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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엔드 월(End Wall)> 리뷰

공연 리뷰

by 인산

연극 <엔드 월(End Wall) - 저 벽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하수민 작·연출)는 현재 우리 사회의 노동시장에서 근본적으로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는 하청 문제와 젊은 일용직 노동자의 사망 사고를 다루고 있다. 이 연극은 2025일 09월 10일부터 09월 28일까지 서울문화재단 대학로극장 쿼드에서 공연되었다. 이 리뷰는 9월 21일 공연을 관람한 후 쓴 것이다. 이 작품은 2024년 서울희곡상을 수상하여 그 작품성을 인정받은 바 있다.


소재만 놓고 보면 이 연극은 자체로 사회참여의 성격이 짙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노동 현장에서 사고가 빈번하여 OECD 국가 중 높은 수준의 사망률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엔드 월>은 사회 참여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저 벽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라는 주인공의 되뇜과 함께 다양한 것들을 입체적으로 생산해내고 있다. 이 질문은, 벽이 넘어진 사망 사고의 의미와는 별개로, 벽에 갇혀 있던 우물 안의 개구리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약의 의미로도 가능하다. 연극은 직접적으로 사회 시스템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은유적으로 더욱 깊이 있게 이와 대면하도록 하는 방식을 취한다. 주인공은 무너져 내려 자신을 죽게 만든 벽을 원망하기보다는 그 너머의 세계를 향하면서 공장 지대의 컨테이너들에 의해 가로막힌 바닷바람과 바다의 풍경을 꿈꾸는 것이다.


아성, 좌절된 꿈의 주인공


<엔드 월>은 2021년 평택항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노동 사고를 모티브로 한다. 평택항 부두 300kg의 개방형 컨테이너 벽이 넘어지면서 23세 일용직 청년이 사망한 사고가 있었다.


막이 열리면 침울한 표정의 아성이 양쪽으로 벽이 세워진 개방형 컨테이너에 한쪽에 걸터앉아 있다. 그는 해설자가 되어 자신에 대해, 그리고 사건을 이야기한다. 왼쪽 끝 벽이 넘어져 자신을 덮친 그 컨테이너에 앉아 있는 그는 살아있는 자가 아닌 영혼이다. 아성의 영혼은 현장을 떠나지 못하고 배회한다. 실제로 공연 초반부에 한쪽 벽이 쿵 소리를 내며 넘어진다. 관객은 공연이 끝날 때까지 반대쪽 벽은 언제 넘어질까 걱정 반 기대 반의 상태에 놓인다. 아성은 자기 죽음을 되돌아보며 과거에 있었던 꿈들, 사건들 그리고 한계와 마주쳤던 벽을 회상한다.


그가 해설자처럼 자기 이야기를 시작하면 마치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과거와 현재가 오간다. 어떤 순간의 장면들이 반복되기도 한다. 아성의 이야기는 벽이 무너지기 일 분, 십 분, 십 육 분, 그리고 하루 전의 과거의 시간을 되풀이하여 소환하는 연극적 장치를 통해 제현된다. 노동자들이 등장하고 아성과 이주 노동자 고래가 작업하고, 그리고 벽이 넘어지는 순간이 반복되어 왜 그때 아성이 그곳에 있어야 했는지를 되묻는다.


그곳에서 아성은 자기 죽음의 이유를 찾아다니는 또 다른 노동자 무명의 영혼을 만난다. 무명 역시 폐기물 처리 작업이라는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희생된 영혼이다. 무명의 과거와 현재가 아성의 이야기와 병치되어 전개된다. 두 영혼은 죽음의 이유를 찾아 기억(과거)을 더듬는다. 이들은 “숨이 멎을 때, 네 마음속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한다. 보기에 따라 연극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아성의 기억에 나타난 작업 현장에는 체계도 없고, 기본적인 안전 장비도 없다. 연극은 안전 규정 미준수뿐 아니라 하청과 재하청의 구조적 문제, 일용직 노동자와 사할린 이주 노동자에 대한 차별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작업반장이 닦달한 나무 조각만 줍지 않았더라면... 안전한 장치를 마련하고 고정핀을 제거했더라면... 그렇게 그곳은 시간이 멈춘 곳이 된다. 또 다른 기억으로 과거 수능을 끝낸 아성은 친구들과 있었던 일들이 재현된다. “오키나와로 함께 여행”을 가기로 한 친구들이 요란한 노래와 춤을 추며 등장한다. 그러나 이 여행의 꿈은 그의 죽음으로 실현되지 못한다. 아성은 실현되지 못한 꿈을 좇는다. 또 다른 기억은 벽 너머에 대한 상상이다. 아성은 계속 “저 벽 너머에 뭐가 있었는지 그게 궁금해.”라고 말한다. 이러한 기억들이 서로 교차되며 아성의 내면세계를 구성하고, 벽 너머의 세계를 꿈꾸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무명, 이름 없는 죽음


이름이 없다는 의미의 무명(無名)은 아성과 함께 기억을 회상하는 동반자다. 이름 없음, 익명성을 상징하는 그는 정체성 없는 영혼인 셈이다. 그렇다면 무명은 기록 속에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죽음을 대표하는 것은 아닐까? 현실 속 숫자로만 남은 수많은 젊은 죽음을 대변하는 존재일 수도 있겠다. 또한 무명은 누구라도 될 수 있는 인물로서, 관객이 자유롭게 대입할 수 있는, 특정 배경이 없으므로 누구든 투사할 수 있는 대상이기도 하다. 한국 청년일 수도, 이주 노동자일 수도, 혹은 관객 자신일 수도 있으므로 무명의 죽음은 보편적인 죽음의 은유로 기능한다.


