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 예찬’, 과거는 잊어주세요

에세이

by 인산

우리는 망각, 소위 잊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중요한 순간이나 행복했던 기억을 잃을까 봐 애써 되새김질하고, 기억 속의 파편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씁니다. 물론 과거의 아름다운 시절을 가끔 추억하는 것은 삶의 활력이 됩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이상하리만치 행복했던 순간보다 괴롭거나 불행했던 일들을 더 집요하게 잘 기억합니다. 이는 단순히 심리적인 현상을 넘어 과학적으로도 어느 정도 증명된 사실입니다. 인간의 뇌는 진화 과정에서 생존 본능을 최우선으로 하도록 설계되었으며, 이는 행복보다 위험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만듭니다. 불행하거나 위협적인 사건을 겪을 때 감정과 공포를 담당하는 편도체가 더 강하게 활성화되며, 이는 해당 기억에 강력한 경고 표지를 달아둡니다. 따라서 부정적인 사건은 뇌 회로에 깊고 선명하게 각인되어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편향 때문에 우리는 노년의 대화 속에서 좋았던 기억보다는 고생했던 일, 서운했던 일을 더 자주 떠올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런 기억들이 비수처럼 꽂혀 평생을 따라다니는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하지만 좋지 않은 과거를 떠올려봤자 현재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바로 여기, 지금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래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압니다. 하지만 뇌의 작용인지 뭔지 자기도 모르게 나쁜 기억만 떠오르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노랫말처럼 “과거를 잊지 마세요”가 아니라, “과거는 제발 잊어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과거의 굴레에 갇히는 것만큼 스스로를 고단하게 만들고 삶을 비루하게 만드는 일은 없습니다. 끝끝내 원한이나 상처를 잊지 못한다는 것은, 평생 풀 수 없는 단단한 사슬에 묶여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고통에 사로잡힌 영혼은 결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반대로 쉽게 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오히려 현재에 충실하며 보다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흔히들 망각을 책임감이 없거나 경솔한 태도로 오해하지만, 망각은 사실 능동적인 자유의 선언이자 창의성의 필수 조건입니다. 과거의 모든 데이터를 그대로 짊어지고 사는 것은 새로운 사고를 가로막는 무거운 짐일 뿐입니다. 쉽게 망각하는 사람은 과거의 경험과 무관하게 매번 새로운 길을 걷는 자유를 누리며, 머릿속의 칠판을 깨끗이 지워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창의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과거의 원한을 털어낼 수 있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엄청난 능력이자 축복입니다. 이 능력이야말로 우리를 언제든지 새롭게 태어나도록 독려하는 건강한 본능입니다.


망각이 개인의 행복을 위한 행위를 넘어 사회적 치유에도 필수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역사의 페이지를 펼쳐보면, 과거의 상흔을 잊지 않고 끊임없이 되새기는 것이 때로는 공동체를 마비시키기도 합니다. 고통을 기억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그 고통에 매몰되어 현재의 관계와 미래의 비전을 파괴하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개인의 트라우마가 치유를 통해 극복되듯이, 공동체의 상처 역시 선택적 망각 또는 화해를 위한 내려놓음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을 기록하고 보존하려는 집착이 아니라, 긍정적인 미래를 위해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길지 현명하게 선택하는 지혜입니다. 절대 잊지 말자가 아니라, 진심 어린 마음으로 상호 화해와 용서를 실천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주위에서 망각하지 않도록 과거의 상처를 계속해서 부추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원조자의 탈을 쓴 방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과거의 사슬에 묶어두려 할 뿐입니다.


가만히 보면 아이들은 망각의 천재입니다. 순진무구한 존재일수록 기억의 짐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아이들은 울고 웃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이전의 좌절을 곧바로 털어냅니다. 친구와 싸웠다가도 금방 화해합니다. 이처럼 망각은 가장 순수한 상태를 만들어 줍니다. 죽음 직전의 노인이 온전한 망각 상태에 이르러 순수한 아이와 같은 평화로운 느낌을 주는 것은, 그가 기억의 짐을 완전히 벗어 던지고 모든 구분이나 분별이 사라진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 경계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알 수 있고 누구라도 알 수 없는 사람이 되며, 고통과 행복, 원망과 감사함의 모든 경계가 사라진 평온함만이 남습니다. 이러한 망각은 곧 존재의 재정립이자 자기 해방의 과정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뇌는 끊임없이 기억을 자동 재생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어, 망각 기능은 기억 기능보다 훨씬 더 어려운 기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꾸 기억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자꾸 망각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진정한 성숙이란 기억하지 못해 속상해하는 것이 아니라, 떨쳐버려야 할 과거를 망각하지 못하는 무능력에 속상해할 줄 아는 것입니다. 망각은 더 이상 수동적인 현상이 아닌, 현재를 살아가기 위한 능동적인 행위이자 용기입니다. 우리 스스로 과거의 사슬을 끊고, 진정으로 망각할 때 비로소 완전히 새로운 세계, 오직 지금에 집중하는 행복한 삶이 경이롭게 다가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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