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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마른 여자들>, 섭식 장애의 여자들

공연 리뷰

by 인산


연극 <마른 여자들 Thin Girls>(박주영 연출, 2025년 9월 10일 ~ 9월 28일)이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 공연되었다. 9월 14일 3시 공연을 관람하였다. 아담한 소극장답게 좌석을 배치하여 관객의 숫자를 제한하였다. 이날 공연은 만석이었다.


소설 <마른 여자들>


<마른 여자들>은 뉴질랜드 출신 작가 다이애나 클라크(Diana Clarke)의 데뷔 소설로, 원제는 <Thin Girls>이다. 2021년 창비 출판사에서 변용란 번역으로 한국어판이 출간되었다. 소설은 섭식 장애가 있는 여성들의 내면세계를 일인칭 화자의 목소리로 들려준다.


소설은 주인공 로즈(24세)가 쌍둥이 언니 릴리와 함께 보낸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며 자매의 복잡한 관계, 신체 이미지에 대한 사회적 압박, 그리고 가족의 갈등을 깊이 있게 다룬다.


또한, 소설은 몸과 불화를 겪는 여성들이 그 내면에서 벌어지는 심리적 갈등과 사회적 압박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아울러 “마름이 곧 아름다움이고 마른 몸이 곧 행복”이라는 사회적 통념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고 있다.


연극 <마른 여자들>


연극은 거식증 환자 로즈가 치료 시설에서 다른 환자들을 만나면서 시작된다. 이들은 로즈와 같은 상처와 경험을 공유하며,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자신의 몸이라 믿고 극단적으로 마르기를 택한다. 로즈는 몸무게가 더 늘지도 줄지도 않는 제로 상태에 머물고 싶어 한다. 그런데 과연 체중의 변화 제로가 가능한가? 제로는 삶이 멈춘 시간이며 따라서 존재마저 희미해지는 시간이다. 로즈는 매일 조금씩 자신이 사라지는 과정을 혹은 존재가 점점 미미해지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자 한다. 치료 시설에는 거울이 없다. 거식증 환자의 눈에 자신을 비춘 거울의 모습은 항상 뚱뚱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들은 서로의 시선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며 함께 마르고 죽어가는 과정을 겪는다.


그런데 로즈는 시설의 다른 여자들, 밤마다 밀려오는 기억, 그리고 폭식증을 앓는 쌍둥이 언니 릴리를 통해 외면하고 싶었던 삶의 욕망이 되살아난다. 과연 로즈 그리고 마른 여자들은 사회가 강요하는 몸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신을 사랑하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까?


연극은 “마르고 싶다”는 욕망 그리고 그로부터 벗어나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 간절함을 전한다. 그러니까 몸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 몸에 대한 언급은 자연스럽게 여성주의와 연결되지만, 한편으론 로즈가 자신을 되찾아가는 여정을 그림으로써 몸과 화해하고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한편, <마른 여자들>은 여성의 몸에 대한 사회적 시선과 자기혐오 그리고 한 인물의 병리적 서사를 넘어, 이를 극복하기 위한 여성들의 연대를 그려낸다. 사회가 지운 자리에서 같은 상처를 공유하는 이들이 어떻게 연대감을 형성하고 자신을 찾아가는지를 보여준다.


섭식 장애의 여자들


이들이 왜 몸에 대해 강박관념을 갖게 된 걸까? 단순히 개인의 문제일까? 극 중 인물들이 세상에서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몸이라고 생각하며 마르기를 택하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개인이 느끼는 무력감을 반영한다. 특히 여자들이 사회적으로 강요되는 역할이나 외모 기준에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통제하기 어렵다고 느낄 때, 최소한 자기 몸이라도 완벽하게 제어하려는 심리로 섭식 장애를 겪는다.


또한, 현대 사회는 마른 몸을 미의 기준으로 삼고, 이를 행복, 성공, 자기 관리 등 긍정적인 가치들과 연결 짓는다. 각종 다이어트 약물이 호황을 누리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마른 몸에 대한 욕망은 대중매체, 패션 산업, 심지어 일상 대화에서도 끊임없이 주입된다. 외적인 아름다움과 매력은 특히 여자에게 사회적 평가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완벽한 몸매와 외모를 요구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여자들은 자기 몸을 평가받는 대상으로 인식하게 되고, 이에 의한 과도한 스트레스는 심한 자기 비하와 섭식 장애로 이어지기도 한다. 연극은 이러한 사회적 메시지가 개인에게 어떤 고통과 왜곡된 신체 인식을 가져다주는지 보여준다.


