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바틀비’를 애도하며
남편에게 "낙제점'을 받은 글
내가 처음으로 필경사 바틀비를 알게 된 것은 몇 년 전 읽었던 철학자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를 통해서다. <피로사회>에서 저자는 하나의 주제로 <필경사 바틀비>를 언급하고 있다. 그때는 <필경사 바틀비>를 읽지 않았기 때문에 바틀비에 대한 내용을 읽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피로사회> 후반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필경사 바틀비>를 읽었다. 읽고 나서 다시 <피로사회>를 읽으니 저자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한병철 교수는 <필경사 바틀비>에서 나오는 변호사 즉 화자의 조수들인 터키, 니퍼즈, 진저 넛 이들 세 직원이 “모두 신경성 질환에 시달리고” 있으며 “신경증적인 과다활동성과 과민함을 드러내는 이들 인물은 침묵하며 돌처럼 굳어 있는 바틀비의 대척점에 놓여 있다”라고 말한다.
변호사의 조수들도 일반인이 보기에 정상이라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기행을 일삼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틀비만 유독 죽음으로 매몰린 까닭은 무엇인가. 바틀비가 변호사 사무실에 어떠한 기여도 하지 못한, 즉 ‘쓸모없음’에 기인한다. 세 명의 조수들은 나름의 기여를 하고 있다. 즉 화자인 변호사에게 ‘쓸모 있는’ 도구인 것이다. 바틀비가 신경성 질환이 극에 달하면서 더 이상 변호사에게 ‘쓸모’가 없어지자 변호사는 온갖 ‘합리적’이고 ‘인간적’으로 보이는 구실을 들어 ‘바틀비’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보르헤스는 자신의 세계문학 컬렉션인 바벨의 도서관 목록에 <필경사 바틀비>를 올리며 다음과 같이 극찬한다.
< <필경사 바틀비>에서 멜빌이 만들어낸 바틀비가 카프카의 <심판> 속 주인공보다도 반세기 앞서 등장한 인물상이라고 주장했다. 법률 사무소로 빼곡하지만 주말이면 썰물처럼 사람이 빠져나가는 월 스트리트의 건물 안에서 혼자 기거하면서 생강빵으로 연명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현대 도시인의 자화상을 떠올리게 한다.
평생 평단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일생을 불행하게 보낸 작가 멜빌에게 세상은 아이러니와 부조리로 가득하게 느껴졌다. <필경사 바틀비>는 가장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인 ‘허무함’과 현대인의 실존적인 고독을 보여주는, 슬프고도 강력한 흡인력을 지인 세계문학의 걸작이다.>
하지만 바틀비의 상황을 너무 현대인의 ‘실존적 고독’, 즉 개인의 내적 경험에만 집중하면 사회적 차원의 문제를 간과할 수 있다.
처음 <필경사 바틀비>를 읽을 때는 바틀비 개인에만 집중해 읽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화자인 변호사가 너무나도 태연하게 ‘지극히 합리적이고 인정이 많은 사람’으로 ‘가장’하는 탓에 쉽게 알아채지 못했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변호사의 속내가 보였고 그의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에 <필경사 바틀비>의 최종 빌런은 바로 변호사라고 생각하게 이르렀다.
그러니 <필경사 바틀비>를 다시 반복해서 읽을 때는 바틀비를 죽음으로 몰고 간 당시 사회와 특히 변호사의 유죄 정황을 찾는데 집중하면서 읽을 수밖에 없었다.
변호사는 글의 도입부에서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나를 아는 사람은 누구나 나를 더없이 ‘안전한(safe)’사람이라고 여긴다. 시적 정열 따위에는 관심 없는 인물인 고(故) 존 제이콥 애스터는 나의 첫째 장점이 신중함이고 둘째 장점은 체계성이라고 서슴없이 단언했다.>
번역본에서는 ‘안전한’을 진한 글씨체로 영문판에서는 이탤릭체 ‘safe’로 강조하고 있다. 작가가 의도한 역설적인 표현으로 보인다. 변호사는 남들이 자신을 안전한 사람이라고 얘기하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 이면 속 허먼 멜빌은 다시 그 변호사를 대상화하여 그가 말하는 ‘안전’이 진정한 안전이 아님을 알리기 위한 것이라 생각한다. 즉 강한 긍정은 강한 부정임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게다가 그의 장점으로 말해지는 신중함(prudence)과 체계성(method)은 내가 보기에 바틀비를 죽음으로 내모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장점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는 쓸모 없어진 바틀비를 매우 신중하고도 체계적인 방식으로 죽음에 이르도록 내몰았기 때문이다.
