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걸리버 여행기 : 줌인 아웃> 리뷰

공연 리뷰

by 인산

<걸리버 여행기 : 줌인 아웃>, 극단 하땅세와 떠나는 ‘걸리버 여행기’


하땅세 극장과 특별한 관람 경험


지난 10월 16일부터 26일까지, 삼선교에 자리한 극단 하땅세의 전용 극장에서 연극 <걸리버 여행기 : 줌인 아웃>(공동연출 윤시중 표지인, 공동작가 정승진 윤시중)이 재공연되었다. 2025년 춘천세계인형극제에서 찬사를 받았던 작품인 만큼, 커다란 기대를 하면서 10월 25일 토요일, 하땅세 극장을 찾았다. 극단 하땅세는 국내에서 전용 극장과 상주 단원을 기반으로 탄탄한 연극을 선보이는 몇 안 되는 단체 중 하나다.


2층 전용 극장에 들어서자 신발을 벗으라는 안내를 받았다. 신발을 벗고 공연을 관람한 것은 아마 처음인 듯하다. 평소 연습실로 사용하기에 양해를 구하며 커다란 신발장을 가리키는데, 키 큰 단원이 능숙하게 신발을 올려 주었다. 크지 않은 공간에 관객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맨 앞자리는 등받이만 있는 방석 의자였는데, 늦게 들어간 탓에 자연스레 맨 앞줄에 앉게 되었다. 자리에 앉으니 이미 무대에 나와 있는 단원들이 따뜻한 차를 건네주는 모습이 무척이나 색달랐다. 살짝 쌀쌀해지는 날씨에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시니 몸의 긴장감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그제야 눈앞의 무대를 살펴보니, 마치 일반 가정집 거실처럼 꾸며져 있다. 한 배우가 친절하게 공간을 설명해 주었는데, 상수에 설치된 싱크대에서는 실제로 밥도 해 먹는다고 한다. 하수에 난 창문에는 나무로 짠 책장이 교묘하게 끼워져 있고, 책들이 가득 채워져 있다. 조명을 포함해 이 모든 것이 단원들이 직접 구매하고 설치한 것이라고 하니, 말 그대로 자급자족하는 극단 공동체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무대 상수 바닥에 놓인 네모난 어항 속에서는 물고기들이 유유히 헤엄치고 있고, 무대 안쪽 정면에는 커다란 스크린이 펼쳐져 있어 이후의 연출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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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걸리버 여행기>의 풍자와 모험


이러한 무대를 배경으로 펼쳐질 이야기에 앞서, 조너선 스위프트가 쓴 <걸리버 여행기>(1726년)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다. 흥미진진한 모험 이야기로 알려진 이 작품은, 모험심 많은 외과의사 걸리버가 여러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며 겪는 일들을 담고 있다. 주인공은 소인국과 대인국은 물론 하늘을 나는 섬 라퓨타, 그리고 허이넘과 야후의 나라를 여행하며 신나는 모험을 벌인다. 그러나 <걸리버 여행기>는 단순한 모험담을 넘어, 걸리버가 다양한 문명과의 만남을 통해 인간 본성과 사회적 결함을 풍자하고 있다. 작가는 당시 영국의 사회, 종교, 정치 문제를 비판하며, 나아가 인간 존재 자체의 모순과 위선을 해부하고자 했다.


연극 제목에 담긴 연출 의도 : ‘줌인 아웃’


소설 <걸리버 여행기>의 제목을 그대로 차용한 연극의 제목이 <걸리버 여행기: 줌인 아웃>이기에, 소설에서 재미있게 표현되는 몸 사이즈의 변화가 무대 위에서 어떻게 구현될지 궁금하다. 상상의 벽을 허무는 데 귀재인 하땅세 극단이기에 더욱 그렇다. 특히 제목의 ‘줌인 아웃’이라는 표현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카메라의 줌인은 확대해서 들여다보는 것이고, 줌 아웃은 반대로 축소해서 전체를 넓게 보는 것인데, 이를 통해 카메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몸의 크기에 변화를 줄 것이라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이러한 무대적 장치와 연출을 통해 스위프트가 그렸던 상징적인 의미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려는 시도가 돋보일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주인공 바다의 낯선 여정


이윽고 배우들이 연습하듯 자연스럽게 무대 위를 오간다. 공연장 이곳저곳을 소개하던 배우 ‘오에바다’가 자신을 소개하고, 이어 다른 배우들도 각자 인사를 건넨다. 주인공 바다는 하땅세에서 오랫동안 연기 활동을 하면서 에너지도 소진되어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며 자연스럽게 연극 속으로 관객을 이끌어간다.


여성 주인공 바다는 자신의 익숙한 세상을 떠나 전혀 다른 낯선 세계로 용감하게 향한다. 이 여정은 호주에서의 워킹홀리데이 경험으로 연결된다. 그녀는 시드니에서 집을 구하고 일자리를 찾으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지만, 현실은 결코 만만치 않다. 특히 언어의 장벽에 부딪히거나 남자 친구로부터 결별 문자를 받았을 때 위축되고 우울해진 그녀는 바닷가를 찾아 위안을 얻는다. 원작의 걸리버가 소인국과 대인국 등에서 겪었던 낯섦을 그대로 경험하며, 그녀는 이방인으로서 상실감과 무력감을 느낀다.