하지만 <마른 여자들>은 섭식 장애 인물들의 어두운 모습만을 비추지 않는다. 여자들은 각자의 사정으로 섭식 장애를 겪지만, 결국 같은 상처를 가진 이들이 한 곳에 모여 서로를 통해 자신을 마주한다. 이는 섭식 장애가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이 연대하고 소통함으로써 치유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개인 혼자는 벗어나기 어려운 문제라도, 함께 공감하고 지지하는 커뮤니티 안에서는 회복의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에 이르러 로즈가 음식을 한입 가득 먹는 모습은 장애가 극복된 상징적인 장면이다. 그리고 신나는 에어로빅 장면이 펼쳐진 후 그레이스는 조카 제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역시 젊을 때 내 몸을 미워했지만 내 몸은 내 편이었다. 잘 먹고 꾸준히 운동하고 나를 사랑해 줘야 한다.” 타인의 평가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몸은 주체성이 상실된 몸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스스로 자기 몸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곧 자기의 회복과 치유를 의미한다.


<마른 여자들>의 각색과 연출을 맡은 박주영은 이렇게 말한다. “섭식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종종 자기 파괴적이라는 말로 규정된다. 그러나 내가 본 것은 자기 파괴가 아니라 자기 증명이다. 나는 여기 있다고 말하는 방법이다.” 먹는 것을 거부하거나 과하게 먹고 토해내는 것은 삶의 거부이자 자기 몸의 파괴다. 이는 자연에 반하는 것이다. 따라서 보통 섭식 장애를 자기 파괴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런데 연출은 섭식 장애에서 자기 파괴를 넘어 자기를 증명하려는 욕망을 읽어낸다. 엄마에게 불만이 있는 아이가 할 수 있는 반항의 행동은 “밥 안 먹어!”였듯이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는 자기 증명처럼 말이다.


등장인물


주인공 로즈는 쌍둥이 자매 중 한 명으로 거식증으로 고통받고 있다. 격리된 거식증 치료 시설에서 로즈는 다른 인물과의 관계에서 과거의 기억 등을 떠올리고 문제를 극복하려 한다. 가령 언니 릴리는 쌍둥이임에도 삶의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연극에서 마른 편인 로즈 역과는 달리, 릴리 역은 뚱뚱하다. 외모의 대조를 통해 릴리와 로즈를 대비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로즈에게 또 다른 자신이라고 할 수 있는 릴리는 어떤 의미인지, 언니에 의해 로즈의 내면에 어떤 상처를 남겼는지 등이 밤마다 밀려오는 괴로운 꿈이나 환영 혹은 언어로 드러난다. 로즈가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그림자 같은 존재인 릴리는 건강해 보이고, 남자 친구를 사귀는 등 사회적 관계도 원만하다. 이것은 로즈에게 “나는 왜 저렇게 살지 못할까?”라는 비교와 열등감을 불러일으킨다. 릴리는 로즈의 삶과 존재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자, 로즈가 회피하려 했던 현실의 한 부분이다.


로런과 제나는 치료 시설 밖 인물이다. 역시 섭식 장애를 겪고 있는 두 인물은 시설 밖에서 마른 몸에 집착하는 사회적 환경 또는 또래 집단을 상징하는 역할로서, 주인공이나 시설 내 인물들의 갈등과 내면을 비추는 거울처럼 기능한다. 그녀들 역시 마른 몸에 집착한다. 병적인 수준의 몸무게를 통제함으로써 자기 파괴적인 태도를 보이는 로런은 비록 시설 밖에 있지만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며 마른 몸에 대해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여학생들의 여왕으로 군림하며 마른 몸에 집착하는 제나는 몸에 대한 압박과 스트레스로 로런과 격한 감정적 충돌까지 발생한다. 이 두 인물과의 대비를 통해 로즈는 치유와 병적인 집착의 경계에서 자기 정체성을 재정립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로즈는 다양한 관계 속에서 자신을 찾으려고 시도한다. 첫째, 언니와의 관계다. 그러나 언니는 남자 친구가 생기는 등, 로즈가 원하는 긴밀한 관계는 한계가 있다. 둘째, 친구들과의 관계다. 그녀는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번에는 치료 시설에서 창문을 통해 다른 시설의 남자와 교감하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만남이 이루어졌을 때 그녀는 곧바로 자기 몸을 탐하는 남자에게서 멀어진다. 그러고는 알아차린다. 그녀는 타인의 시선에 의해 매몰되고 상처받았던 몸의 치유는 타인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자기가 자기 몸을 사랑할 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 알아차림은 시설 여자들과의 연대감이 큰 몫을 한다. 이렇듯 <마른 여자들>은 섭식 장애가 사회적 잣대의 희생양이라는 점, 그리고 그 사회적 시선에서 벗어날 때 진정한 자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무대 장치


