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비통하고 아픈 현실을 맛과 향으로 표현.’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서점을 구경하다 우연히 접하게 된 블렌딩 티 광고 문구이다. ‘문학을 즐기는 또 다른 방법’으로 ‘한 잔의 문학을 마신다’는 것이다. 이별이나 사랑, 그리움의 정서를 담은 블렌딩 티도 있다.
뭐, 차 한 잔으로 이별, 사랑, 그리움을 느낄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비통하고 아픈 현실을 맛과 향으로 표현했다는데, 그 비통하고 아픈 현실의 맛과 향을 애써 차를 마시면서 느껴야 하는지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다. 문학작품에 대한 감상을 차 한 잔으로 깊이를 더할 수는 있겠지만 굳이 비통함과 아픈 현실의 맛이라니. 얼핏 광고 문구만 봤을 땐 그런가 싶다가도 자꾸만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으로 곱씹게 되는 광고 문구다.
그러다 문득 비통함과 아픈 현실의 맛과 향이 어떨지 궁금했다. 이 ‘잠깐’의 궁금함으로 해당 제품을 구매하면 그 마케팅에 일조를 하게 된다. 광고 카피에 혹해서 샀거나 의아함과 호기심에 샀더라도 결국 판매하려는 목표는 이룬 것이기에 광고 카피가 성공적일 수는 있으리라. 하지만 그 마케팅에 일조하고 싶지는 않기에 궁금해도 일단은 참기로 했다.
요즘은 공감 마케팅이라고 하여 제품의 이미지와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감상을 연결하기도 하고 이렇게 문학 작품과 연결하여 볼펜이나 다이어리 등의 여러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스마트폰과 노트북으로 메모하고 글을 쓸 수 있는 시대다. 종이와 펜이 없어도 충분히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글로 옮길 수 있는데도 굳이 이런 펜이나 노트를 사용하는 이유는 시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그림과 함께 측면에 유명 시인의 시구가 새겨져 있는 볼펜으로 글을 쓰면 뭔가 시의 감성이 쓰는 사람의 글씨에도 고스란히 전해질 것 같고, 문학 작품의 이미지를 덧씌운 일기장이나 노트를 펼치면 아무것도 없는 백지의 분위기만으로도 해당 작품의 감성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이런 공감 마케팅과 비슷한 제품들이 40여 년 전에도 있었던 것 같다. 청소년 시기에 사용했던 일기장이 생각났다. 매 페이지마다 멋진 글귀가 잔잔한 그림과 함께 인쇄되어 있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만나는 멋진 글귀를 읽으면서 내가 맘에 드는 문구도 써보고 나의 생각도 적곤 했다. 수많은 명언과 시구를 읽었는데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은 크리스티나 로제티의 “사랑하는 사람이여 나를 위해 슬픈 노래를 부르지 마세요.”란 문장이다. 당시에는 시 전체 내용도 모르고 크리스티나 로제티가 누군지도 몰랐으나 이 한 문장을 통하여 만나 본 적도 없는 시인의 아픔을 공감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차 한 잔의 여유로 많은 것들을 생각한다. 단순히 차 한잔을 마실 수 있는 시간으로 잠깐의 휴식을 얻기도 하고 뭔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고 차 향 자체만으로 심리적인 위안을 얻기도 한다. 그러니 차를 마실 때는 어떻게 마시는가가 중요하다. 마시는 시간대와 장소, 차를 담는 도구와 물의 종류와 온도, 심지어 혼자 마실지 누군가와 함께 마실지도 중요하다. 어쩌면 이런 세심함 속에서 차를 마신다는 것은 차에 담긴 어떤 정신을 마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지식인의 비통함과 아픈 현실을 맛과 향으로 표현’했다는 마케팅 디렉터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것 같기도 하다. 문학에 대한 감상을 극대화하기 위한 도구로써 차를 상품화한 것이리라. 하지만 이 카피는 뭔가 이런저런 감성의 조각을 억지로 꿰매버린 천조각 같다. 우연히 바람에 실려 온 낙엽 같은 공감이 아니라 바닥을 박박 긁어서 모은 낙엽 쓰레기에서 예쁜 것만 골라 풀로 붙여 놓은 느낌이랄까.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현재의 삶 속에서도 굳이 차를 마시지 않더라도 사회 곳곳에는 ‘비통함과 아픈 현실’이 놓여 있다. 그런 주변의 아픔을 뒤로하고 차를 마시면서 억지로 만들어진 비통함과 슬픈 현실을 공감하는 것 자체가 비통해야 할 슬픈 현실이 아닐까.
게다가 이왕이면 한 잔의 차로 비통함과 아픈 현실의 맛과 향을 느끼기보다는 위로와 평안을 얻고 내 이웃들에게도 따뜻한 위로와 사랑이 담긴 차를 건네고 싶다.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차를 마시는 이유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