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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몰토크 Jun 28. 2024

딜리버리 맨은 신발을 벗지 않는다

몸도 정신도 나이가 들면 예전 같지 않고 점차 쇠해가면서 티를 내는 건 비단 사람뿐만이 아닌가 보다.


우리가 타고 다니는 차들도 집안에 있는 가전제품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가전제품의 평균 수명은 대략 10년이라 했지만 관리를 잘해서 인지(?) 20년이 넘도록 별문제 없이 잘 쓰고 있었는데 요즘엔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일하고 버텨내느라 힘들어 죽겠으니 이제는 제발 새것으로 바꾸라고 파업이라도 하는 것처럼 자꾸 말썽을 부린다.


예열을 하려고 오븐 온도를 맞춘 다음 on을 누르면 "어림없지 흥!~ "하고 튕기듯 불이 들어왔다가는 바로 나가버리기 일쑤다.

살살 달래서 몇 번씩 켰다 껐다를 반복해야 겨우 한 번쯤 들어와 준다던가 이제는 되겠지 싶어 타임을 맞춰놔도 이번에는 알람이 가버렸는지 제시간에 울리지 않아 다 태우게 한다던가...

인내심 테스트 하듯 약을 올린다.


식기 세척기는 그릇이 제대로 닦이고 있는 건지 세탁기에 빨래는 제대로 빨리고 있는 건지... 수명이 다해가고 있는 우리 집 가전제품들... 도대체 믿음이 가질 않는다.


처음부터 함께 했던 친구들이라 정이 들어 막상 바꾸려니까 그래도 아직은 돌아가는데... 망설여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보내주어야 할 때가 된 것 같아 새것을 들이기로 한다.


한꺼번에 모두 교체하려면 부담이 되니 하나씩 바꾸기로 하고 우선 스토브와 식기세척기부터 바꾸기로 하고 온라인으로 오더를 한다.


캐나다에서 가전제품을 처음으로 바꾸는 것이라 경험도 없고 무거운 것들이라 옮기다 긁히거나 하면 안 되니 이사할 때처럼 바닥에 뭘 깔아 놓아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걱정이 많이 되긴 한다.

그렇다고 바닥 전체에 다 깔아 놓을 수도 없고 귀찮기도 하고 해서 그냥 되는 대로 하기로 한다.


혼자는 감당이 안 될 것 같아 업체에 전화해 남편 출근 전인 "아침 8시쯤 일찍 와 달라"고 부탁을 했지만 "요청은 해 보겠지만 약속은 할 수 없다"는 지극히 예상할 수 있던 말만 들어 기대는 하지 않는다.


드디어 새로운 가전제품이 집으로 들어오는 날


띵똥!~~~ 벨이 울린다.

괜히 한번 까칠하게 굴어 본 건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다행히 내가 원했던 이른 시간에 와줘서 남편이 앞장서 나간다.


물건을 들고 오기 전에 먼저 옮겨도 되는 상황인지(?)를 확인차 일꾼 중 한 사람이 손에 배달정보가 기록된 서류를 들고 온다.

문 앞에서 신발을 신지 않고 있는 우리를 보았을 텐데도 당연하다는 듯 터벅터벅 집으로 들어오는 그에게 신발을 벗어달라고 남편이 요청을 하자 잠시 머뭇거리는 듯 묘한 표정을 짓더니 일단 신발을 벗는다.


들어주기는 했지만 뭔가 불만이 있는 모양이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우리는 신발을 신어야 한다"고 말한다.


what!~

아니 왜 집안에 더러운 신발을 신고 들어오겠다는 거지?

흙냄새 맡고 싶냐? 묻는 건가?

이 깨끗한 마루 바닥에 흙을 묻히겠다는 게 말이 되냐고?


가끔 오래전 미드를 보다 보면 외출하고 집에 들어와서 카펫이 깔려있는 바닥에 흙 묻은 워커를 신고 여기저기 다니다가 그냥 그대로 침대에 눕는 장면들을 본 적이 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했는데... 


저들도 얼마나 비위생적인 가를 깨달아서인지 요즘 캐나다인들이 살고 있는 집에 가보면 그들 또한 신발을 벗는다.


그런데 이들은 왜 이렇게 당당하게 말을 하는 거지?


유달리 그런 쪽으로 결벽증이 심한 내게는 어디를 밟고 다녔는지도 모를 신발을 신고 집안에 들어온다는 사실을 결코 용납할 수가 없다.