무대는 대체로 비어있다. 몇 개의 작은 의자와 바퀴 달린 테이블이 전부다. 크기가 다른 네 개의 동심원들이 그려진 무대 바닥은 중심과 바깥을 보여주며 한 개인의 내면이 어떻게 세상과 부딪히고 확장되는지 시각화한다. 무대 디자이너는 말한다. “무대의 구조적 틀은 원에서 시작되었다. 원가 더 큰 원, 그보다 더 큰 원, 그보다 더 큰 원. 인물들과 오브제, 모든 움직임의 방향성은 원의 방향성과 같이 정해져 있다.” 배우들은 상황 속에서 원형을 따라 움직였지만, 관객이 그 디테일을 모두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원 안은 시설, 원 밖은 과거의 기억이라는 해석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원형으로 표현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조연출의 연출 노트에서 원형에 대한 재미있는 해석이 눈에 띈다. 그에 따르면 무대의 원형은 “작품이 품고 있는 상징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원의 의미는 통제의 원, 물방울이 만들어내는 파장의 원 그리고 흰개미의 굴이다. 통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몸에 대한 통제일 것이다. “중심에 가까울수록 주체적으로 다룰 수 있는 영역이 있고 바깥으로 갈수록 나의 힘이 미치지 않는 영역이 있다.” 그렇다면 무대의 인물은 통제의 강약에 따라 원의 부분에 위치했을 것이다. 스스로 통제가 가능하다고 여기는 자기 몸이 관련된 것은 원의 중심에서 이루어지고 통제 불능은 원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표현했을 것이다. “흰개미의 굴은 고립과 연결, 중심과 외곽의 이미지를 동시에 품고 있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흰개미의 원은 정확히 주인공의 욕망을 대변하는 개념이다. 로즈의 심리적 상황, 즉 마르기 위해 먹고 싶지 않지만 살아남기 위해 먹어야만 하고, 혼자 있고 싶지만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는 처지와 부합한다.


조명은 원형의 중심과 주변을 구획함으로써 중심을 만들어내거나, 중심의 이동 또는 확장을 일궈낸다. 무대 뒤쪽에 설치된 스크린은 줄거리의 전개에 따라 인물 간의 관계와 심리를 표현하는 영상들이 투영된다. 영상 장치 그리고 음향은 인물의 내적 감정과 기억이 겹쳐 나타나는 효과를 강조한다. 원형과 어우러진 배우들은 움직임은 고립되고 연결되는 마른 여자들의 관계를 밀도 있는 감각으로 전달한다.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있다. 연출은 배우들에게 극 중 거식증 환자를 연기하지만 실제로 살 빼는 것을 금지했다고 한다. “절대로 마르지 마시오”의 원칙은 몸 자체를 예술적 대상으로 소비하거나 강요하는 방식을 비판하고, 말과 연기로 표현하는 쪽을 택했다는 뜻이다. “마른”, “뼈만 남은”, “마르면 행복해질 거야” 등의 언어 반복에도 불구하고 무대에서 배우가 있는 그대로의 몸으로 드러냈다는 것은 몸의 강요에서 벗어나 배우의 존엄을 중시한 것이다. 아울러 연극 형식에 대한 편견을 깨는 메타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특정 역할을 연기하기 위해 배우는 그 역할에 맞는 외형(마른 역할을 맡은 배우는 말라야 한다)을 갖추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기대를 깨버린 것이다. 이는 연극계에서조차 존재하는 외모 강박과 배우의 몸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역설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예술이 사회적 통념에 적극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변화를 모색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마른 여자들>은 섭식 장애를 단순한 신체적 문제가 아닌, 깊은 심리적 고통과 사회적 압박이 결합한 복합적인 현상으로 보고, 그 내면을 다각도로 탐구하며 관객에게 울림을 전한다. 인물들은 서로의 아픔에 공감하고 연대하며 점차 자기 몸을 미워하던 마음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렇게 미워한 내 몸이 내 편이었어”라는 깨달음이 생기고, 자기 몸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져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받아들이는 심리적인 과정을 보여준다.

이처럼 연극 <마른 여자들>은 섭식 장애를 개인의 비극을 넘어 사회 시스템과 문화적 압박이 빚어낸 병폐로 인식하게 함으로써, 관객이 외모 지상주의를 성찰하고 모든 몸이 존중받는 사회를 꿈꾸게 하는 논의의 장을 펼쳐 보인다. 나아가 연극은 외모가 아닌 내면의 가치를 찾고,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온전한 자신으로 살아갈 용기와 지지를 강력히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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