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한 자연의 변화
나무를 통해 우리는 사계의 변화를 본다.
겨울과 줄다리기 놀이하는 재미에 푹 빠져 영영 오지 않을 것 같더니 드디어 봄이 오려나 보다.
어느새 나무에 작은 잎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한다.
갓 잡아 아직 파닥 거리는 생선위에 얼음 잔뜩 올려 기절시킨 뒤 바로 냉동시켜 버리듯 아직 게임이 끝나길 원치 않는 추운 겨울 한파가 발악하듯 "얼음"을 외치면서 모두를 얼려버리면 규칙에 따라 움직이던 모든 동작을 잠시 멈추어야 한다.
그 탓에 앞으로 나아가다가도 멈칫 멈칫 한 템포씩 쉬어 가느라 느리긴 하지만 때라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는지 파란 이파리들이 얼굴 내밀고 그 사이 뿔긋 뿔긋 꽃망울들이 자리 잡는다.
이젠 봄기운이 사방팔방 빽빽하게 들어서 더 이상은 심술쟁이 겨울 녀석이 차지할 공간이 없을 거라 여기고 안심한 듯 저들만의 봄맞이 축제를 한창 벌이고 있을 때쯤 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홀로 술래 없는 숨바꼭질 중이던 함박눈이 어디 숨었다 나타났는지 예고도 없이 그것도 5월에 또 한차례 훼방을 놓는다.
해마다 몇 번씩은 왔다 갔다 변덕쟁이 계절 탓에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늘 적응 훈련을 해 오던 터라 어미나무들은 당황치 않고 기껏 밖으로 내보낸 어린 꽃망울 혹시라도 다칠까 가지마다 길게 뻗어 소리 없이 내리는 눈에 맞서 방패막이가 되어준다.
주책없이 마구 쏟아져 내리는 눈에 젖 먹던 힘마저 소진(消盡)되어 버리면 몸이라도 가벼워질까 쌓인 눈 툭툭 털어내며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비틀...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어린 자식들 품고 지켜내느라 사지육신(四肢肉身)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말이 아닌데 남아있던 끈끈한 모성이 지쳐 잠드려는 뇌를 깨워 풀가동 시켜본다.
곰을 피하느라 바닥에 엎드려 죽은 척했던 이솝이야기의 친구처럼 저도 숨 안 쉬고 죽은 척하면 제아무리 사나운 폭설도 안 건드리고 그냥 지나가 줄까?
잔뜩 웅크린 채 움직이지 않고 있는 모습이 마치 생을 포기한 듯 보여
"죽은 건가?" 물으면
또다시 파릇파릇한 잎새들을 피워내며 "아니(NO)"라고 답한다
이런 작은 희생을 업고 어미나무의 포근하고 따뜻한 품 안에서 막 피어나던 어린 잎사귀들은 오늘도 무럭무럭 자란다.
어떤 심술을 부려봐도 이미 와 버린 봄과 함께 하느라 더 이상은 그 누구도 자신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식했는지 머쓱해하며 조용히 물러난 고집불통 눈 뒤로 눈치 없는 해님이 방긋거리면 가지에 붙어 짓누르던 무거운 눈 툴툴 털어내는 엄마나무와 갓 피어난 아기잎새들 서로 얼굴 보며 웃는다.
삐죽삐죽 솟아 오른 이웃마을 잔디밭의 잡초들 사이로 이름 없는 들꽃들이 우리도 친구라고 거든다.
겨우내 동면(冬眠)한 동물들처럼 봄 햇살 한껏 받으며 잠에서 깨어난 여린 떡잎들
상큼한 바깥공기 온몸으로 맞이한 채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이제 막 걸음마 시작한 아기들은 어린 꽃망울 하나둘씩 피워내다가 다가오는 계절과 함께 물오른 성숙의 아름다움 맘껏 과시해 본다.
찌는 더위에 누굴 쉬게 하고 싶었을까?
커다란 키로 그늘을 그려내 시원함 선사하고 여름 내내 땀 흘려 이 꽃에서 저 꽃으로 날아다니며 꿀벌들이 전한 꽃가루 덕에 몸 안에 가득 품고 있던 씨앗으로 탐스러운 열매를 만들어 인심 좋게 선물로 내어준다.
역시 미모는 한철인가?
아낌없이 다 주고 나니 보람도 없이 계절 따라 말라비틀어져만 가던 가지에 생명줄 부여잡듯 매달려 있던 잎새들은 허망하게 낙엽이 되어 바람 따라 이리저리 방랑자가 되어 정처 없는 여행을 떠난다.
다 키워 자식들 모두 독립까지 시키고 나니 그동안 애썼다 보상해 주듯 오랜만에 자유가 주어지고
푸르러 풍성했던 지난날의 젊음을 뒤로 물기 빠진 채 볼품없어진 모습으로 새로운 해의 또 다른 자식들을 맞이하기 위해 넘치던 에너지 이제 그만 비축해 두고 난방도 안 되는 방에 눕지도 못하고 선 채로 깊은 잠에 빠져 기나긴 겨울을 난다.
새로운 계절이 또 한 번 찾아오면 긴 목숨 다시 연명(延命)해낼 수 있을지 조차 기약할 수 없는 막연함 그대로 안고 그럼에도 끊임없이 반복할 수밖에 없는 나무로써의 삶의 애환을 담아낸다.
누군가는 짓밟아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김없는 국룰 지켜내며 오고 또 가는 계절의 변화
가끔씩은 망각할 수도 있건만 본능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그 부지런함은 갑옷입은 병사들이 훼방을 놓으려 쑥대밭을 만들어 놓아 그 모습이 변해도 헤매지 않고 약속이라도 한 듯 늘 제자리로 영광스러운 귀환을 하곤 한다.
추운 겨울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지만 전혀 섹시하지도 않은 오히려 보기 민망할 정도로 뼈만 남은 앙상한 가지로 있을 때는 쳐다보지도 않다가 새로운 생명이 살아 숨 쉬고 있는 현장을 감지하게 되면 그제야 관심 있는 척 마당으로 나가 낙락장송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나무를 한 번 더 쳐다보게 된다.
"살아났네!~"
"추웠던 겨울 따뜻한 옷도 없이 쌓인 눈을 이불 삼아 잘도 견뎌냈구나"
그동안 무관심했던 미안함이 괜히 마음에 걸려 서툰 미소를 지어 보인다.
비록 늘 같은 이름을 걸고 우리 곁을 다시 찾아온다고 해도 작년에 또는 그전에 내게 머물던 그 계절은 이미 지나가 버렸고 나이가 달라진 상태로 맞이하는 계절은 변해버린 외모처럼 그대로 일 수는 없지만 나무들이 보여주는 불평 없는 삶의 무한 반복을 통해 우리도 슬프면 슬픈 대로 힘들면 힘든 대로 버티면서라도 또다시 살아가야 한다는 작은 울림을 받는다.
스쳐 지나가듯이 왔다가 가는 계절의 변화에 나무들은 또다시 사계절의 옷을 갈아입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