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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 <누수>, 언어 없는 춤이 빚어낸 무한한 상상력

공연 리뷰

by 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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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판야무’의 무용 <누수>(안무 금배섭)가 2025년 9월 4일부터 7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되었다. 나는 6일 4시 공연을 관람하였다. 현대무용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편견을 깨뜨려준 흥미로운 공연이었다. 네 명의 무용수(조정흠, 이재윤, 윤혜진, 금배섭)는 누수공으로 제시되었다.


무용과 연극의 가장 큰 차이는 언어의 유무다. 연극은 언어에 의존하지만, 무용은 언어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 연극에서 언어로 이루어진 희곡은 연극의 3요소 중 하나다. 희곡은 연극을 존재하게 하는 기본적인 요소일 뿐 아니라, 연극이 역사에 남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연극사에서 이름을 남긴 이들이 대부분 희곡을 쓴 사람이라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언어는 글과 말로 나뉜다. 연극에서 글은 작가의 영역이며, 말은 배우의 영역이다. 관객은 배우의 말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받는다. 이러한 언어의 작동 기제가 무용에는 없다.


언어와 무관한 무용은 연극에 비해 더 원형적이다. 언어가 문명을 대표하는 요소라는 점에서 그렇다. 언어 이전의 예술이자 원형적인 무용은 연극보다 더 근원적인 셈이다. 공연예술에서 언어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관객의 이해도는 달라진다. 언어가 있으면 당연히 이해하기 쉽다. 하지만 그 이해가 한편으론 상상력을 가둔다. 언어의 강력한 틀에 갇힌다면 그 경계 너머의 세상으로 뻗어나가기 쉽지 않다. 언어가 없는 무용은 메시지의 명확성은 떨어지지만, 상상력에는 한계가 없다. 몸을 중심으로 표현하는 무용은 이 점에서 큰 장점이 있다. 무용 <누수>는 이 신체언어를 십분 활용함으로써 언어의 한계를 넘어선 상상력의 세계를 마음껏 열어젖히고 있다.


<누수>의 미학 : 사물의 변주


소극장에 들어서면 어두운 무대에 비가 내리듯 뭔가가 수직으로 질서 정연하게 내려와 있다. 가만히 살펴보니 박스 포장용 투명 롤 테이프다. 이렇게 삼십여 개의 촘촘한 롤 테이프 사이로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하다. 조명이 들어오자 빛을 받은 롤 테이프들이 환상적으로 반짝인다. 그리고 공연 내내 이 롤 테이프는 다양한 모습으로 탈바꿈한다. <누수>를 무대 연출의 관점에서 ‘롤 테이프의 변형’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롤 테이프의 끈끈한 성질을 이용해 물방울을 형상화한 플라스틱 숟가락도 붙이고, 작은 전등도 붙이고, 땀을 닦은 휴지도 붙인다. 롤 테이프의 변신은,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형형색색의 누수가 재현되는 듯한 시각적인 즐거움을 제공한다.


이처럼 <누수>에는 일상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사물들이 소품으로 활용된다. 제목이 ‘누수’인 만큼 물과 사물, 그리고 무용수들의 관계가 부각된다. 물은 사물과의 관계에서 자유롭게 변신한다. 아무 생각이 없는 듯 장애물을 만나면 고이다가 넘치면 다시 흐른다. 물의 성질은 자연 그 자체다. 물은 둥근 병에 담기면 둥근 형체가 되고, 네모난 병에 담기면 네모난 형체가 된다. 사물과의 관계에서 저항하지 않고 순응하며 조화를 이룬다. 이번 공연에서 물의 새어 나옴은 사물과 무용수의 몸, 그리고 움직임 사이의 관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안내문에 “나에게서 새어 나오는 것은 무엇이고 이것은 어디로 흘러 무엇과 만나지는가”라고 적혀 있다. 무용수들의 몸에서 다양하게 형상화된 물은 다른 무엇(사물들)과 우연히 만나 이미지를 남기고 사라진다. 그런데 “만나지는가”에서 읽을 수 있는 수동적 만남은 의지가 배제된 채 흐름 속에서 우연히 이루어진 만남이다. 이것은 곧 물의 자연성을 뜻한다.


인간은 삶의 편의를 위해 끊임없이 사물을 만들어낸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사물은 인간에게 종속된 것 같지만, 엄밀히 보면 인간이 사물에 종속되어 있다. 그릇이 없으면 물을 마시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물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일단 존재하면 몸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글을 쓰거나 밥을 먹을 때, 연필과 숟가락은 몸의 움직임과 함께한다. 이처럼 우리의 일상 속 모든 움직임은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사물 없는 움직임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물과의 완전한 단절은 죽음뿐일 것이다. 이번 무대는 인간의 몸과 움직임이 얼마나 사물과 밀접한지, 심지어 사물화된 움직임이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누수>의 무대에서는 몸의 움직임에 따라 사물이 기능하는지, 사물에 따라 몸이 움직이는지 모호하다. 심지어 물을 은유하는 롤 테이프와 컵, 부채, 두루마리, 종이 조각, 비닐 등의 사물이 무용수들의 몸을 이끄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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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수가 빚어낸 환상적인 이미지


막이 열리면 빈 종이컵을 든 무용수가 등장해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천장과 컵을 쳐다본다. 종이컵에서 똑똑 소리가 나는 걸 보면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는 것이 분명하다. 아래로 흐르는 물의 수직성이 공연 내내 펼쳐진다. 네 명의 무용수는 각자의 움직임으로 물의 흐름과 균열 속에서 생겨난 다양한 누수의 이미지를 혼자 또는 협력하며 표현한다. 무용수의 몸에 더해 다양한 소리가 첨가되고, 일상의 사물들이 합세한다.


