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몸 불살라 가사노동도 즐겁게!
전업주부의 꿀템인 건조기가 고장이 났다.
8년동안 사용하면서 잔고장도 없이 우리집 빨래를 묵묵히 담당해왔으니 이제 쉴 때도 되었다. 아무리 다시 돌려보아도 힘차게 돌아가던 모터소리는 힘이 다 빠지고 시원찮은 소음소리를 내며 더이상은 무리라는 듯 삑삑 소리를 울려댄다.
그래 그래. 알았다.
너의 마지막 비명을 담담히 받아들여줄게. 그동안 애도 많이 썼다.
덕분에 엄청 편안했어.
쿨하게 놓아줄게
남편도 놀라면서 얼른 AS를 부르라며 호들갑이다. 하지만 난 AS를 부르지 않기로 했다. 일단 8년차 된 건조기는 가전의 수명을 다 했기에 고칠 수는 있지만 생각보다 많은 As비용이 나올 것이고, 그렇게 고친 건조기가 얼마나 더 유지될지 알 수 없다는 출장기사가 읊조리는 대사가 머리속에서 줄줄 흘러나왔다.
이제 결혼 12년차, 가전이 하나 둘 말썽을 부리며 수명이 다해가는 시점에서 같은 상황을 두 세번 겪어보았기 때문이다. 에어컨도 그랬고 식기세척기가 그랬고 건조기가 세번째이다.
에어컨이나 냉장고는 꼭 필요한 가전이기에 어쩔 수 없이 AS를 하거나 새가전을 들여야하겠지만 식기세척기나 건조기 등은 있으면 너무 좋지만 없어도 큰 상관은 없는 가전이다. 내가 좀 더 바빠지고 내가 좀 더 부지런을 떨면 해결되고 생활에 전혀 지장이 없는 가전제품이다.
사실 건조기가 고장났을 때 당황스럽기 했다. 그 많은 빨래를 널고 개고 관리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기도 했다. 하지만 당차게 AS도 포기하고 '이참에 잘됐다 최신형 건조기 한번 들여보자' 라는 욕망도 내려놓고 미련없이 현실을 감당하기 시작했더니 차차 패턴이 잡히기 시작했다. 못할 것도 없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건조기가 없는 불편함은 오히려 나를 부지런하게 만들어주았다.
세탁기에서 뒤엉킨 빨래를 바로 건조대에 처박고는 다 건조된 빨래를 몇날 몇일을 쌓아놓기도 했다. 집안일이 밀리면 건조기가 다 말려놓은 빨래 개는 일은 맨 나중으로 밀렸다. 건조기가 말려놓은 빨래를 밀려놓아도 건조기는 어김없이 빨래를 완성해놓기 때문에 빨래개는 일에 게을러졌다.
사실 옷감도 많이 상했다.
특히 아이들 내복 같은 면 종류는 미세하게 줄어들어 너무 빨리 못 입게 되었다. 이젠 뭐 흔히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건조기의 편리함을 포기하지 못하고 옷감이 상하더라도,게을러지더라도 포기할 수 없었던 건조기 사용을 끊어내는 것이 '이 참에 잘되었다' 싶었다.
완성된 빨래를 탁탁 털어서 정리한다.
정돈된 빨래를 툭툭 널어 건조대에 올린다.
안방에 널어놓으니 다음날 되면 바짝 마른다.
건조한 안방에 가습기 역할도 한다.
다음날 또 빨래를 널기 위해 바짝 마른 빨래를 걷어서 자리잡고 앉아 빨래를 개면서 오랜만에 느끼는 휴머니즘 정서를 느끼며 기분까지 포근해지는 느낌이다.
인간의 손으로 당연하게 해나가야 하는 일들을 얼마나 많이 기계들이 감당하고 있는지 문득 씁쓸해진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들도 편리함에 취해 기계에게 맡기는지 돌아보게 된다.
식기세척기에 설거지를 맡기고 여유를 즐기던 시간도 있었다. 건조기에 빨래를 돌리고 빨래 너는 수고를 덜어내며 그 시간을 더 즐기던 여유도 좋다. 하지만 손으로 뽀득뽀득 그릇을 닦으며 잡념에 빠지기도 하고 유익한 유튜브 채널로 짧은 시간 필요한 정보를 얻기도 한다. 뽀송하게 마른 빨래가지를 정리하며 아이들 옷을 보며 아이들이 했던 작은 행동들, 무심코 던진 말 들을 곱씹어보며 미안해하기도 하고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한다. 이런 여유와 이런 잡념의 시간도 필요하다. 집안일도 하고 일석이조다.
기계가 주는 편리함에 무너지지 않고 소신을 지키며 휴머니즘 감성까지 만끽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좋은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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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굳었다!!!!!
나가서 돈도 못 버는 데 소비나 줄이자!!
돈 못 버는 전업주부
이 한 몸 불살라
가사노동에 전념하리
가사노동이 주는 의외의 기쁨!
알고보면 그것은 감정의 타협
*전업주부의 주절주절 자작시*
#전업주부일상 #이런게재테크 #현명한소비 #건조기 #주부에세이 #자작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