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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언더독>(Underdog) 리뷰

공연 리뷰

by 인산

사라 고든(Sarah Gordon) 원작의 <언더독>(원제 : Underdog : The Other Other Brontë, 보나정 연출)이 더줌아트센터에서 25. 9. 25일부터 10월 5일까지 공연되었다. 나는 9월 28일 공연을 보았다. 대학로와는 달리 접근성이 용이하지 않은 것에 비해 꽤나 많은 관객이 들었다. 공연 시간은 인터미션 15분 포함 160분이었다. 이 연극은 2024년 3월, 영국 내셔널시어터에서 초연하였으며, 평단의 호평을 받은 신작이다. 고든은 현재 영국의 극작가로서 주목받고 있는 작가다.


<언더독>은 짧은 생을 살았지만 19세기 영국 문학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가 된 브론테 집안의 세 자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두 살 터울인 첫째 샬롯, 둘째 에밀리, 셋째 앤은 각기 독창적인 세계관과 강렬한 여성 주체성을 담은 작품을 남겼다. 이들은 당시 영국에서 여성 작가의 등단이 너무 어려운 시기였으므로 남성의 필명을 사용해 작품을 발표했다. 샬롯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진 <제인 에어>에서 작가는 고아 여성의 자립과 사랑, 강한 도덕성과 내면의 힘을 가진 여성 주인공을 창조했다. 연극에서 제인 에어의 모델은 동생 앤으로 설정된다. 에밀리의 대표작은 <폭풍의 언덕>이다. 광기와 집착, 운명적인 사랑을 그린 어둡고 격정적인 고딕 문학의 정수로 사랑받는 소설이다. 일반 독자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셋째 앤은 <워드워스의 세입자>, <에그니스 그레이> 등에서 당시로는 과감한 가정 폭력과 알코올 중독 문제 등을 사실적으로 다루었다. 연극의 배경인 호우스(Haworth)라는 황량한 들판이 펼쳐진 시골 마을에서 성장한 세 자매는 각자의 소설에서 이 고독한 풍경을 반영하고 있다.


인물


브론테 일가를 보면 연극에 소리로만 잠깐 존재하는 목사인 아버지 패트릭 브론테가 있다. 아일랜드 출신의 성공회 목사였던 그는 알코올 중독자인 아들에게 엄격한 모습을 보이지만 딸들의 재능을 인정하고 교육을 지원한 진보적인 아버지였다고 전한다. 연극에서 그 존재는 미미하다. 연극에서 부재하는 어머니 마리아 브랜웰 브론테는 여섯 자녀를 낳은 뒤 일찍 사망했다. 어머니의 부재는 자매들의 정서적 배경에 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연극에서 첫째인 샬롯이 동생들에게 어머니의 역할을 하는 것은 실제로도 그랬을 것이다. 연극에서와 달리 이들은 여섯 형제였으며, 샬럿 앞에 두 언니가 있었으나 병에 걸려 각각 9살, 10살에 사망했다. 샬럿과 에밀리 사이에 유일한 남자 형제인 패트릭 브랜웰 브론테는 연극에서처럼 실제로도 화가와 시인을 꿈꾸었으나 알코올과 아편 중독으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자매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들 세 자매 역시 오래 살지는 못했다. 오빠 브랜웰의 사망 후 에밀리는 우울함 속에서 같은 해에 서른의 나이에 죽고, 앤은 에밀리 사망 후 5개월 후 스물아홉의 나이에 죽는다. 형제 중 가장 오래 산 샬럿은 고작 서른아홉을 살았다. 한 기록에 따르면, 이들 자매는 한 사람이 죽으면 남은 사람이 그 방식을 따라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듯한 분위기였다고 한다.


작가가 되고 싶은 세 자매의 이야기


고든의 원작 <언더독>는 브론테 세 자매를 고전 문학 속 비극적이고 엄숙한 천재들로 소비해 온 기존 이미지에서 벗어나, 그들을 현대적이고 해학적이고 자조적인 시선으로 재구성한 연극으로 평가받는다. ‘또 다른(other) 브론테’가 있다는 설정은, 저 유명한 두 자매 외에 우리는 몰랐던 또 다른 목소리, 주변화된 존재가 있었다는 메타적 장치로 쓰인다. 저평가된 앤 브론테의 위치를 강조하기 위한 장치로 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번 연극의 제목은 원제목이 아닌 <언더독>(underdog)이다. 이는 특히 문학에서 패배하거나 무시당할 존재처럼 보이지만, 결국 반격하거나 성공하는 인물형을 의미한다고 했을 때, 여성으로서 세 자매의 소설가로서의 분투와 출세기뿐 아니라 세 자매 사이의 경쟁 관계에서 생겨난 앤의 언더독의 의미를 조명한 것으로 보인다.


