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편단심 민들레 홀씨되어 날다
평소 게을러 운동은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오늘은 동네 한 바퀴 돌아볼까?
만난 적 없는 낯선 이들이 마주칠 때마다 외쳐대는 "헬로" 인사가 부담스럽다.
조금 걷다 보니 아직은 추운 날씨에 씨실과 날실로 엉성하게 엮은 하얀 솜털 모자 쓰고 줄지어 서있는 민들레 홀씨들이 눈에 들어온다.
겨우내 살을 에는 추위 탓에 잠시 하던 일 멈추고 취해보는 휴식의 시간.
숨죽이고 눈에 보이지 않으니 오랜만에 방해꾼 없는 숙면(熟眠)의 편안함 맘껏 누리다가
본능으로 감지한 봄이 찾아오니 잘 잤다 하품하며 자리 털고 일어나 크게 기지개 한번 펴고는 땅속이든 돌틈사이든 지천이 다 내 땅이다 어김없이 고개를 사알짝 내민다.
삐죽삐죽 어느새 여기저기에 밭을 만들어 가면서 자신들만의 성역을 넓혀가고
개선장군이 따로 없다
노오란 꽃으로 피어나 한껏 수려해진 미모까지 과시하며 우리에게 자신의 부활을 알려온다.
차를 타고 가다가 들판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샛노란 민들레 꽃밭을 보면 유채꽃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뿜뿜 같은 색을 뿜어내는데도 모두가 똑같은 사랑일 수는 없나 보다.
노란색 융단을 깔아놓은 듯 포근하고 화사해서 그 장관을 못 봐줄 리도 없건만
사진도 함께 찍어주고 추억도 남기려는 이들의 사랑은 유채꽃만의 특권인가?
민들레는 어느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는다.
사랑받지 못하는 서러움 가슴에 품고 혹여 그 이유가 못나서 인가 싶어 실컷 치장하느라
화려하고 고운 꽃 예쁘게 피워 유채꽃만큼이나 아름다운 정경을 선물해도
이쁘다 환영받기는커녕 다른 꽃들에 방해된다 애꿎은 뿌리까지 파헤쳐지는 슬픈 꽃
행여 뽑혀나갈까 뿌리라도 깊이 내리고 고군 분투 하며 홀로 산 목숨 지켜내야 하는 외로움
갖은 핍박으로 피기도 전에 스러져 가야 하는 짧디 짧은 절명의 슬픔은 누가 알아줄까?
후벼 파고 짓밟아도 불사신(不死身)처럼 무한한 생명력으로 다시 살아나는 그 질긴 목숨이 얄미운 걸까?
잔디밭의 주인을 몰아내고 자신의 무리로 영토 확장을 해 나가는 그 세력이 두려워서인가?
이제 막 태어나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어린싹이 빼꼼히 올라오면 다 자라기도 전에
너나 할 것 없이 삽을 손에 들고 싹부터 잘라내야 한다 뽑아내려 설쳐대고
밟힐수록 더 꿈틀대는 강인함과 절개 곧은 일편단심의 절규에도 무심하다.
이유 없이 내쳐지는 슬픔 가득 안고 마음속 심연(深淵) 한가운데에서부터 올라오는 서운함 때문인가?
깊디깊은 절망의 한 풀어내듯 한숨 한번 크게 쉬고 온 힘을 다해 몸 안에서 홀씨 한 움큼 털어낸다.
멀리 떠나는 길 추우면 안 되니 따스하게 하얀 솜털 목도리 머리까지 둘둘 말아 감고
불어오는 바람 따라 염치없이 무임승차 올라 타 오늘은 어느 곳에서 지친 몸 쉬어갈까?
정처 없이 떠돌다가 반기는 이 하나 없어도 상관없다
살포시 내려앉아 안착하고 나면 힘껏 비비고 들어가 뽑혀나갈 설움 대비해 혼신의 힘 다해 길게 뻗어가며 종족 번식까지 마다않고 오기 부리듯 또다시 새로운 삶을 이어간다.
천시와 학대를 담아 무참히 버려져도 다시 꿈틀거리며 꽃 피우는 불멸의 꽃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보여주는 무한한 외사랑이 애달프다.
걸음걸음마다 옆에서 함께 따라 걷고 있는 듯 흩어져 피어있는 민들레 꽃들을 보니 공연히 깊은 상념에 젖어든다.
타국에 와 이방인으로 사는 세월
굴러온 돌이 박힌 돌 차고 뿌리내리고 앉을까 뽑아내려 던져대는 적의에 찬 시선에 몸 둘 바 몰라 서성이고
얕은 바람에도 흔들린 채 의미 없이 던지는 한 마디에도 상처받아 아파한 시간들...
찬란하게 꽃 피워 당당하게 서서 버텨 내겠단 다짐도 힘을 잃어 갈팡질팡
어느새 시들어 하얗게 변해 버린 머리가
쭈글거리는 얼굴이
움츠려 들어 작아진 몸뚱이가 서글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긴 생명줄 부여잡고 살아온 내 삶이 민들레 꽃이랑 다를 것이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