"나는 원하지 않아. 우리는 한 번도 집안에 신발을 신고 들어온 적이 없는데 너희는 무슨 문제있느냐?"고 물으니 

"큰 물건을 들고 나르다 놓쳐서 발을 찧기라도 하면 안 되니 안전을 위해서..."

그러면서 "내 신발은 깨끗해"라고 말한다.

헐!~~ 신발이 깨끗하기는 쥐뿔~


"조심해서 들면 되지 발을 왜 찧는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지만 혼자 속으로만 소심하게 외쳐본다.

안전은  중요하니까...


충분히 이해는 된다.

무거운 물건을 들고 옮기느라 힘이 드는데 신고 있던 신발을 벗고 하는 작업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 발이라도 찧으면 부상의 염려가 있으니까 나름의 룰을 만들어 놓은 듯싶다.


그렇다고 해도 이해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조금 다른 듯하다.

신발 벗고 들어와서도 아무 문제 없이 일 잘하는 한국에서의 개념과 너무나 다른 시스템이 당황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내 사전엔 절대 없을 것 같은 그 일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해 다시 한번 정중히 신발 벗어주면 안 되겠니?  그랬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마지못해 "오케이!" 한다.


하지만 안 들었으면 모를까 다른 것도 아니고 안전을 위해서라는데... 뭔가 개운하지가 않다.


예전에 아들 신혼방에 가구 들어올 때는 배달하는 사람들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벗어줬는데 이들은 왜 토를 다는 거지?

 

이렇게 까지 해서 그들이 마지못해 신발을 벗고 옮기다 다치기라도 하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니 그것도 안될 것 같다.

남편이 "그들이 가고 난 다음 깨끗하게 닦으면 되니까 그냥 들어오게 하자"고 한다.


아무리 싫어도 내가 그들의 안전까지 막을 수는 없으니까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밖에서 지나다니는 사람이 "저 집에 스토브 새로 가는구나!" 다 알아차리라는 듯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둘이서 낄낄거리고 농담도 하면서 물건을 들고 와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려고 한다.


남편이 그냥 들어오라고 말하니 팔에 들고 있는 무게에 눌린 때문인지 거인들 발걸음처럼 쿵쿵 소리를 내며 지저분한 신발을 신고 들어온다.


에휴!


새 물건이 쉽게 들어갈 수 있도록 청소를 싹 해놓아야 한다고 해서 남편이 전날 밤에 다 치워놓고 옛날 스토브와 식기세척기를 꺼내 그들이 들고 가기 좋은 위치에 얌전히 놓아두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원래 있던 자리에 새 물건을 채워 넣지도 않고 근처도 아닌 그저 공간이 넓어 보이는 빈 공간에 툭 하고 내려놓더니 "다 되었다"라고 한다.

황당하게...


"이게 끝이야?" 하니까 "그렇다"라고 한다.

"인스톨 안 해?"


"우리는 딜리버리만 하지 인스톨은 안 해" 

"그럼 우리가 해야 하는 거야? 하니까 "인스톨은 다른 사람이 하는 거니까 구입한 업체에 전화해서 사실 확인을 해 봐"라고 말하고는 옛날 제품들만 들고는 가버린다.


한대 얻어맞은 기분?

이거 대체 뭐지?

배달하면 조립까지 다 해서 쓸 수 있게 해 줘야 하는 거 아냐?


스토브야 코드만 꼽으면 되니까 상관없다고 해도 복잡한 세척기는 어떻게 하는데?


따져 보려고 바로 전화를 하니 당신의 전화는 중요하느니 어쩌니 입에 발린 인사를 하면서도 그렇게 중요하면 바로 받아야지 받기는커녕 니 앞에 기다리는 이가 몇 명이다라고 사람도 아닌 기계만 열심히 떠들어 댄다.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하고 30분 이상 기다린 다음 겨우 통화가 되었는데 매니저에게 물어본다고 가서는 또 한나절.... 듣기도 싫은 음악만 나온다.


한참만에 다시 연결이 되어 "왜 인스톨을 안 해주냐? 베이직 인스톨은 해주는 걸로 알고 있는데..."따져 묻듯 이야기하니 "다른 것은 몰라도 식기세척기는 인스톨 안 해준다"고 한다.

정작 인스톨이 필요한 것은 식기세척기인데 그것만 안 해준다니...


"그럼 우리가 하라고?" 하니까 "플러머(배관공) 불러서 하면 된다" 고 한다.