연극에서 어머니의 부재와 카리스마 넘치는 샬롯의 어머니 역할, 조용하지만 강인한 성격의 셋째 앤과의 무거운 갈등, 이들 사이에서 둘째의 중재가 돋보인다. 작가는 천재 브론테 자매라는 낭만적 이야기를 약간은 풍자하는 방식으로 여성 창작자의 고독과 투쟁, 정체성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으며 <언더독>에서도 잘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여성주의


<언더독>은 당시 영국 사회의 성차를 조명하며 여성주의적 관점에 깊이를 더한다. 아울러 남자 형제의 무기력도 이 점을 부각시킨다. 다만 브랜웰 역시 집안을 책임져야 한다는 가부장적 사회의 지나친 압박과 스트레스에 의해 알코올과 마약에 의지한 불행한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극 초반부에 아버지와 아들이 큰 소리로 다투는 소리가 들린다. 19세기 영국 사회는 철저한 가부장제 사회였다. 브론테 가문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브랜웰은 자매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기대를 받았을 것이다. 그는 가문의 이름을 잇고, 외부 세계에서 성공하며, 여생의 경제적 기둥이 되어야 한다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브랜웰이 좌절하고 알코올 중독에 빠져들어 죽음을 맞이할 때, 그의 자매들은 사회적 제약을 뛰어넘어 위대한 문학적 업적을 쌓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자매들은 남성우월주의 사회가 여성에게 부여한 역할을 거부하고, 오히려 그 시스템의 틈새를 활용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브랜웰은 바로 그 남성우월주의 사회가 남성에게 부과한 성공의 잣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면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사실 그는 재능 있는 화가이자 시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매들처럼 자신의 재능을 세상에 성공적으로 드러내지 못했다. 그의 알코올 중독은 그의 잠재력을 꽃피우지 못하는 예술가의 깊은 절망감을 상징한다. 이는 자매들이 글쓰기를 통해 고통을 승화시킨 것과 대비된다. 따라서 당시 가부장적 제도를 비추는 이 작품은 단순히 여성주의를 강조했다기보다는, 남자 형제 역시 일종의 사회 체계의 희생자로 비춘다고 할 수 있다.


여성 작가로서 겪어야 할 난관


<언더독>은 19세기 영국 사회에서 여성이 작가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더구나 런던과 멀리 떨어진 시골 오지에 살던 여성이라면 더욱 그렇다. 세 자매는 당시 사회적 제약 속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가장 큰 난관은 지적인 활동이 여성에게는 어울리지 않거나 부적절하다는 사회적 통념이었다. 글을 쓰는 것은 남성의 영역으로 여겨졌고, 여성이 지적인 활동을 하는 것을 여성스럽지 않다는 시선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편견 때문에 세 자매는 자신의 재능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면서 사회적 비난을 받을까 봐 두려워한다. 여성 작가들은 출판사를 통해 자기 작품을 세상에 내보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출판사들은 여성 작가에게 남성 작가와는 다른 잣대를 들이대거나, 아예 출판을 거부하기도 했다. 브론테 자매들이 남성 필명을 사용했던 것도 이러한 사회적 장벽을 넘기 위한 전략이었다. 여성의 본명으로 활동할 경우 작품이 진지하게 평가받지 못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이렇듯 <언더독>은 브론테 자매 개개인의 삶을 통해, 당시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창조적인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여전히 존재하는 성차별과 불평등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이들의 이야기는 그저 과거의 일일까? 이렇듯 <언더독>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첫째와 셋째와의 대립


막이 열리면 샬롯이 등장하여 화자로서 자신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화자인 그녀는 한 여성이 어떻게 영국 문학계의 우상이 되었고, 그의 자매는 어떻게 세 번째 자매로 알려지게 되었는지 고백한다. 샬롯의 이야기와 기억으로부터 둘째와 셋째가 무대에서 살아나 알지 못했던 브론테 자매들을 만나게 된다. 무대에서 특별히 조명을 받은 인물은 앤이다. 앤은 자매 중 제일 먼저 출판사의 출간 제안으로 소설을 발표하는 등 두 언니 못지않은 재능을 뽐낸다. 글쓰기에 집념하며 동생들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샬롯과는 달리 유순하고 순종적인 앤은 그러나 자신만의 확고한 작품 세계를 구축한다. 이는 작가 고든이, 실제로는 저평가된 앤을 언니들 못지않은 위대한 소설을 썼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브론테 자매, 즉 ‘언더독’의 의미를 지닌다.


