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바바 마윈의 시련과 성공 - 1
알리바바는 "중국의 아마존"이라 불리며, 그 이름값에 걸맞게 안 하는 서비스가 없습니다. 이커머스, 핀테크, 클라우드, 콘텐츠, 배달 등등, 모든 영역에서 알리바바의 흔적을 찾을 수 있죠. 이런 거대한 왕국을 만든 마윈은, 중국에서 신과 같은 존재로 거론됐습니다. 하지만 마윈도 여러 창업자와 마찬가지로, 순탄하지 않고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마윈이 영어강사였던 일화는 유명합니다. 1992년, 마윈은 영어강사로 근무하며 번역회사인 해박번역사(海博翻译社)를 창업했습니다. 해박번역사는 정부로부터 의뢰를 받아 승승장구할 것 같았지만, 운영은 생각보다 힘들었고, 월세를 내기에도 벅찼습니다. 계속되는 적자에 꽃을 팔아 월세를 충당했으며, 꽃장사가 잘되자 사무실의 반을 아예 꽃가게로 바꿨습니다.
그러다 1995년, 해박번역사는 드디어 흑자전환에 성공했습니다. 영어강사와 번역의 실력을 정부로부터 인정받은 마윈은, 중국 정부와 미국의 고속도로 계약 건으로 미국을 방문할 기회를 드디어 얻었습니다. 미국에서 인터넷을 접한 마윈은 충격에 빠졌고, 미국 인터넷에 중국, 중국 제품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다는 사실에 2차 충격을 먹었습니다.
중국에서 인터넷 비즈니스를 해야겠다고 결심한 마윈은, 귀국 후 중국황엽(中国黄页)이라는 기업 정보 열람 사이트를 출시했으며, 기업에게 영문사이트를 제공해 주는 서비스도 제공했습니다. 오늘날 링크드인과 비슷하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하지만 이때 마윈은, 급한 마음에 본인 지분 30%만 남기고, 나머지 지분 70%를 China Telecom에 매각해 투자를 받았습니다. 사장이지만 바지사장인 겪이고, 실제로 업무도 영업 위주로 했습니다.
중국황엽의 매출은 나날이 증가했지만, 결국 마윈과 투자자의 의견 불일치로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지분 30%만 보유한 마윈은, 어쩔 수 없이 본인이 창업한 회사로부터 쫓겨나는 비운을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마윈과 함께 한 창업 멤버들은 그와 함께했습니다. 마윈은 그의 방으로 팀원들을 모아 선택권을 줬습니다.
"너희에게 3가지 선택권을 주겠다. 첫 번째는 야후에 취직하는 것, 내 추천서면 당장 입사할 수 있을 거다. 두 번째는 국내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 이 또한 내 추천서면 문제없을 거다. 세 번째는 나와 함께 내려가 창업하는 것이다. 하지만 월급은 500위안(10만 원)이고, 내 집으로 출근하고, 출퇴근할 택시비를 지급할 수 없기 때문에, 숙소도 내 집과 가까운 곳으로 알아서 잡아야 한다. 3일 동안 고민할 시간을 주겠다."
그의 팀원들은 방에서 나간 지 3분 만에 돌아와 마윈에게 함께 가자고 얘기했습니다.
그렇게 마윈은 1999년, 동료 18명과 함께 고향에 내려가 창업에 다시 도전하게 됐습니다. 가자마자 사명을 정하기 위해 전체 회의를 했는데, 팀원 중 한 명이 "알리바바"를 제안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마윈이 처음에 특성이 없어 보인다고 하며 알리바바를 반대했습니다. 확신이 안 선 마윈은 이 사람, 저 사람 붙잡고 물어봤는데,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덕분에 알리바바는 이미 대중들에게 친숙한 이름이었습니다. 마윈은 이 친숙함이 마음에 들어, 사명을 알리바바로 확정 지었으며, B2B 이커머스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이제 막 사명을 정한 알리바바는, 자본금을 서버비로 다 써버려 팀원들에게 지급할 월급조차 없었습니다. 마윈은 투자를 받기 위해 여러 자리에서 투자요청을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며 투자받기 쉽지 않음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IR발표 자리에서, 월가에서 근무한 Joseph는 마윈의 카리스마에 반해 적극적인 합류 의사를 보냈습니다. Joseph는 당시 아내의 만류에도 마윈과 함께 하고자 했던 의지를 밝혔고, 그는 결국 알리바바의 초대 CFO를 맡았습니다. CFO를 맡은 Joseph는 월가에서 근무한 경력을 살려, 골드만삭스로부터 지분 50%에 500만 달러의 조건으로 투자를 받아냈습니다.
그로부터 3개월 뒤에 마윈은 손정의를 만났습니다. 마윈은 비즈니스 모델도 준비되지 않았지만, 손정의는 만난 지 5분 만에 그의 눈빛을 보고 투자를 결정합니다. 2000년 1월, 지분 26%에 2000만 달러라는 조건으로 손정의로부터 투자를 받았으며, 알리바바는 회원수 50만 명을 돌파하며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마윈은 이 기세를 모아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글로벌 지사를 미국으로, 중국 지사를 항저우에서 상하이로 옮겼습니다.
상하이는 당시 중국으로 해외자본이 가장 직접적으로 유입되는 창구 역할을 했습니다. 마윈은 그 점을 노리고, 더 많은 해외 투자를 받기 위해 상하이로 옮겼지만, 바로 그때 닷컴버블이 터졌습니다.
알리바바도 닷컴버블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마윈은 3개의 B2C(back to china, back to coast, back to center) 전략을 발표하며 항저우를 알리바바 본부로 결정해 다시 한번 일어서기로 합니다.
2000년에 알리바바의 유저수는 50만을 달성했지만 수익이 없었습니다. 내부에서 2001년까지 수익화를 KPI(핵심성과지표)로 잡고, 판매자로부터 수수료를 받았습니다. 이는 당시 온라인은 무료라는 공식을 깼으며, 2005년까지 알리바바 매출의 2/3을 차지할 정도로 공이 컸습니다. 결국 2002년 알리바바는 흑자전환 했으며, VIP회원 구독서비스로 수익을 다각화했습니다.
하지만 2003년, 닷컴버블의 후폭풍과 사스의 발병으로 골드만삭스는 알리바바의 지분 매각을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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