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몰토크 Sep 26. 2024

베일에 싸인 그녀의 수상한 비밀

여름과 가을이 서로 텃세를 부리듯 오락가락하면서 헷갈리게 하지만 절기를 무시할 수는 없는지 뒷마당 사과나무에 주렁주렁 열린 사과들이 나를 좀 봐주세요 말하듯 어느새 빨간색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사람마음이 참 간사하지... 사과나무에 꽃만 펴도 행복했는데... 벌써 다 잊었나 보다.

해마다 요맘때면 보답하듯 탐스러운 열매를 맺어주고, 자랄 때로 다 자란 아이들이 독립을 하듯, 그들도 때가 되면 머물던 집에서 방을 빼야 하는 간절함을 알면서도 귀찮아서 오늘? 아니면 내일? 언제 따러 나갈지 고민만 한다.

머지않은 이별을 의식해서인지 서로 떨어질세라 옹기종기 붙은 채로 매달려 있는 녀석들을 창문너머로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려니 유난히 빨간 사과를 좋아하던 그 친구가 문뜩 떠오른다.

 

30년이 넘도록 관계 유지를 하고 있는 친구들은 서로의 좋은 점, 나쁜 점을 다 알고 그럼에도 함께 하기로 한 일종의 동지이다.

그러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어떤 기분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웬만한 건 눈치껏 알아차린다.

하지만 때로는 이런 관계 속에서도 도저히 이해를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캐나다로 이민 오기 전날 밤,

공항에서의 배웅은 가족들에게 양보를 하고 대신 우리 집으로, 그 마저도 가족들과의 만찬 때문에 집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근처 카페에서 간단하게 차 한잔만 하고 돌아간 친구 두 명이 있다.

그녀는 그중 한 명이다.

특별한 이별사를 준비한 것도 아니고, 뜻깊은 뭔가를 남기기 위해서도 아닌 오롯이 멀리 떠나는 나를 한 번이라도 더 봐주고, 함께 해 주고 싶어 그 밤에 달려와준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그 마음을 고이 간직한 채 난 이곳으로 떠나왔다.


아직 새로운 친구를 만들지 못하던 시절에는 한없는 외로움을 이메일로 주고받으며 달랠 수 있었다.

하늘의 구름도 제자리에 머물지 않고 서서히 움직이듯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것이 처음과는 다르게 변해간다.

나는 나대로 저들을 저들대로 각자 꾸려야 하는 자신의 삶에 치여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나? 자주 오가던 연락이 뜸해지기 시작한다.

낯선 곳에서의 적응이 쉽지 않은 탓에 편지 쓰듯 작문의 글을 보냈지만 카톡의 출현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대화 방법에 이미 익숙해져 버린 그들은 단 몇 줄로 아니면 단답식으로 짧게 답이 오곤 한다.


당시 카톡이 뭔지도 모르는 나로서는 내게 할애해 주는 마음의 시간이 짧아진 것 같아 서운해지지 시작하고 각기 다른 세상에서의 삶의 간극으로 관계마저 소원해지고 어그러질까 봐 조마조마 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친구들이 모두 결혼해서 아이들과 함께 자신만의 가정을 꾸리고 난 후에도 마지막까지 홀로 남아 싱글의 삶을 즐기던 그녀가 40을 훌쩍 넘긴 나이에 드디어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평소 절에 봉사활동을 다닌 그녀를 잘 본 주변의 어머님들 중에 한 분이 중신을 서겠다고 나서는 통에 거절하기 뭐 해 그냥 한번 본 거라는데 결혼까지...

소식을 전하는 친구에 의하면 신랑 될 사람도 그녀처럼 결혼한 적 없는 총각에, 연하, 거기다 캐나다에 살고 있다고 하면서 누구는 앞으로 엎어져도 자갈밭이고 누구는 뒤로 자빠져도 폭신한 이불 위라면서 늦은 나이에 결혼하는 그녀를 부러워하는 어투가 글에서도 느껴진다.


결혼 계획도 없이 살다가 돌덩이처럼 굳어있던 그녀의 마음을 스르륵 녹여 움직일 만큼 믿음을 준 그 남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우리 모두 궁금해한다.

그런데 이 결혼 이상하다.

그녀의 깜짝 결혼 소식이 우리들 사이에선 굉장한 이슈인데도 정작 그녀는 아무 말이 없다.

며칠 전에도 그녀와 메일을 주고받았는데... 결혼에 관한 그 어떤 말도 듣지 못했다.

그녀와의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던 것도 아닌데... 왜?


우리가 같은 캐나다에 살게 될 것이라는 우연만으로도 이야깃거리가 될 만큼 친구들은 그녀의 놀라운 뉴스(?)에 대해 모두 신기해만 했다.

그렇지만 그것에 관련해서 여태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나의 반응에 친구들은 제일 먼저 알려주라고 했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더한다.


그러게... 결혼할 남자가 캐나다에 있다면 그녀도 곧 캐나다로 온다는 건데... 

이런 경우 나라면 캐나다 사는 지인에게 제일 먼저 알렸을 것 같은데...

뭐지?


답답한 이가 먼저 우물을 판다고 내가 먼저 결혼 축하한다는 메일을 보낸다.

방금 막 하려고 했다는 등의 호들갑스러운 답변을 생각했는데 늦은 답에 대한 미안함이 아닌 난감한듯한 말투가 느껴진다.

자신의 결혼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속시원히 말도 안 하고, 할 말이 있으면서도 말을 안 해주는 건지, 못하는 건지, 묘한 느낌... 