사실 샬럿은 유명하고 대중적으로 성공한 작가다. 그녀의 작품 <제인 에어>는 큰 반향을 일으켰고, 샬럿은 작가로서의 명성과 책임감, 그리고 가족의 문학적 유산을 지키려는 의지가 강했을 것으로 보인다. <언더독>에서 샬럿은 자신의 성공과 지위를 바탕으로 다른 자매들을 이끌려하거나, 혹은 자신만의 기준에 따라 자매들의 작품 세계를 평가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어떤 자매는 우상이 되고 다른 자매는 세 번째로 알려졌다”는 대사에서 보듯, 샬럿은 자신의 그림자 아래 놓인 앤의 위치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가졌다.


한편, 앤은 <아그네스 그레이>, <와일드펠 홀의 소작인> 등의 작품을 썼지만, 언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평가받고 ‘다른 다른 브론테’로 불리며 과소 평가된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언더독>은 오히려 앤이 부각된다. 실상 앤의 작품은 당시 사회 문제에 대해 더욱 직접적이고 도덕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었지만, 대중적으로 언니들의 작품만큼 반향을 얻지는 못했다. 앤은 자신만의 예술적 정체성과 메시지를 인정받기 위해 어머니처럼 따르던 언니 샬럿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너도 소설을 써?”라고 말하며 언니들이 놀라워했던 것처럼 그녀는 몰래 썼던 소설을 출판사에 보내 제일 먼저 출판 제의를 받는다. 여하튼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싶어 하는 작가로서의 갈망이 평가의 불균형 속에서 언니와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작가로서 첫째와 셋째의 대립은 개인적 다툼을 넘어, 문학적 인정의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아울러 이는 19세기 여성 작가들이 치열하게 싸워야 했던 인정의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언더독>에서 둘째 에밀리의 중재자 역할도 눈여겨 볼만하다. 에밀리는 <폭풍의 언덕>이라는 걸작을 남겼지만, 샬럿이나 앤에 비해 훨씬 더 은둔적이고 신비로운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작품은 대단히 독창적이고 강렬하며, 자매들의 작품과는 또 다른 깊은 문학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 연극에서 애밀리는 중재자 역할이다. 그녀는 언니와는 달리 세속적인 명성이나 비판에 덜 흔들리는, 순수한 예술적 탐구에 몰두하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언니와 동생의 감정적 대립이나 문학적 경쟁에서 한 발 떨어져서, 좀 더 객관적이고 초연한 시각으로 이들을 바라본다. 본디 에밀리의 소설은 인간 본연의 감정과 자연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고든은 이러한 에밀리의 성향을 바탕으로 그녀가 자매들의 작품에서 예술적 본질이나 깊이를 꿰뚫어 보고, 서로의 작품이 가진 가치를 인정하게끔 돕는 역할로 설정했을 것이다. 한 마디로 대립하는 두 자매에게 ‘글쓰기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상기시켜 주는 존재인 것이다. 무대에서 크게 부각되지는 않지만, 사실 에밀리는 두 자매에게 큰 정신적 지주이자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즉 서로에게 불만이 있을지라도, 자매로서의 깊은 유대감을 끊어낼 수 없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무대에서 세 자매가 주고받는 피드백과 글 쓰는 분위기는 이들이 훌륭한 소설가가 되도록 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다, 이렇듯 세 자매의 역학 관계는 단순한 가족 드라마가 아니라, 각기 다른 예술적 이상과 세상의 인정을 갈망했던 여성 작가의 복잡한 내면과 당시 시대적 제약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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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다고 표현할 수 있는 더줌아트센터의 소공연장에 들어서자, 무대는 다양한 소품들로 주위를 감싸고 가운데는 세 개의 테이블과 두 개의 의자가 놓여 있다. 각 테이블은 세 자매의 것으로 보이는 데, 두 의자들은 넘어져 있다. 세 개가 아닌 두 개의 의자도 의미심장하지만 단정한 의자가 아닌 넘어진 의자는 앞으로 전개될 폭풍의 혼란을 예고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방의 소품들은 허리 높이의 줄에 매달려 있어 인물의 움직임으로 일어나는 약간의 바람에도 흔들린다. 이들 소품은 극의 전개에 따라 그에 적절한 용도로 사용된다. 다만 세 방면에 붉은 기둥을 세워놓고 그 중간에 책장 형태의 고정된 작은 상자가 놓여 있다. 그 안에 몇 권의 책이 꽂혀 있어 아마도 세 자매의 공간을 축소해 상징적으로 제시한 듯하다. 그러니까 객석에서 보기에 세 면의 무대는 세 자매의 공간을 설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울러 움직이는 소품과 고정된 상자는 대비를 이루며 갈등과 화해의 변주로 출렁이는 인물들의 정서와 함께한다.


