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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국 Oct 02. 2024

언어 장벽을 사이에 둔 두 앵무새

feat. 영어 울렁증

연구실에 출근하다 보면 이런저런 영어를 사용할 기회도, 영어를 써야만 하는 경우도, 독해를 할 일도 많이 생긴다. 연구실에서 보는 논문, 시약 주문, 발표 자료를 만들 때 등등 보통 영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1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영어 공부를 해 왔지만, 아직도 영어란 나에게 절대 극복하지 못할 것 같은 높은 산과 같다.

     

그렇게 영어를 사용해야만 하는 많고 많은 이유 중에서 나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우리 연구실 박사님과 대화할 때이다.

     

박사님은 인도인이시다. 연구실에서 인도어를 사용할 수는 없기 때문에 보통 영어를 사용하신다. 같은 연구실에 있는 두 명의 친구들은 영어를 사용하는 박사님과 곧잘 대화하는데, 그 광경을 보고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항상 한다.

     

‘와... 어떻게 저렇게 하지?’ 

    

사실, 먼저 박사님이 나에게 말을 걸면 생각보다 영어로 곧잘 대화하긴 한다. 말을 하면서 ‘내가 이렇게 영어를 잘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그럴 때마다 영어가 모국어인 이가 나의 영혼에 들어와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보통 영어를 할 때는 뇌에서 받아들인 영어를 한국어로 변환하는 과정을 거쳐 답변을 작성하고, 그 답변을 다시 영어로 번역해 입으로 튀어 나가는 일련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박사님이 나에게 영어로 말을 하면 영어를 영어로 받아들이고 다시 영어로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나를 보며 솔직히 좀 뿌듯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박사님께 먼저 말 걸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실험을 하다가, 혹은 논문을 찾아보다가 모르는 것이 생겼을 때 영어로 물어볼 수가 없어서 혼자 골머리를 앓았던 기억이 정말 많다.

     

아마도 자신감의 문제일 것이다. 나의 영어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나오는 일종의 지연 현상이 아닐까?

     

아무튼, 이렇게 혼자 끙끙대던 중 학교 복도를 지나가다가 우연히 박사님의 통화 내용을 들었다. 당연히 영어, 혹은 모국어인 인도어가 나올 거라 생각했지만, 나의 귀에 다가온 소리는 뜻밖의 것이었다.

     

“아, 교수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 

    

그 소리를 듣고 난 후 거의 10초 동안 사고가 정지했다.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닌지 수십 번 되뇌고 또 되뇌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들린 말은 해외에 한 번 나가본 적 없는 25년 차 네이티브 코리안 피플이 듣기에도 손색없는 한국어였다.

     

억양은 조금 달랐지만, 추임새와 높임말, 그리고 한국어에서만 볼 수 있는 인사말까지. 글로 써 놓고 보면 외국인의 입에서 튀어나올 말이 아니지 않은가? 

    

솔직히 조금 배신감이 들었다. ‘이렇게 한국어를 잘하시는 줄 알았더라면 한국어로 많이 대화했을 텐데.’ 뭐 이런 생각을 하며 말이다.

     

그렇게 연구실에 들어온 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박사님께서 한국어를 정말 잘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잘 알게 될 때마다 배신감도 비례해서 커졌다.

     

그렇게 박사님의 한국어를 듣고 멍해졌던 기억을 서서히 잊어갈 때 즈음, 학교 거리를 지나가는데 어떤 외국인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

‘... 네?’

     

아마 그 사람도 인도인이었던 것 같다. 영어로 말하는 것 같기는 한데 인도 영어의 악센트가 너무 심해서 정말 한 단어도 알아듣지 못했다.

     

상대방의 말을 다시 듣고자 “Pardon me?”(다시 말해주실래요?)라고 말했고, 그 외국인은 나에게 같은 억양으로 똑같은 말을 했다.

     

“@#@@$#@%^%##%#... delivery man...#@%#”

     

delivery man(배달 기사)이라는 말을 알아채자마자 하나도 들리지 않았던 그 사람의 말이 갑자기 해석되어 문장의 의미가 뇌리에 단번에 박혔다. 이런 말이었다.