<나는 웬만해서는 화를 내지 않거니와 부당한 일이나 황당한 일에 분개하는 위험천만한 행동은 더더욱 삼갔다.>
게다가 처음부터 자신이 화를 내지 않거니와 부당한 일이나 황당한 일에 분개하지 않음을 강조하여 이후 일어나는 바틀비에 대한 ‘화와 분개’가 어쩔 수 없었다고 정당화하고 있다.
<기분에 따라 나는 이 문을 열거나 닫았다. 나는 바틀비를 접이문 옆의 한구석에 배치하되 내 공간 쪽에 두기로 했다. 자질구레한 문제를 처리해야 할 경우를 대비하여 이 조용한 사람을 내가 부르기 쉬운 곳에 두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의 책상을 사무실 그 부분의 조그만 옆 창문에 바짝 붙여놓았다. 그 창은 원래 어떤 지저분한 뒤뜰과 벽돌의 옆모습을 보여주었으나 나중에 건물이 세워지는 바람에 현재는 약간의 빛은 받아들이되 경치는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유리창에서 1미터 내에 벽 하나가 있었고, 빛은 마치 둥근 천장의 매우 작은 구멍에서 나오는 것처럼 훨씬 위에서 높다란 두 건물 사이를 타고 내려왔다. 더욱더 만족스러운 배치를 위하여 나는 바틀비 쪽에서 내 목소리는 들을 수 있되 그를 내 시야에서 완전히 격리할 수 있는 높다란 접이식 녹색 칸막이를 구입했다. 그래서 그런대로 사적인 자유와 그와의 소통을 동시에 누릴 수 있었다.>
바틀비가 일하는 자리는 외형만 사무실이지 장차 바틀비가 갇히게 될 감옥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변호사는 “사적인 자유와 그와의 소통을 동시에” 누리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사적인 자유는 변호사 자신 만의 편리성이다. 게다가 소통이라니. 소통(society)이라는 단어에 나도 모르게 분노가 치밀었다. 자신의 편의를 위해 감옥과 같은 곳에 가둬두고 소통이라는 말을 쓰다니 변호사의 위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단어가 아닌가 생각한다.
변호사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장점과 인간적인 면을 부각하고자 한다.
바틀비의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는 증세가 점점 강해지자 화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불쌍한 녀석! 하고 나는 생각했다. 녀석은 해를 끼칠 뜻은 없어. 오만하게 굴려는 의도는 없는 게 분명해. 녀석의 얼굴을 보면 녀석의 기행이 본의가 아니라는 것이 충분히 드러나지. 녀석은 내게 유용해. 난 녀석과 잘 지낼 수 있어. 만일 녀석을 내쫓는다면 십중팔구 녀석은 나보다 까다로운 고용주한테 걸려들어 거친 대접을 받고 아마 비참하게 쫓겨나 굶어 죽게 될 거야.>
화자의 이 말 역시 소름이 돋는 부분이다. 화자는 바틀비를 돕지 않을 경우 바틀비가 어떻게 될 지도 잘 알고 있었던 거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쓸모가 없어지자 그를 떠난 것이다.
바틀비는 꺼져가는 목소리로 화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나를 떠날 건가 안 떠날 건가?”나는 불끈 화를 내면서 그에게 바싹 다가가서 다그쳤다.
“당신을 안 떠나고 싶습니다.” 그가 ‘안’이라는 단어에 부드러운 강세를 넣으며 대답했다.>
바틀비는 자신도 어찌할 수 없을 만큼 무기력에 빠져 감정조차도 표현할 수 없었던 거다. 그러니 타자가 느끼기에는 기행처럼 느껴지는 ‘고집스러움’으로 보일 수밖에. 이렇게 바틀비는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증에 간신히 자신의 의사를 말하며 화자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호사는 자신의 장점인 신중함과 체계성을 이용하여 자신의 모든 생각을 합리화하기 위해 바틀비가 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완벽하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상황을 만들어 바틀비를 몰아간다.
