 아프리카 노예를 사냥했던 엔리케 왕이 손쉽게 노예를 실어 유럽으로 나를 수 있었던 것 역시 전쟁 포로나 죄를 저지른 경우 노예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아산테, 다호메이, 베냉 왕국 등은 아프리카 노예들의 주요 공급처였는데 해당 국가의 지도층들로서도 노예를 수출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적었다. 아프리카 추장들과 부유한 엘리트들은 일정 수의 노예들을 거느렸는데, 그들에게 노예는 흔한 것이었고 유럽인들이 가져다주는 총과 화약은 드문 것이었다. 거래는 양측 모두에게 큰 만족감을 줬다.
문제는 더이상 팔 노예가 사라졌을 때 생겼다. 아프리카의 상품 가운데 유럽 세계에 가장 인기 있었던 것은 노예였는데 더이상 팔 수 있는 노예가 사라지자 거의 대부분의 형벌이 노예제로 바뀌게 된 것이다. 부족으로 이뤄진 아프리카 사회가 붕괴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고도 노예로 삼을 사람이 부족해지면 그들은 납치와 유괴도 서슴지 않았다. 유럽인들이 가져오는 상품은 마음에 드는데, 이를 바꿀 수 있는 자원이 없게 되자 노예를 만들어내기에 까지 이르른 것이다. 실제로 미성년자들을 납치하고 ‘아기 공장’을 운영한 것으로 알려진 보코하람의 주 활동 무대도 서아프리카의 자원 부국 나이지리아다.
기록에 따르면 전체 노예의 3분의 1은 어렸을 때 납치가 된 경우였고, 나머지 3분의 1은 친척이나 윗사람에 의해 노예로 팔린 경우였으며, 3분의 1 가량은 죄를 지은 경우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주술이 범죄시 되던 분위기여서 ‘주술을 했다’는 이유로 죄가 있는 것으로 간주돼 노예가 된 경우도 있었다.
소위 아프리카 대륙의 사회 지도층의 필요에 의해 이뤄진 이같은 노예무역은 그러나 아프리카 대륙 전체로 놓고 보면 후에 어마어마한 비용으로 돌아오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인구 급감이다. 땅은 넓은 데 그곳을 경작하거나 가꿀 수 있는 인력이 부족할 경우 거대한 땅은 아무런 경제적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다.
아프리카 대륙의 인구는 노예 수출이 본격적으로 이뤄진 뒤 비교적 큰 폭으로 줄었다. 특히 세계 인구 가운데 아프리카 대륙의 인구 비중은 1800년대 초 7%로까지 떨어졌다. 노예 10명이 수출되려면 포획돼야 하는 노예 수는 20명이 넘는다는 추정도 나온다.
▶아프리카, 인구가 줄었다= 서기 1000년 세계 인구가 2억67800만명이던 시절 아프리카의 인구는 3300만명으로 세계 인구의 12.3%가 아프리카 대륙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전 세계 인구에서 아프리카 대륙의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1500년에는 10.5%였고, 이 비중은 1820년에는 7.1%로까지 떨어진다. 기록된 것만으로도 1500년~1800년대까지 아프리카에서 해외로 수출된 노예들의 수는 2000만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지는데, 실제로는 이보다 몇배 이상의 노예 수출이 이뤄졌을 것으로 추산된다. 아프리카 대륙의 인구수를 줄일 정도로 개별 영역에서의 노예 수출은 횡행했던 것이다.
인류학자 패트릭 매닝(Patrick Manning)은 1700년부터 1850년까지 노예 900만명을 카리브해안으로 보내기 위해서는 아프리카에서 포획돼야 하는 노예의 수는 2100만명에 이른다고 추정했다. 실제로 아프리카 대륙 밖으로 수출되기 위해선 수출된 노예들보다 2배 이상 많은 수의 노예들이 포획돼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인간의 경우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에 대해 받는 스트레스가 매우 크고, 포획 과정에서 부모나 형제와의 이별 등으로 인해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가 빈발했다. 매닝은 실제로 포획된 노예들 가운데 절반 가량이 각종 이유로 노예화 된 지 1년만에 죽는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매닝은 또 자료를 바탕으로 아프리카에 남은 인구의 규모와 구성을 추정한 결과 노예 무역 때문에 1750년~1850년 사이 아프리카 사하라 남부 등지에서 인구가 거의 증가하지 않았다고 추정했다. 기록상 남아있는 아프리카에서 수출된 노예의 수는 적게는 1800만명에서, 많게는 2200만명으로 추산된다. 오늘날 75억 인구의 규모와 비교하면 크지 않다고 볼 수도 있으나 1820년대 세계 인구가 10억명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어마어마한 수의 노예가 해외 수출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