주인공들이 소설가로서 명성을 얻기까지 시골 마을의 한 집안과 런던의 출판사 혹은 사교계 등 다양한 장소를 표현해야 하는 까닭에 조명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양한 장소가 제시되는 무대는 테이블과 의자를 활용하고 거기에 스폿을 덧붙여 제시한다. 가령 먼 곳에서 두 인물이 편지를 주고받을 때의 장면은 두 개의 스폿을 번갈아 비추면서 이루어지는 방식이다.


여섯 명의 배우가 출연하여, 세 명의 배우는 세 자매의 역할을 맡고 나머지 세 배우가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면서 복잡한 줄거리의 극을 즐겁게 이끌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언더독>은 무엇보다도 공정하지 않은 역사적 평가와 명성에 대해 재고한다. 즉 핵심적인 메시지 중 하나는 “누가 기억되고, 어떻게 기억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자매들 가운데 누구는 잘 알려져 있고 또 누구는 세 번째 자매로만 알려진 불균형을 강조하면서, 작가는 역사가 소수, 특히 여성의 업적을 얼마나 불공정하게 평가하고 쉽게 지워버리는지를 비판적으로 보여준다. 더구나 앤처럼 상대적으로 가려진 인물에게 초점을 맞춤으로써,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고전의 서사를 재고하고 그 이면에 존재하는 무수한 ‘다른 다른’ 이야기들을 찾아내어 귀 기울일 것을 촉구한다.


그런데 <언더독>은 단순히 여성 작가의 고난만을 다루지는 않는다. 브랜웰의 비극적인 죽음을 통해, 작가는 19세기라는 특정 시대의 엄격한 젠더 역할이 남성에게도 어떤 치명적인 압박과 절망을 안겨줄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여성은 창작의 자유와 사회적 인정에서 배제되었고, 남성은 성공해야만 한다는 무거운 기대치 속에서 실패했을 때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이처럼 작가는 사회의 획일적인 잣대와 기대가 모든 개인에게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는지에 대한 보편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언더독>은 자매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재능을 실현하지 못해 고통받는 브랜웰의 모습은 예술적 열망과 그것을 세상에 구현하려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를 보여준다. 작가는 시대적 제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글을 쓰는 자매들을 통해 예술이 개인의 삶에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창작 활동이 어떻게 고난을 극복하는 통로가 될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째와 셋째의 대립, 그리고 둘째의 중재자 역할을 통해, 작가는 가족이라는 가장 밀접한 관계 속에서도 피할 수 없는 갈등과 경쟁 그리고 결국엔 서로를 지지하는 복합적인 감정들을 보여준다. 이렇듯 이 작품은 자매들이 어떻게 함께 성장하고 서로의 존재를 받아들이게 되는지에 대한 메시지를 전한다. <언더독>은 우리가 흔히 아는 브론테 자매의 이야기 너머에 있는 누락된 서사를 재조명하고, 19세기 사회의 젠더 역할과 그로 인한 개인의 고통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며, 그럼에도 꺾이지 않는 인간의 창조적 정신과 관계의 의미를 탐구하려는 메시지를 전한다. 결국 <언더독>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며, 여전히 존재하는 불균형 속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하는 우리의 과제를 환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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