창의적인 무대 연출과 마법 카메라


원작이 여행기라는 점에서, 연극 역시 한 여성의 호주 여행기라는 설정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한국 공항에서 남자 친구와 헤어져 비행기를 타고 호주로 떠나는 장면은 흥미롭게 연출되었다. 비행기를 타고 호주로 가는 여정은 무대 양쪽 천장에 끈을 매달고, 주인공의 이미지가 담긴 핸드폰을 소형 케이블카에 넣어 이쪽에서 저쪽으로 이동시키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미 스스로가 작아진 자신을 바라보는 주인공은 어느덧 걸리버의 화신이 된 것처럼 보인다. 시드니에서 집 구하기, 친구들과의 공동체 생활, 일터, 병원 입원, 오페라 하우스, 하버 브리지 조깅, 바닷속 탐험 등이 마법 카메라 덕분에 스크린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배우들은 그야말로 이미지의 마술사 같다. 이들은 휴대폰, 머그컵, 어항, 풍선, 바가지 등의 일상용품을 활용하여 각양각색의 창의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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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주인공이 병원에 입원하여 MRI를 찍는 장면은 가습기, 바가지, 풍선 등의 오브제를 통해 시각화되며, 이를 통해 인물 바다는 실제 환자의 이미지로 실감 나게 거듭난다. 주인공은 우주로 발사되는 로켓 안의 우주인이 되기도 하고, 바닷속을 유영하는 스쿠버 다이버가 되기도 하는데, 이때 바닷속 풍경은 실제 무대 위 어항을 활용하여 연출된다. 배우들이 어항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만들어낸 이미지는 스크린 속 휴대폰에 담긴 주인공과 결합하여, 진짜 바닷속에서 신나게 유영하는 듯한 주인공의 모습을 생생하게 연출하며 시각적인 환상을 선사한다. 이러한 창의적인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작업실에서 얼마나 많은 브레인스토밍이 이루어졌을지 상상하니, 긴 시간 동안 엄청난 토의와 실험을 거쳐 지금 무대 위에서 화려하게 꽃 피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곧 극단 하땅세의 저력이다.


<걸리버 여행기 : 줌인 아웃>의 주제 : 낯섦


여행의 키워드는 낯섦이다. 더구나 스쳐 지나가는 짧은 여행이 아니라 적어도 어느 정도 정착해야 하는 워킹홀리데이라면, 이 낯섦의 의미는 더욱 크게 다가온다. 낯선 곳에서의 정착은 그동안 자신이 살아왔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만난다는 뜻이다. 언어, 음식, 사람, 문화가 다른 곳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은, 그간 단단하게 이어온 자신 고유의 생각이나 시각 대신 그들의 문화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단단하게 굳어진 기존의 사고 체계를 깨야 하는 과정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하땅세 연극이 제시하는 핵심 주제다.


전통 연극 양식의 해체 : 배우와 오브제


기존 인식을 해체하는 것은, 연극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양식의 해체로부터 시작된다. <걸리버 여행기>에서 배우들은 무대 위에서 때로 요란하게 움직이는데, 그것은 연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기계나 오브제를 작동시키기 위한 몸짓이다. 물론, 사이사이에 배우들의 연기력을 마음껏 발휘되는 장면들이 삽입되어 이미지와 조화를 이룬다. 관객은 이들의 동작을 직접 바라보는 동시에 한편으론 스크린에 집중한다. 배우들은 자기 몸을 매개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데, 이때 이들은 연기하는 배우라기보다 분라쿠의 인형사처럼 오브제들을 조정하는 조정자에 가깝게 느껴진다. 관객은 스크린에 펼쳐지는 환상적인 이미지에 몰입하면서도, 동시에 눈앞에서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오브제 조정자들의 움직임도 함께 바라보게 된다. 이처럼 시선은 동시적으로 분할되어 움직인다. 이러한 무대는 특정 등장인물이 연기하는 전통적인 연극과는 전혀 다른 개념의 연극이다.

전통 서사 방식의 변화 : 단편적 에피소드의 미학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서사의 측면이다. 일반 연극에서 이야기는 핵심 요소이며, 그 이야기의 힘에 따라 연극의 완성도가 달라진다. 그런데 하땅세의 연극은 장중한 이야기를 빈틈없이 엮어 완결된 대단원의 결말을 내어 관객에게 감동을 주려 하지 않는다. 비록 <걸리버 여행기>라는 옷을 입고 있으나, 걸리버는 아예 존재하지 않고, 이야기는 한 여성의 외국에서의 힘든 삶에 초점을 맞춘다. 그 삶은 가령, 집 구하기, 일자리 찾기, 친구들과 어울림, 입원, 하버 브릿지 달리기, 바닷속 잠수 등 단편적인 장면들로 구성된다. 일련의 서사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진행되기보다는,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한 단편적인 에피소드들의 모음으로 이어지는 구성이다. 전통 연극의 줄거리 전개 방식과는 전혀 다른 결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들의 이야기


하땅세의 <걸리버 여행기 : 줌인 아웃>은 거대한 서사 대신 ‘지금, 여기의 몸’을 그대로 보여준다. 배우의 몸과 오브제가 엮여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낯선 세계를 여행하는 한 인간의 내면을 투명하게 비춘다. 카메라의 줌인과 줌아웃처럼, 관객의 시선 또한 어느새 한 여성의 삶 속으로 깊이 들어갔다가 다시 연극의 바깥으로 나온다. 그러나 그 여정의 끝에서 발견하는 것은 단순히 타인의 여행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다. 익숙한 공간을 낯설게 바라보는 일, 익숙한 자신을 타인처럼 마주하는 일, 그것이 하땅세가 제안하는 진짜 걸리버 여행이다. 공연 내내 걸리버는 보이지 않지만, 그 존재는 공연 내내 선명하게 느껴진다. 공연이 끝났을 때, 무대 위 어항 속 물결이 잠시 일렁이는 순간, 관객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지금 나는 어떤 세계의 이방인으로 서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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