     

“제가 음식 배달을 시켰는데, 배달 기사님의 위치를 몰라서 전화를 했어요. 근데 한국어를 할 수 없어서 혹시 대신 전화해서 그 위치를 나에게 알려줄 수 있나요?”

     

그 의미를 깨달은 나는 요청을 흔쾌히 수락하여 기사님과 전화를 하고, 배달 위치를 알려준 후 “have a good day~”라 말하고 수업에 늦어 강의실로 달렸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박사님께서 나에게 영어로 말하지 않고 항상 한국어로만 말했으면 그 사람의 말을 파악하지 못하다가 결국엔 번역기를 켜 상대방에게 내밀지 않았을까?

      

가까운 과거를 되짚어 보면 박사님은 한국어를 거의 모국어처럼 사용하다가도, 나와 연구실 학생들에게 말할 때만큼은 거의 항상 영어를 사용했다. 이는 본인이 편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우리에게 영어에 대한 자신감, 혹은 실력을 조금이라도 더 늘려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 이후로 박사님께, 그리고 세미나 강연을 오신 외국인 교수님들에게도 영어로 말하고, 영어로 질문하기를 주저하지 않게 된 것 같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영어 공부를 한다. 의무 교육인 초등학교, 중학교만 따져 봐도 9년이란 시간을 영어와 함께 한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이른바 ‘영어 울렁증’이라는 치료제가 없다시피 한 병이 만연해 있다.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최근 이런 경험을 하며 한 생각이 있다.

     

영어는 ‘학문’이 아닌 ‘언어’라는 것이다.

     

당연한 소리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실상은 조금 다르다. 당신은 학생 시절 영어를 배울 때 언어로써 배웠는가?

     

장담하는데 절대 아닐 것이다.

     

be 동사를 시작으로 여러 가지 단어를 암기하고, 5 형식을 필두로 한 문법 등 그렇게 모이고 모인 조각들을 발휘하여 문장을 독해해 내고, 그렇게 쌓아온 것들을 기반으로 듣기 평가를 했을 뿐이다.

     

영어를 공부하면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뭐 이리 생략이 많아?’ 

    

이런 생각은 영어를 학문으로써 공부했기 때문에 생기는 생각이다. 영어란 결국 언어이기에 아주 오래전 영국인들이 자기들 편할 대로 쓰던 말과 그들의 언어 습관, 기교, 과도한 생략까지도 포함한다. 즉, 영국인이 ‘영어를 이렇게 사용하자!’라고 정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것들을 먼저 접한 한국인이 ‘어떻게 한국인에게 영어를 효율적으로 가르칠 수 있을까?’라며 고민하다 나온 것, 그것을 발전시키고 더 효율적으로 바꿔 가며 오늘날 학교에서 배우는 영어가 된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렇게 배운 완벽한 영어를 하기 위한 학문으로써의 영어는 우리에게 현재 ‘영어 울렁증’이라는 이름의 언어 장벽으로 굳건히 우리를 가로막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영어가 가지는 무게감은 정말이지 막대하다. 그 사실을 최근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영어를 쓸 일이 너무나도 많음을 실감한다.

     

그 장벽을 깨기 위해서 조금 더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독해뿐만 아니라 외국인과 대화하고, 그들의 감정, 문화를 느끼며 소통하려고 한다면 책상 앞에 앉아서 공부하는 것보다 몇 배는 효율적으로 다른 언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어를 배우는 목적이 지나가다가 말을 건 외국인에게 답변을 해주기 위해서일까?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해외에 나갔을 때 외국인과 소통하기 위해서일까?

     

사실 이런 목적들은 아무래도 괜찮다.

     

필요한 상황에 단 한 번이라도 쓸 수 있으면 그것으로 된 것 아닐까?

     

그리고 그 한 번이 쌓이고 쌓여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창을 열어주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마치 집에서 주인의 말만을 듣고 주인의 목소리, 억양을 되풀이하는 앵무새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 새로이 생긴 창을 통해 세상으로 나가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하늘을 누비는 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2024. 10.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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