<나는 비틀거리며 내 책상으로 돌아왔고 거기 앉아서 깊은 생각에 빠졌다. 맹목적인 고집이 고개를 쳐들었다. 이 말라빠지고 땡전 한 푼 없는 놈에게, 내가 고용한 종업원에게 나 자신이 굴욕스럽게 거부당하는 또 다른 방법은 없을까? 무엇을 더 시키면 완벽하게 합리적인 일인데도 녀석이 틀림없이 거부할까?>
그는 심지어 자신의 주도면밀함을 자부하며 스스로를 폭로한다.
<생각에 잠겨 집으로 걸어가다 보니 내 속의 허영이 동정심을 눌렀다. 바틀비를 제거하는 나 자신의 고수다운 처리솜씨를 무척 대견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걸 고수답다고 일컫는데, 냉정한 사유를 하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다. 내 일처리 방식의 미덕은 그 완벽한 조용함에 있는 듯했다. 천박하게 윽박지른다든지 어떤 식이든 허세를 부린다든지 성질내고 소리 지르며 사무실 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바틀비에게 거지 같은 짐을 싸가지고 당장 나가라며 격한 명령을 마구 내뱉는 일은 없었다. 그런 종류의 일은 전혀 없었다. 바틀비에게 큰 소리로 떠나라고 명령하지 않고 – 하수라면 그랬을 테지만 – 나는 그가 떠나야 하는 근거를 가정했고 그 가정 위에 내가 한 말들을 모두 구축했다. 내 일처리 방식에 대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스스로 더욱 매료되었다.>
이 단락에서 변호사의 이중성은 극에 달하는 것 같다. 이 정도면 허먼 멜빌은 빌런(변호사)이 자신의 입을 통해 스스로 자신을 고발하도록 의도한 것이라 볼 수밖에 없다.
심지어 바틀비가 죽고 나서,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기 전에는 우편물 취급소에서 일했던 사실을 언급할 때에도 바틀비의 죽음과 자신은 관련이 없음을 우회적으로 말하는 것 같다. 이미 배달 불능 우편물 취급소에서 마음의 병을 얻었기 때문에 죽음에 이른 것이라고 끝끝내 변호사 자신을 변호하는 것처럼 들렸다.
화자의 직업은 변호사다. 자신의 직업적 능력을 최대한 이용하여 불쌍한 바틀비의 죽음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음을, 오히려 그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자신을 변호한 것이다.
허먼 멜빌은 변호사의 변론을 통해 자본가의 위선과 이중성을 고발한 것이다.
그러니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라는 그 마지막 외침에는 변호사의 외선적인 목소리와 그런 위선을 알고 바틀비를 애도하는 작가의 마음 둘 다를 담은 것이라 생각한다.
한병철 교수 역시 바틀비를 언급한 마지막 부분에서 <필경사 바틀비>는 “탈진의 이야기”이며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란 외침은 “한탄인 동시에 고발”로 본다.
<필경사 바틀비>는 워낙 유명한 단편이라 보르헤스나 한병철 교수 외에도 들뢰즈나 아감벤 등 수많은 거장들에 의해 철학적, 사회학적, 병리학적으로 논의되었다고 한다. 그들의 이론을 읽어보지 못한 상황에서 바틀비를 죽음으로 내몬 변호사에 초점을 맞춰 나의 생각만 정리한 것이다. 어쩌면 나의 생각은 이미 거장들에 의해 충분히 논의된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그동안 <필경사 바틀비>를 읽으며 보냈던 나의 슬픔과 분노로 가득 찬 마음을 정리하기 위함이지 뭔가 학문적인 이론을 논하기 위함이 아님을 밝힌다. 혹시라도 거장들의 여러 논의를 이미 알고 있는 분들에게는 양해를 구하며 내가 읽고 참고한 책을 여기에 밝히고자 한다.
<필경사 바틀비>, 한기욱 옮김 창작과 비평사
<피로사회>, 한병철 문학과 지성사
<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 바벨의 도서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획 해제
<필경사 바틀비>, 공진호 옮김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