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꼽슬이 Apr 03. 2024

제주 여행 원격 가이드 후기

부모님 여행 보내 드리기

이번 제주 여행은 여러 가지 이유로 갑자기 기획하게 되었다.


첫 번째 이유는, 부모님의 아시아나 항공 마일리지가 필요해서였고 (우리가 덴마크에 갔을 때 두 분을 프레스티지 좌석으로 덴마크에 모시려면, 마일리지 항공권을 사지 않고는 불가능한데, 두 분 다 마일리지가 없어서 가족합산 마일리지 항공권을 구매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두 번째 이유는, 엄마 생신 선물 할 것이 마땅치 않았는데 두 분의 여행을 풀코스로 준비하면 그것보다 좋은 선물이 없겠다 싶었다.


첫 번째 이유는 말씀드리기 뭐해서 슬쩍, 엄마 생신 2주일 전쯤, 생신 선물로 두 분 제주 여행을 보내드리려고 하는데 어떠시냐고 여쭤봤다. 그랬더니, 엄마에게서 나온 대답은,


"얘, 너네 아빠랑 단둘이 무슨 재미로 여행을 가니? 싫어."


아, 이건... 정말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언제나 우리와 가는 여행이라면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엄마였기에, 당연히 여행이라면 좋다고 하실 줄 알았는데, 아빠랑 단 둘이는 싫단다. 그러고 보니 두 분만 여행을 다녀왔다는 얘기는 들어본 기억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첫 번째 목적을 반드시 달성해야 했기에, 나는 그 말씀을 드리고 아빠한테도 한번 기회를 주시라고, 물어는 보시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딸 말이라면 거의 다 들어주시는 엄마이기에, 마지못해 그러마고 수락을 하셨다.


그날 저녁, 엄마와 다시 통화를 하며 어떻게 하시기로 했는지 물었더니, 아빠가 그러셨단다.


"선미투어로 가면 갈 수 있을 거 같은데?"


앗, 이건 혹 떼려다 혹 붙인 격. 여기서 '선미투어'란, 내가 출발부터 도착까지 모든 일정을 계획하고 다녀오는 여행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가족이 멤버가 되어 여러 가족이 함께 가는 여행 계획을 주로 내가 도맡아 짜다 보니, 그리고 만족도와 후기가 나쁘지 않다 보니, 어느새 내가 계획하는 여행에는 '선미투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이름의 작명 센스는 남편이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두 분만 여행을 가시기로 하여, 몇 날 며칠 고민하며 2박 3일의 여행 계획을 세웠다. 부모님 두 분만 가신다고 하니,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을 계획하는 것과는 정말 많이 달라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일단 비행기표를 아시아나 앱에서 예매했다. 그리고 2박 3일의 짧은 기간이니 내가 좀 더 익숙한 제주의 서쪽을 위주로 코스를 짜기로 마음먹고 애월 쪽의 리조트로 숙소를 예약했다. 렌터카도 저렴하면서 평이 좋은 곳으로 골라  K5 LPG 21년식을 2만 원이 조금 넘는 금액으로 47시간 예약을 했는데, 도착해서 보험 때문에 3만 원을 추가 결제하셨다고 한다. 그래도 5만 원이면 정말 엄청 싸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항공/숙소/렌터카 합쳐서 2인 2박 3일 여행에 총 50만 원이 안되게 들었으니, 요즘 다들 해외로 많이 가서 제주 여행이 이전보다 훨씬 저렴해졌다는 얘기가 실감이 났다.


큰 것들을 정했으니 이제 세세한 일정을 계획해야 한다. 식당은 해물탕, 회, 제주 토속음식이 들어가도록, 카페 2곳 정도 가는 것으로 계획했다. 식당은 모두 약 10여 년 사이 제주를 방문하면서 직접 가봤던 곳 중에서 괜찮았던 곳으로, 그리고 부모님의 취향과 가성비를 중요하게 여기시는 부분까지 고려해서 엄선했다.


방문지는 이전에 가보시지 않은 곳으로, 걷기와 쉬기를 적절히 섞어서 다니시는데 무리가 없도록 계획을 세웠고, 70이 넘으신 아빠가 운전하신다는 것을 생각하여 너무 장시간 운전하지 않도록 안배했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내가 세워드린 계획은 다음과 같다. 삼성노트로 적어서 두 분과의 단톡방에 사진으로 올려드린 것이다.


계획이 정말 자세하지 않은가. 이대로 한다면 크게 어려울 게 없어 보여, 나름 뿌듯해하며 잘 다녀오시리라 믿었다. 하지만, 뼛속까지 J형인 나는 계획표만 던져주고 '알아서 다녀오시겠지' 하며 마음이 놓아지지가 않았다.