읽다 보니 숨 막힐 듯이 갑갑해진다.


미궁 속에서 우리끼리 이런저런 말들이 오가는 가운데 시간은 지나고 날짜도, 장소도, 밝히지 않아 우리 중 그 어느 누구도 참석하지 못한 채 그녀의 결혼식은 비밀리에 치러진다. 

초대했으면 나는 가 볼 수도 있었을 텐데...

썰렁한 교회(?) 내부인 듯한 곳에 홀로 서있는 그녀의 옆모습이 찍힌 사진 한 장이 다른 친구로부터 보내져 오면서 그녀의 결혼사진(?)을 대신한다.


캐나다로 오고 난 후부터 그녀는 친구들에게는 생소할 수도 있는 이곳에서의 일상의 사진들을 메일에 첨부하면서 자신의 안부를 가끔씩 전한다.

역시 나는 거기서 조차 열외가 된다.

언짢아하는 내게 친구가 복사해서 전송해 준 그녀의 사진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내가 캐나다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에겐 위안이 아니라 오히려 부담인 건가?

오랜 친구끼리 타국에서 서로 의지하면서 살면 외롭지 않고 좋을 것이라 기대했던 나와는 정 반대로 그녀는 도리어 자신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시작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연유를 알 수 없으니 답답한 마음에 홀로 모래성을 쌓았다, 부쉈다 머릿속에서 쑈를 벌인다.


자존심도 없는 나는 이따금씩 캐나다에서 그녀를 보면 어떨까? 상상을 하곤 한다.

물론 같은 캐나다에 살아도 땅덩어리가 넓어 같은 도시가 아니면 만나기도 쉽지는 않다.

그녀도 지금은 같은 마음이 아니라고 해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언젠가는 편안한 마음으로 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으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기로 하고 어떤 관계든 궁금한 사람이 먼저 연락하는 법이라 어찌 되었건 가끔씩이라도 주고받는 메일로 그녀와의 관계가 어렵게 유지는 되고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여름휴가가 다가오면서 계획을 짜다가 문득 그녀 생각이 났다.

지금쯤은 괜찮아졌겠지 싶어 겸사겸사 그녀가 사는 도시를 방문해 볼까? 하고는 메일에 그것에 관한 이야기와 우리가 그곳에 가면 어디에서 만나면 좋을까? 거기 어때? 하고 보냈는데 예상밖의 당황한 듯, 변명 같은 답이 온다.

이러저러해서... 아직은...이라는 말과 함께...

결혼말이 오가면서부터 그녀에겐 이상한 버릇이 생긴 듯하다.

무슨 말을 하든 주제를 살짝 벗어난 듯한 동문서답 형태의 답을 하면서 자꾸 이유를 댄다.

이번에도 내가 너무 서둘러 그녀의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를 던져 파장을 일으킨 것 같다는 자책이 든다.

결국 그녀를 만나러 계획은 무산되어 버렸다.


어떻게든 붙잡고 있으려고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도 반응해 주지 않는 일방적인 관계는 오래가지도 못할 뿐 아니라 지치게 만든다.

지금 통화할까? 하면 또 이유가 붙고, 내가 사는 곳으로 놀러 오라고 하니 "벌써 다녀왔는데..." 하면서 말끝을 흐린다.

"뭐? 여기까지 왔다가 연락도 안 하고 그냥 갔다고?" 

또 다른 이유를 댄다. 블라블라...


그런 일들이 자꾸 반복되니까 점점 피곤해진다.

어느 순간, 꼭 쥐고 있던 관계가 끊어질까 봐 옆구리를 쿡쿡 계속 찔러대는 내가 그녀를 괴롭히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불편한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자주 연락은 못해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수다 떨면서 연극 보러도 같이 가고, 괜히 다른 학교 축제에 파트너도 없이 둘이만 가보기도 했던 우리였는데...

그녀의 말투로 봐서 갑자기 내가 싫어져서 피하는 것 같지는 않고, 들키고 싶지 않은 그 무언가를 지켜내고 싶어 필사적으로 방어하는 듯한... 딱 그 느낌이다.

그것이 뭔지 모르지만 지속되는 이 상황이 그저 지루하고 우리의 오랜 시간의 관계에 대한 아쉬움, 섭섭함... 

그런 것들로 더 힘들어져만 간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과의 연락도 뜸해지고 항상 이유가 있는 그녀의 말과 행동에 지친 다른 친구들 마저도 그녀의 늦은 결혼에 대한 각종 추측이 난무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러다 한국에 다니러 간 그녀가 친구들 앞에서 묻지도 않았는데 "나중에 다 말할게..." 했다는 말을 듣게 된다.


그 후로도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의 시점까지도 우리 중에 그 어느 누구도 그녀의 결혼생활에 대해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말 못 하는 그 심정은 또 얼마나 괴로울까만은 언제쯤이면 편안하게 모든 걸 터놓고 말해줄 수 있으려나...


친구라는 이름으로 오랜 시간 함께 해 온 우리들에게조차 숨기고 싶은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녀 스스로 봉인 해제해 열고 나올 때까지 궁금해하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기로 하고 모두 입에 커다란 지퍼를 채워 잠가놓는다.

어차피 그녀만 행복하다면 그만 이니까...



창밖의 사과나무를 바라보다 사과를 좋아하던 그녀 생각에 빠져 있는 나를 의식했는지 빨갛게 익은 사과들이 대궐에서 간택되기를 기다리는 후궁들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운 미모를 뽐내면서 발그레 붉어진 얼굴로 환하게 웃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무지개의 두 얼굴을 보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