컵으로 표현된 누수는 이번에는 두 무용수가 두루마리를 양 끝에서 잡고 다양한 동작으로 접었다 펼치기를 반복한다. 객석에서 보면 흰 두루마리는 물줄기처럼 느껴진다. 그들이 표현하는 물줄기는 펼쳐지고 감기기를 반복하며 물의 흐름을 상징적으로 재현한다. 그 안에는 물을 뿜어내는 코끼리도 있고 탱고 춤도 있다.


이번에는 무대 뒤쪽으로 비닐을 길게 깐다. 넓은 비닐 한쪽은 바닥에 붙어 있다. 무용수들이 부채를 이용해 바람을 일으키자, 바닥에 고정되지 않은 비닐이 허공을 향해 춤추듯 날아오른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성질을 지닌 물이 이번에는 거대한 방울산이 되어 아래에서 위로 부풀어 오른다. 무용수의 부채춤과 어우러져 위로 펄럭이는 비닐 뒤로 일종의 그림자극이 펼쳐진다. 고정된 스크린이 아니라 마구 움직이며 시시각각 형태를 바꾸는 스크린에 비친 그림자는 자체로 하나의 무용이다.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이 이미지를 ‘물방울 춤’이라 부르고 싶다. 누수가 만들어낸 ‘반항의 춤’ 혹은 ‘해방의 춤’일 수도 있겠다.


물방울 춤이 잠잠해지자, 무용수들은 한 명씩 깡통에 종이 조각을 잔뜩 담아 무대 한가운데에 쏟아 낸다. 마치 제의를 거행하는 사제들의 모습이다. 네 무용수가 부채를 들고 가운데에 앉아 서서히 바람을 일으킨다. 그러자 종이 조각들, 혹은 영롱한 종이꽃들의 잔치가 화려하게 펼쳐진다. 무용수들의 움직임과 부채가 일으킨 바람의 힘으로 모든 종이 조각이 위로 상승한다. 무대는 종이꽃들만 보이고 무용수들은 사라진 듯 시야에서 멀어진다. 이것은 물의 흐름을 역행하는 분수의 이미지인가? 빛과 어우러져 허공을 수놓은 종이꽃의 황홀경은 그야말로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무대 전체를 뒤덮은 종이꽃들이 이따금 롤 테이프에 달라붙는다. 관객을 맞이하기 전 미리 설치해 놓았던 이 테이프는 마지막까지 제 역할을 다한다. 이처럼 사물을 끝까지 존중하는 모습은 무용과 같은 공연예술이 취해야 할 태도다.


물방울의 향연이 끝나면 무용수들은 바닥에 붙어 있던 롤 테이프를 떼어 무대 한가운데에 모은다. 그들의 움직임은 물의 흐름처럼 자연스럽다. 그 움직임에 따라 위에서 아래로 흐르던 물이 사선으로 형태를 바꾼다. 아래 한 지점에서 사방으로 퍼지는 화산이 폭발해 분출된 모습이라고 해도 좋다. 무용수의 움직임에 따라 롤 테이프에 달려있던 숟가락, 손전등, 휴지 등으로 이루어진 물방울들이 각자의 모양으로 춤을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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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 그 이상의 의미


안내문에 무용 <누수>는 “서사의 원활한 흐름을 타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독립된 장면으로 나열”되어 있다고 소개한다. 앞서 언급한 엄청난 이미지들을 따로 떼어놓아도 손색이 없지만 물의 흐름처럼 자연스럽게 따라가다 보면 ‘물’ 그리고 ‘누수’라는 키워드에 이르게 된다는 점에서 하나의 서사로 읽어도 무리가 없다.


물은 끊어짐 없이 아래로 흐르는 본연의 성질이 있다. 그 성질을 가둔 공간에서 누수가 일어나는 것은 인위적인 것에 대한 자연의 승리를 뜻한다. 이 점에서 누수는 해방이다. 비록 “누수가 상실”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무대에서 펼쳐진 누수의 향연은 누수야말로 통제된 벽을 넘어 온전히 반항과 자유를 구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누수의 상실”은 “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는 것”이 될 것이다.


무용 <누수>는 단순한 물리적 현상의 재현을 넘어, 인간의 통제 욕망, 자연의 본성, 숨겨진 진실, 그리고 세상 만물의 유동성이라는 깊은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흥미로운 공연이었다. 저항, 해방, 틈과 사이, 그리고 상실 등의 주제를 지닌 <누수>가 보여준 도전적이고 환상적인 이미지들은 오랫동안 관객의 뇌리에 남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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