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소설은 한번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기 때문에 날을 정해놓고 계속 읽어가야 한다. 먼 항구에 도달할 때까지 그 배 안에 머물며 오랜 시간을 함께 해야 끝이 나는, 대양을 가로질러 가는 항해와도 같다.
단편 소설은 짧은 산책로이다. 부담 없이 언제든 나갈 수 있는 집 앞 길이다. 하지만 그 가깝고 짧은 길에서도 온갖 새로운 것을 만날 수 있다. 길을 걷다 낯선 사람과 부딪칠 수도 있고, 갑자기 나에게 돌진하듯 달려드는 자전거나 동물들도 있고, 보통 때는 잘 눈에 안 띄던 풀이나 나무 등에 눈길이 가기도 한다. 익숙한 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인상에 화들짝 놀라기도 한다. 한번 갔다가 빠져나와도 다시 가게 되거나 반복적으로 가기도 하고 한동안 그 길 가운데 머물러야 할 때도 있다.
<필경사 바틀비>는 나에게 짧지만 강렬한 산책로 같았다. 처음엔 무심코 걸었지만 다시 걸을 땐 길 옆에서 불쑥 내게 돌진하는 물체, 또는 어디선가 날아든 물체에 한 방 얻어맞은 것 같아 내가 왜 그런 충돌을 겪어야 했는지 살펴보기 위해 다시 가게 만드는 그런 길과 같았다. 게다가 그 짧은 산책로를 빠져나오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필경사 바틀비>는 허먼 멜빌이 심혈을 기울여 쓴 <모비딕>이 평단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심지어 팔리지 않은 책이 화재로 대량 소각되는 사건까지 일어난 후에 생활고로 괴로워하던 시기에 쓴 글이라고 한다.
월가의 변호사가 자신의 일이 바빠지자 새롭게 필경사를 채용하는 데 그가 바틀비다. 바틀비는 처음에는 매우 많은 양의 일도 잘 해내다가 어느 순간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사무실에서 변호사가 지시하는 일을 거부한다. 바틀비가 어떠한 대화도 없이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를 반복하며 점점 더 일을 거부하자 변호사가 그를 남겨 둔 채 사무실을 옮기고 결국 구치소에 갇혀 식음을 전폐하다 죽음에 이른다는 내용이다.
이 모든 사건의 서술은 변호사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변호사는 바틀비에 대해 서술하면서 자신의 속내를 끊임없이 얘기하지만 바틀비에 대해서는 어떤 속마음도 알 수 없기에 글을 읽는 독자는 변호사의 입장에서 감정이입이 쉽게 일어날 수 있다. 나 역시 처음 읽을 때는 변호사의 입을 통해서만 바틀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글을 읽을수록 바틀비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게 되고 바틀비의 마음에 감정이입이 되면서 온통 머릿속에서는 바틀비 생각뿐이었다.
내가 바틀비에게 감정 이입이 되고 바틀비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오래전에 공부방에서 지도하던 몇몇 아이들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이들은 바틀비처럼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 상태를 파악하기가 몹시 힘들었다. ‘아이들’이라고 말한 것은 그렇게 말을 전혀 하지 않는 학생들이 2~3년을 주기로 한 두 명은 꼭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아이들이 지능이나 정서 면에서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학습에 대한 이해력은 좋았지만, 유독 타인에게 자신의 생각 말하기를 극도로 꺼려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아이들을 지도할 때는 <필경사 바틀비>에서 화자인 변호사처럼 답답함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억지로 말을 하게 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생겨 최소한의 말로 대답할 수 있게 하고, 그들도 귀로 듣고는 있기에 주로 나 혼자 떠들었던 기억이 있다.
말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처럼 시끄럽게 떠들지 않아 좋은 점도 있었지만 학습상황을 대화로 확인할 때는 나의 에너지 소모가 컸다. 그래도 그들이 표현을 하지 않았을 뿐 그들 나름의 생각은 있었고, 시간이 최소 1~2년이 지나자 아주 조금씩 말문을 열기도 하였다. 그렇다. 이들에게는 일반 학생들보다 비교도 안되게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한 아이들이 자꾸 떠오르자 죽음에까지 내몰린 바틀비에 감정이입이 극에 달했다. 어쩌면 바틀비에게도 이해해 주는 시간이 필요했던 건 아니었을까?