무명이 가지고 있는 기억의 시작은 엄마의 말이다. 무명은 아성에게 엄마의 말 사이의 빈 공간이 궁금해서 기억 속에 반복적으로 놓이게 된다고 말한다. 무명은 구체적인 기억을 재현해 내는 아성과는 달리 구체적 삶이 삭제된 채 엄마의 말을 기억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는 세상에서 아무도 자신을 불러주지 않아도 엄마만큼은 자기 존재를 기억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가 “새가 없는 장소”나 “빈 공간”을 계속 떠돌며 장소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렇다면 무명은 아성의 침묵 뒤에 남은 것, 즉 죽음과 빈자리의 의미를 드러내는 존재일 수 있으며, 아울러 아성의 죽음과 기억의 세계를 함께 탐험하는 공간적 동반자이자, 상실과 빈자리의 상징, 그리고 사회적 기억을 드러내는 중개자일 수 있겠다.


고래, 역사의 그림자


고래는 사할린에서 온 이주 한인 노동자다. 그는 단순한 동료 노동자를 넘어, 역사적 강제 이주와 귀향의 좌절을 상징한다. 아성이 현재의 좌절된 청춘을, 무명이 익명의 죽음을 보여준다면, 고래는 과거의 기억과 뿌리를 무대 위에 불러낸다. 이 세 인물이 함께 놓일 때, 벽은 단순한 사고 현장의 장벽을 넘어, 세대와 민족, 그리고 역사를 가로막는 구조로 확장된다.


무대, 벽과 바다


평택항의 컨테이너 작업장을 구현한 무대는 최소한의 오브제로 항구나 공사장 같은 노동 현장의 분위기를 표현한다. 중앙에 철제 느낌의 컨테이너가 놓여 있고 저 뒤에 타워 크레인 하나가 보일락 말락 세워져 있다. 그 외의 공간은 비어 있어 배우들이 자유롭게 움직인다. 관객의 시선을 가로막는 컨테이너의 끝 벽의 구조물은 한계, 차단, 가로막힘의 은유로 작용한다. 컨테이너 벽 하나로 다양한 벽의 의미를 생산하는 장치는 현장 재현의 미니멀리즘을 보여준다.


조명은 아성과 무명이 영혼처럼 부유하는 장면에서 차갑고 희미한 회색빛이 주를 이룬다. 벽에 드리운 배우들의 그림자는 마치 벽에 갇히거나 벽에 흡수되는 존재처럼 보임으로써 관객에게 강한 시각적 인상을 남긴다. 또한 벽이 무너지는 ‘쿵’ 소리는 희생자의 마지막 순간이자 사회에 대한 경고음이다. 이는 관객 각자의 내면에 부딪히는 벽의 소리로 다층적 의미를 함의한다. 이렇듯 <엔드 월>의 무대는 사실적 재현보다는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면서 하나의 벽이라는 상징적 장치와 조명, 소리, 배우의 움직임을 결합해 물리적 현실과 사회적 현실을 동시에 제시한다.


극의 후반부에 무대의 뒷벽이 사라지고 그 뒤로 숨겨져 있던 푸른 바다가 드러난다. 아성과 무명의 기억과 회상을 통해 그들을 가로막았던 모든 벽이 또렷해지고, 그들의 기억이 명확해지는 순간 바다가 열리는 전환이 일어났던 것 같다. 벽의 열림은 비극의 절정 이후 해방과 가능성의 이미지로 넘어가는 극적인 순간이다. 좀 더 풀이하자면 이는 아성이 꿈꿨던 여행과 자유의 이미지, 무명이 갈망하던 존재 증명과 귀향의 은유, 고래가 품고 있던 뿌리와 역사의 회귀를 상징한다.



<엔드 월>에서 벽은 무엇일까? 일단 그것은 물리적인 벽이다. 회색 무대에 설치된 개방형 컨테이너는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게 막는 장벽이다. 또한 이 벽은 사회적 벽이다. 아성을 짓눌러 죽음에 이르게 한 벽은 불합리한 원청-하청 구조는 물론 청년이나 이주 노동자의 생명을 경시하는 사회 풍토를 뜻한다. 그러나 벽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죽은 아성의 질문에 따르면 벽은 “삶과 죽음 사이, 현실과 꿈 사이, 인간성과 비인간성 사이”의 경계로도 작용한다. 따라서 연극은 노동 현장의 문제에서 출발하지만, 그 기저에는 소위 ‘벽’이라는 소통의 단절, 왕래의 단절과 같은 존재론적 단절로 이어진다.


또한, <엔드 월>의 특징 중 하나는 단연 죽은 자들의 대화라는 점이다. 그러나 아성과 무명의 대화를 가만히 들어보면, 그것은 망자의 한을 토로하기보다는 오히려 남아 있는 자들이 풀어야 할 질문처럼 들린다. 즉 연극은 한풀이의 울부짖음이 아니라, 관객으로 하여금 거리를 두고 현실 문제를 냉정히 바라보고 판단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아성이 계속해서 던지는 질문 “벽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는 실은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벽 너머”는 단순히 사후 세계가 아니라, 현실 너머의 가능성, 바뀔 수 있는 사회, 꿈의 성취, 도래해야 하는 정의로운 세상을 함의한다.




제목 <end wall> 역시 다층적이다. 그것은 컨테이너의 끝 벽을 의미하는 동시에 종말과 한계, 더는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벽을 뜻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끝에 다다랐을 때 비로소 바다와 바람 소리를 만날 수 있다. 이렇듯 <엔드 월>은 한 청년의 안타까운 죽음을 기리는 추모를 넘어, 벽이라는 상징을 통해 사회적 불평등과 구조적 폭력을 드러내며, 관객에게 삶의 근본에 대해 질문하는 연극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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