결국 Life360 앱을 2박 3일간 계속 지켜보며 두 분이 내가 짜준 시간표에 맞게 이동하고 계신지 지켜보고 수없이 통화하며 중간중간 카톡으로도 이동해야 하는 곳의 주소를 카카오맵에서 찾아 공유해 드리는 등 완벽한 여행을 위해 가이드 노릇을 충실히 했다.


첫째 날은 거의 계획한 대로 되었는데, 렌터카와 저녁 식사 사이에 시간이 좀 남아서 이호테우 해변으로 가시라고 도와드렸고, 거기서 첫 바다를 만나고 사진을 찍으셨다. 아쉬운 것은 해물탕 사진을 찍어서 보내달라는 말을 못 했다는 것. 나중에 여쭤보니 제주에서 한 식사 중에 삼성혈 해물탕 1호점 식사가 가장 만족스러우셨단다. 스타벅스 애월에 가서 보내드린 쿠폰으로 제주까망라테도 드시고 노을까지 보고 숙소로 돌아가셨으니 첫날은 여유롭게 지나갔다.


둘째 날 조식은 시간표대로 가서 드셨는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긴 것은 렌터카에 가스가 많이 남지 않아서 넣고 가시느라 카멜리아 힐에 9시 반이 넘어서 도착하셨다는 것이다. 그래도 40분 정도 시간이 있어 짧고 굵게 구경하시고, 서커스 장으로 이동했다. 1시간 남짓의 서커스는 꽤 볼 만하셨다니 나중에 우리도 제주에 가면 한번 보러 가야겠다.

둘째 날의 메인 코스는 마라도 여행이었는데 숙소에서 송악산으로 가는 길에 카멜리아힐과 제주아트서커스가 딱 중간쯤이라 예약해 드렸는데 결과적으로 꽤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이 날은 날씨가 정말 열일한 하루여서, 마라도 배도 잘 떴고, 한 바퀴 걸으며 영상통화로 본 풍경도 아주 좋았다. 물론, 짜장면은 너무 짜서 맛이 없었다는 후기를 듣긴 했지만...

한 시간 넘게 걸었으니 이제 쉬는 시간이다. 어디를 고를까 하다 이제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신 엄마, 아빠에겐 여기가 딱이다 싶어 고른 곳이 산방산 탄산온천. 날씨 좋은 봄날의 노천탕이 엄청 좋으셨나 보다. 래시가드 미리 챙겨가시라고 알려드려 야무지게 가지고 가셔서 입고 들어가셨고, 온탕과 냉탕을 오가며 몸을 풀기에 아주 좋았다는 후기를 들려주셔서 매우 뿌듯한 코스였다.


전날은 해물탕이었고, 둘째 날은 동네 주민 맛집인 동현 식당에서 회정식 2인분을 권해드렸다. 꽤 맛있었고, 너무 배가 불러 마지막에 나온 생선 조림은 먹을 수가 없어 싸달라고 하셨단다. 운전 때문에 술 한 잔 못하신 아빠랑 편의점에서 막걸리를 사서 그 생선조림을 안주 삼아 숙소에서 나눠 마시며 허심탄회하게 깊은 대화를 하셨다는 부모님. 그 시간도 참 좋았다는 말씀에 왠지 코 끝이 찡해지는 순간이었다.


마지막 날은 둘째 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새벽같이 서두른 부모님 덕분에 코스를 좀 변경해야 했다. 9시에 문을 여는 새빌 카페에서 커피와 빵으로 아침을 하시길 권했는데, 8시도 되기 전에 숙소에서 나오셔서, 새별오름 근처 나 홀로 나무에서 사진 한 장 찍고 가시라고 알려드리고, 새별오름 올라갔다 온 뒤에 카페로 가시게 했다. 그랬더니 10시쯤 아침 식사가 마쳐져서 11시 점심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고, 급하게 한라 수목원을 가서 먼저 구경을 하시도록 했다. 한 바퀴 걸어야 소화도 되고 점심도 드실 수 있을 테니.

그리고 나면 제주 시내 쪽으로 가야 해서, 유리네를 가시라고 할까 하다, 그냥 앞뱅디식당을 권해드렸다. 고사리 육개장과 멜국, 멜튀김으로 점심을 맛있게 드시고 렌터카를 반납하고 셔틀 타고 공항으로 이동했다. 그 와중에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해서 3일 내내 비바람 거의 없이 벚꽃과 유채꽃구경도 잘하고, 여기저기 잘 다니고 매우 훌륭한 두 분만의 여행을 완성했다. 물론 원격 가이드로 내가 있었으니 온전한 두 분의 여행은 아니었지만. 실제로 나는 두 분과 함께 여행을 하고 온 느낌이긴 했다.


여행 계획 짜느라, 여행 기간 내내 두 분 동선 파악하고 안내하느라 조금 피곤하긴 했지만 이번 여행을 계기로 두 분이 오붓하게 여기저기 여행 다니시며 여생을 좀 더 즐겁고 행복하게 보낼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작가의 이전글 오늘은 스포츠 데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