나의 공부방을 거쳐간 학생들 말고도 내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났던 누군가도 떠올랐다. 그러니 단편이라고 읽기 시작했던 소설을 장편보다 더 긴 시간을 할애하여 읽고 또 읽고, 읽지 않을 때에도 바틀비 생각만 했던 것이다.
몇 날 며칠을 그의 고독과 슬픔에 대해, 그의 죽음에 빠져있었다. 어떤 때는 밤에 자고 있을 때에도 자고 있다는 의식과 바틀비에 대한 생각이 동시에 이루어져 잠을 자고 있는지 바틀비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남편에게 이런 상황을 얘기하자, 우울한 책은 건강에 해롭다며 더 이상 읽지 말라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
그렇다. 솔직히 바틀비를 생각하는 동안 많이 우울하고 많이 슬픈 날을 보냈다. 그러니 이런 힘든 감정과 생각을 정리하여 종결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이에 두서없는 기록에 열중하였다. 글로써 마음의 슬픔을 정리하고 <필경사 바틀비>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나의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온전히 나의 관점에서 글을 썼다. 글을 완성하고 나서 남편의 의견을 듣기 위해 글을 보여 주었다,
남편이 글을 읽자마자 내가 그동안 브런치에 썼던 글 중 가장 못 쓴 글이라면서 내게‘낙제점’을 주었다.
작정하고 내 주관적인 생각 위주로 썼기에 기대를 하진 않았지만, 막상 ‘낙제점’이라는 말을 들으니 나는 살짝 마음이 상했다. 남편은 내게 너무 심하게 말했다고 느꼈는지 다시 태도를 바꿔 조목조목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내용을 순서 없이 정리했다.
- <필경사 바틀비>를 읽지 않은 사람들이 읽었을 때 무슨 말인지 전혀 알 수 없는 글이다.
- 설령 <필경사 바틀비>를 읽었던 사람들이 읽었다 해도 글 자체가 너무 주관적인 글이라 공감이 쉽지 않다 아니 공감이 안된다.
- 심지어 책을 주제로 글을 쓸 때는 간단히 줄거리라도 써야 하는 데 줄거리도 없다.
- 브런치 글은 브런치 독자층이 쉽게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
- 브런치 독자와 연결되는 연결고리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 인용문이 너무 길다.
남편은 내가 너무 오랜 기간 <필경사 바틀비>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자 일단은 좀 벗어나라고 했다. 벗어나서 시간이 지난 뒤 다시 생각하면 훨씬 나을 거라는 얘기다.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나도 모르게 남편에게 바틀비의 말로 대답했다. 공들여 힘들게 쓴 글을 잘못 썼다고 하니 남편이 아무리 옳은 말로 조목조목 얘기해 줘도 그냥 거부하고 싶었다.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듣자 남편이 폭소를 터뜨렸다. 바틀비의 죽음을 희화화하려는 의도는 결코 아니었다. 그저 남편으로부터 예기치 못한 악평을 들어 기운도 빠지고 싸한 분위기를 전환시킬 겸 농담 반 진담 반 한 말인데 내 입에 그 말이 너무 자연스럽게 착 붙어버린 사실에 살짝 놀랐다.
남편은 다시 말을 바꾸었다.
“그럼 좀 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도록 글을 바꿔보던가.”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난 또 같은 대답을 했다.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그냥 그렇게 안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남편 말대로 잠시 쉬면서 마음을 가라앉히자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이렇게 이 상황을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정리하게 되었다.
아직 <필경사 바틀비>의 세계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는 못했다. 하지만 글로 이런저런 생각을 쓰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마음이 편해지니 남편에게 ‘낙제점’을 받은 글도 그냥 없애고 싶지 않아 이 글에 뒤이어 올리기로 했다.
낙제점을 받은 글, <이 시대의 바틀비를 애도하며......>를 기대하시라.
그림출처 Bartleby the Scrivener Illustrions by Paradox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