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떠나는 그대에게
“저 계약 연장했어요”
4월 말에 퇴실하는 룸메이트가 있다. 2월에 입주했으니 실제로 같이 지낸 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꽤 정이 들었나 보다. 거실을 지나는데 포근하고 좋은 향기가 났다. 출처를 찾아 코를 킁킁거리니, 그 룸메이트의 세탁물에서 나는 향이었다. 인생 섬유유연제를 찾았다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민트색 병을 보여준 게 떠올랐다. 세탁물을 어찌나 정갈하게 널어놨는지 평소 성격이 보였다. 만약에 듣고 싶은 거짓말을 묻는다면, 퇴실하기로 한 룸메이트에게서 저 한마디가 나오는 것이다.
처음 본 날이 떠오른다. 나이를 물으니 밀레니엄 베이비(이하 밀베)라며 2000년대생이라고 했다. 자이언트 베이비라 해도 손색이 없을 사람이 그렇게 소개하니 귀여웠다.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고 2층 거실 테이블에 앉았다. 졸업을 앞두고 서울로 첫 취업에 성공하여 상경했단다. 초면인 것 치고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밀베가 중학교 때 좋아한 연예인이 엑소의 디오라는 것도, 지금은 세븐틴의 원우를 좋아하는 것도, 카페 이층 창가 자리에서 사람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 것도 알았다. 취향이 비슷해서 반가웠다.
짧은 시간 같이 살았을 뿐인데 왜 이렇게 정이 들었을까.
나에게 정든 사람과 이별은 뭘까.
어렸을 때 부모와 떨어져 친척 집에서 지냈다. 엄마가 시간이 날 때만 만날 수 있었다. 만나도 몇 시간 보는 게 전부였다. 그래서 얼마나 머물다 갈 건지 물어보고 엄마가 떠나는 시간을 알고 있어야 마음이 편했다. 습관이 룸메이트들에게도 적용이 된 건지, 새로 만난 이들에겐 셰어하우스 계약기간이 얼마나 되냐고 물어보고 헤어질 날짜를 마음속에 적어둔다. 한 지붕 아래 살게 되지 않아도, 밖에서 만나면 되는데 같이 살 때 하고 싶은걸 다하려고 한다. 엄마와 맺었던 관계 패턴이 타인과 지낼 때도 드러나는 것일까.
요즘은 밀베가 야근하는 날이 많아서 얼굴을 보기 어렵다. 그래도 베이비라 체력이 넘치는 것인지 늦은 밤까지 거실에서 게임하는 모습을 종종 본다. 게임 폐인이라고 놀리는데 재미가 쏠쏠하다. 물 뜨러 거실을 지나갈 때마다 게임에 몰입하는 밀베를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아쉽다.
나는 배웅 인사를 현관문 앞까지 가서 하는 편이다. 언젠가 외출할 때, 밀베가 인사는 문 앞까지 가서 하는 거라며 배웅을 해준 게 좋았다. 그렇게 해주기만 했지 받아본 것은 처음이었다. 쌓은 추억이라곤 이렇게 소소한 것들이다. 물론 그 의미까지 작은 건 아니다.
제법 무거워 보이는 택배 상자를 들고 오길래 뭐냐고 물으니 본가에서 보내온 거라고 했다. 어머니가 챙겨주신 얼린 미역국, 소분한 볶음밥 재료, 약밥, 각종 밑반찬 같은 것이었다. 볶음밥 재료가 양파, 당근 등 색깔별로 깔끔하게 보관된 채로 담겨있었다. 밀베의 깔끔한 정리 습관이 괜히 생긴 게 아니구나 싶었다. 그날 본가에서 올라온 음식들을 같이 나눠 먹었다. 접시에 딱 먹을 만큼 담는 모습이 그녀다웠다.
거짓말처럼 계약 연장해서 셰어하우스에서 더 살게 되는 일은 없겠지만, 어디에서 살든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 각자 꿈꾸는 길을 걷다가 어느 봄날에 만난다면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