뭐라고?

이렇게 성의 없는 대답을 하다니... 기가 막힌다.


"옛날에 쓰던 스토브와 식기세척기는 가져갔느냐?" 고 묻는다.

지들 필요한 것만 챙기고 해줘야 하는 것은 안 해주고... 화가 난다.


"그것만 가져가고 아무것도 안 해준 채 오로지 배달만 해주고 갔어" 하니까 "나중에 매니저가 전화할 것이다"라는 말을 끝으로 그녀의 책임은 다한 듯 "좋은 하루 보내세요" 하고 끊는다.


"너 같으면 좋은 하루 되겠니?"

하고는 싶지만 그녀 또한 자신의 맡은 일은 거기까지일 테니 우리만 답답한 거지.


배달을 해주면 인스톨해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만 생각하고 디테일하게 확인하지 않은 우리 잘못이긴 하다.

누굴 탓하리오?

사람을 부르던 우리가 직접 하든 뭐든 해야 한다.


대략 난감한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지?

거실 마루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 잡고 앉아 배 째라 하고 있는 두 물건은 어쨌든 치워야 한다.


남편이 퇴근을 하고 와서 작업이 쉬운 스토브 먼저 제 자리에 밀어 넣고 코드까지 꼽아보니 그래도 제법 폼이 난다.

하나는 정리했다.


이제 어려운 식기세척기가 남았다.


이곳은 인건비가 워낙 비싸 사람 부르기가 겁이 난다.

남편이 손기술이 있어 예전부터 집안에 있는 웬만한 건 직접 교체하기도 하고 고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사람 부르는 대신 이번에도 그가 하나하나 끼우고 박기도 하면서 작업을 한다.


시간은 자꾸 가는데 문제가 생긴 듯하다.

옛날 제품과 신제품의 연결 호스 크기가 다르다.

맞는 부속을 사 와야 작업을 할 수 있는데 시간이 새벽 2시라 그냥 자기로 하고 다음날 남편이 새로운 것으로 사 와 맞춰 끼우긴 했는데 이번에는 전원이 들어오질 않는다.


분명 연결하기 전에 전원스윗치 켜서 작동되는 걸 확인했는데 힘들게 작업 마치고 나니 뭘 잘못 건드렸는지 "그리 쉽게 될 줄 알았니? 날 잡아 잡숴" 하는 듯이 먹통이다.

역시 전문가는 따로 있는 건가?


오늘도 새벽 2시까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나 대신 혼자 열심히 커다란 식기세척기의 몸뚱이를 안고 씨름을 하더니... 드디어 스윗치 on에 빨간 불이 들어오고 작동이 된다.


You are a handyman!


다음날 이제부터는 내가 할 일이다.

구제품으로부터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달라진 세상만큼이나 변해 버린 새 제품의 사용 설명서를 보고 오븐도 식기 세척기도 사용해 보는데 없던 기능들이 너무 많이 생겨 여간 어색한 것이 아니다.

구관이 명관인 것인가?


그래도 어찌어찌 방법을 연구해 사용해 본다.

신제품이 뿜어내는 아우라로 집안 전체가 깨끗하고 세련돼 보일 뿐 아니라 되다 말다를 반복하며 애먹이던 말썽도 전혀 부리지 않고 제기능을 다하는 걸 보니 얼마나 기특한가?


쓸 때는 몰랐는데 그동안 어찌 그런 걸 쓰고 있었나 싶기도 하고 사람마음이 간사해서 이제는 새것에 더 익숙해져 간다.


새것이 좋긴 좋아.

신형 스토브와 식기세척기가 자리 잡아 깔끔해진 부엌 귀퉁이에 나이 들어 추리하게 서있는 구형 냉장고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비교가 되어 그 또한 얼른 바꾸고 싶어 진다.

다음엔 세탁기도 바꿔야지~.


어느새 딜리버리 맨과의 사이에 신발과 인스톨 문제로 스트레스받던 일은 다 잊었는지 새 물건에 현혹되어 첫째를 나을 때의 고통으로 둘째는 절대로 안 낳겠다는 산모가 시간이 지나면 망각하듯 딜리버리 맨이 신발을 벗지 않음으로써 그들이 마루를 더럽힐 일 따위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집안의 가전제품을 몽땅 바꿔놓을 생각을 또다시 한다.


이곳에 와서 20년이 넘게 살아도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일들이 있다니...


딜리버리 맨은 신발을 벗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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